유다 컨스피러시 옥성호의 빅퀘스천
옥성호 지음 / 파람북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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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비종교인이다. 아무 종교도 갖지 않았다. 때문에 성경 공부라든지 불경을 한 권 오롯이 읽은 적도 없다. 물론 성경이나 불경 등 '위대한 종교' 경전은 꼭 신자만 읽는 것은 아니다. 경전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인들의 가르침이 있어 예술 저작물들이 늘 인용하곤 한다. 그만큼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되는 내용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들 종교 경전은 수천 년 간 인류의 삶에 기여하고 선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러나 막상 성경 공부를 한 사람도 예수의 가르침에는 알려진 것보다 과장·왜곡됐다고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이런 비판적 이론가들은 나름대로 예수의 실제 행적이나 성경을 통한 가르침이 제자들이 글로 남기는 과정에서 왜곡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독자로서는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이 때문에 독자가 더 이상 보탤 말은 없다. 종교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독교를 공부한 적도 없는 독자로서는 무엇이 잘못 됐고, 무엇이 왜곡됐는지를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는 오늘날 가장 앞선 문화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유럽에서 일어났고, 대부분의 유럽인(미국 포함)들이 기독교인이나 가톨릭 신봉자라서 이에 대항 논리를 펴기에 만만찮다. 독자처럼 문외한은 그들의 논리나 이론은커녕 목회자들의 설교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다. 수천 년 간 내려오며 예수의 가르침 등을 직접 배우고 실천하는 생활을 해왔기에 그들의 논리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속한 것처럼 보인다. 누가 감히 기독교 관계자들의 논리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뒤늦게 출발한 이슬람교가 가장 강력하게 반발하지만(그 이유도 독자는 잘 모른다) 죽고 죽이는 치열한 전쟁만 치를 뿐 어느 한쪽 편을 들 수도 없다. 다만 우리 현대사에서 미국에 진 빚이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에 반발심을 갖고 있지는 않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 『유다 컨스피러시』는 "유다는 정말 예수를 배신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독교에서 예수를 팔아먹은 '배신의 아이콘'으로 수천 년 간 인류의 머릿속에 각인된 유다가 배신자가 아닌 희생양일 수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저자 옥성호는 아버지는 목사이지만 자신은 목회자의 길을 가지 않고,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저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영향에서인지 기독교에 대한 책도 적잖게 낸 전문 저술가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유다와 예수, 사탄과의 관계를 설명한다. “유다를 새롭게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유다만이 예수가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적색신호를 감지한 게 분명하다. 자발적으로 하지 않겠다는 사람을 하게 만드는 길은 뭘까? 유다는 고민했을 것이다. 그가 생각한 방법은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기는 것이었다. 결국 유다는 배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골고다언덕으로 몰아붙였다. ‘하드캐리’ 역할을 한 셈이다. 마음을 바꾼 예수와 예수의 변심을 알아챈 유다, 이것 외에 유다를 저주하는 예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없다.”(p.88)

기독교에서 유다는 배신의 아이콘이요, 예수가 십자가를 지게 한 사악한 존재로 묘사된다. 유다를 악마화하면 모든 것이 간단해지지만, 유다를 둘러싼 많은 것이 간단치 않다. 우선 12제자 중 유다가 재정을 담당하는 소임을 맡았다는 점에서 나름 머리가 좋고 또 예수의 신뢰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또 하나의 문제는 기독교의 대속교리에 따르면 예수의 십자가는 인간의 원죄를 사하기 위한 구원프로젝트인데, 그렇다면 유다야말로 그 프로젝트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심심치 않다. 영지주의 복음서 중 하나인 유다복음서에는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이 실제로는 예수의 명령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유다를 둘러싼 수수께끼를 추적하는데, 유다와 예수 그리고 십자가와 기독교의 복잡한 상관관계를 저자의 예리한 시선으로 파헤치고 있다.

 


 

