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
봄비눈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7월
평점 :
이 소설 작품 『너와 나의 여름이 닿을 때』는 죽음 후 1년 간의 삶이 주어진다면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물음에 답하는 내용이다. 누구가 그렇겠지만 살아온 날 중 '가장 빛났던 시절'이나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꼽을 것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여름은 첫사랑의 상대인 유현과 연애(?)-불과 2개월-시절로 되돌아간다. 여름은 철학과 강사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어 강사직을 3년 간 유지하고 있었지만 새로운 교수 영입으로 다음 학기는 강사직마저 불투명한 상태다.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학생들과 헤어지