책에 따르면 가축을 도살장으로 인도하는 훈련된 염소를 ‘유다 염소’라고 부른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팀에 있던 피구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후 ‘가롯 유다’라는 조롱을 받았다. 이처럼 ‘유다’라고 하면 비열하고 배신을 일삼는 이들을 떠올리며, ‘유다’라는 호명은 일종의 주홍글씨와 같다. 유다에게 그처럼 비열함과 배신의 아이콘으로 딱지를 붙이는 것이 정당한 일일까? 기독교 교리는 인간의 ‘원죄’와 그 원죄를 대속하기 위해 희생한 십자가를 진 예수를 기반으로 성립한다. 교리의 흐름으로 보면 비록 가능하다면 피해 갈 수 있게 해달라는 절규가 있음에도,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예정되어 있다. 그 예정된 흐름에서 유다는 어쩌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기독교 신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성서 속 문제적 인물은 많은 상상력을 자극하고, 기독교 교리와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숙고하게 하는 인물이다. 그와 관련된 시도는 몇몇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래전 만들어져 화제를 불러왔고 최근에도 지속해서 공연되는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는 유다가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등장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니코스 카잔자키스 원작으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만든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에서는 유다를 기존과 달리 해석한다. 스승을 등진 배반자가 아니라 십자가의 고행을 결심하도록 이끈 조언자로 그려진다. 이 책에도 소개되는 발터 옌스의 소설 『유다의 재판』에서는 재판 형식을 통해 유다를 변호하는데, 예수를 인간적으로 따랐지만 맹종하지 않고 비판적 관점을 견지했음을 여러 신학적 논거로 전개한다.

 

 

특히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독자도 공연을 직접 관람했기에 저자의 주장에 일부 동의하기가 쉽다. 이 공연은 뮤지컬로서 록 음악에 바탕을 두었지만, 구조적으로는 서곡과 라이트모티프 등이 존재하는 오페라적 요소들 때문에 록 오페라라고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일주일 전부터 십자가형까지를 다루고 있다. 성경 인물들에 대한 파격적인 해석으로 당대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줄거리 자체는 복음서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지만 파격적인 형식과 급진적인 해석으로 인해 등장하자마자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일으켰다. 독자도 매우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 처럼 이 책은 성경을 텍스트로 이후 수많은 저작물에서 인용되었지만 기독교적 해석(4복음서)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을 논거로 꼼꼼하게 유다를 둘러싼 이야기를 추적해간다. 앞서 언급한 내용은 잘못된 성경 해석, 아니면 의도된 왜곡 해석으로 인한 성경의 오용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 중심에 유다가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저자는 4복음서를 중심으로 성경 속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구체적 이름은 언급되지 않지만, 유다가 가장 먼저 등장하는 곳은 마가복음 3장 14-15절이다. 저자는 마가복음에서 유다의 배신 동기를 '향유사건'에서 찾는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마음이 완전히 돌아섰다고 본다. 마가는 유다를 애매하게 묘사하면서, 단 행여나 떨어질 수도 있는 떡고물을 예상했다는 암시를 줄 뿐이다. 오히려 너무도 스승을 믿었기에 그만큼 실망이 컸던 제자, 그리고 누구보다 예수를 과대평가했던 제자였던 가롯 유다를 좌절한 이상주의자로 보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마가는 배신의 동기를 애매하게 처리하는데, 돈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것 때문에 예수를 배신했다는 뉘앙스는 없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애매한 나쁜 놈을 돈독이 오른 진짜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에게 마태는 유다를 극악한 배신자로 그려야만 하는 기독교에게 선구자다. 마태복음에서 유다는 좌절한 이상주의자의 느낌은 완전히 삭제되고, 완전한 돈벌레로 전락한다. 그럼에도 마가와 마태가 그린 유다는 아직까지 유다의 배신과 사탄이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가와 마태에게 사탄은 ‘당연히’ 예수의 십자가를 막는 존재다. 저자는 그렇다면 오히려 유다는 가장 ‘반사탄적’인 인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누가는 단지 돈 욕심에 유다가 배신했다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마가복음 속 돈 이야기를 수정하지 않으면서, 돈과 사탄을 결부시킨다. 배신의 결과로 돈을 받는 것은 사탄이 들어간 유다라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흔히 돈을 세상 악의 근원이라고 할 때, 결국 돈이 사탄이며 사탄이 돈을 거절할 이유가 없게 된다. 누가복음에 와서 유다의 배신은 이제 마태가 묘사한 탐욕의 결과에서 사탄이 개입한 전 우주적 차원의 선과 악의 싸움으로 격상되었다. 누가복음에서 사탄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유다는 요한복음에 들어와서 더욱더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예수의 제자 중에서 회계 담당이며 돈 욕심이 많아서 공금을 수시로 훔치던 도둑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유다와 사탄을 연결한 누가의 구도, 선과 악의 싸움을 더 심화했다. 요한은 단지 우주적 악이라는 사탄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예수가 유다의 배신까지도 사실상 다 기획했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결구도를 더 구체화했다. 예수의 신성을 강조했던 요한에게 유다는 완전한 사탄으로 진화한다.

 


 

저자는 복음서에서 유다가 어떻게 묘사되는지 추적하면서, 이성적으로 바라보면 유다야말로 희생자라고 본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다를 희생자로 받아들일 수 없었는데, 유다가 희생자가 되는 순간, 예수가 가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유다를 희생시키고 성립한 기독교 구원교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역설한다 저자가 보기에 예수가 살려면 유다가 죽어야 했고, 예수를 살리기 위해 지난 2,000년간 유다가 죽어야만 했던 것이 기독교의 교리였다. 문제는 이런 주홍글씨가 유다에게만 붙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가 루터는 아벨의 피에서 시작해 수많은 의인의 피로 영양분을 얻었던 거룩한 땅에 유다의 더러운 피가 흘러 들어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며, 유다의 피는 땅이 먹은 게 아니라, 유대민족이 달려와서 마셨다고 썼다. 그러나 차마 땅에 피를 흘릴 자격조차 없는 배신자 유다는 죽어서도 끊임없이 부관참시당했다는 것이다. 루터는 이처럼 유다를 악마화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반유대주의자로도 잘 알려졌다. 이런 반유대주의의 흐름은 훗날 유대인 홀로코스트와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는 신화에 머물러야 할 예수 이야기가 역사 속에 자리 잡자, 이성은 마비되고 진리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잔혹한 인간 사냥이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고 말한다. 그에게 유대민족을 향한 증오와 복수야말로 마비된 이성과 권력 집착이라는 기독교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례였다. 역사로 자리 잡은 유다에 관한 증오의 창작이 인류의 재앙을 불렀다는 것이다. 저자는 성경의 복음서 속 유다의 모습을 비교 분석하면서, 유다가 어떻게 단순한 배신자에서 악마로 묘사되어갔는지를 밝혀낸다. 유다에 관한 전복적 해석과 총체적 접근은 저자의 견해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성경을 읽는 데 독창적인 영감을 전해준다. 또한 현 기독교에 관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이 책을 모두 읽고서도 '유다의 배신'은 성경에 쓰인 대로 예수란 인물에 대한 배신인지, 예수의 뜻에 의한 자의적 배신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만큼 유다의 배신은 왜곡·확대된 것은 분명한 듯하다. 배신의 원래 목적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반유대주의한 유대 교도 및 유대인에 대한 적의, 증오, 박해, 편견을 의미하는 말로 영어로는 anti-Semitism이라고 하는데, 반유대주의는 멀리는 성서시대부터 보이며, 그것이 19세기가 되어서 영어 호칭이 암시하고 있듯이 인종설에 의거한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출현을 보았다. 여기에서 반유대주의는 종래의 종교를 주요인으로 하는 전통적인 반유대주의와 새로운 인종설에 의거한 반유대주의(좁은 의미의 안티세미티즘)로 구별할 수 있다고 종교학대사전(1998)은 기술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에스더』에 이산한 유대인(디아스포라)에 대한 적의에 찬 반유대적 태도가 이미 기술되어 있다. 헬레니즘·로마시대에는 유대 교도와 그리스·로마인과의 마찰은 주로 일신교와 다신교간의 종교문화의 차이에 의거하였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 여러 왕들의 유대 교도에 대한 관대함으로 인해서 이산 유대교도의 지리적 확대와 인구증가가 눈에 띠었다. 단, 그들은 독자적인 신앙과 관습을 고집하고, 타민족으로부터 격리된 강력한 지역사회 조직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주위에 공포감과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기원후 38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반유대폭동이 발생했다. 한편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점령된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지배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는데, 기원후 135년 발 코호바의 반란을 최후로 유대 교도는 예루살렘에서 추방되고, 모두 이산 유대 교도가 되었다.

 

저자 : 옥성호

 

한국외국어대학교 노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인디애나주 노터데임대학교(UniversityofNotreDame)에서 MBA를 취득했다. 특허 솔루션 전문기업인 위즈도메인에서 10년간 미주지사장을 그리고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국제제자훈련원 출판본부장을 역임했다. 2019년 현재 도서출판 은보와 테리토스 대표를 맡고 있다. 2007년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시작으로 『갑각류 크리스천』 시리즈, 『아버지, 옥한흠』 『진영, 아빠는 유학중』 『진리해부』 『야고보를 찾아서』 , 장편소설 『서초교회 잔혹사』 『낯선 하루』 『영적 대통령』 『숨쉬는 망각』 『아무도 후회하지 않아』 등 스무 권이 넘는 책을 저술했다.

최근 출간한 『유다 컨스피러시』는 『신의 변명』과 『부활, 역사인가 믿음인가』에 이은 ‘옥성호의 빅퀘스천’의 세 번째 저작이다.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갱신을 위한 초석을 만들었던 한국개신교의 거목인 옥한흠 목사의 장남으로 태생적으로 기독교에 해박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를 통해 비판과 성찰이 사라진 한국교회에 일침을 가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저자는 이제, 질문과 상식이 사라진 한국교회를 깨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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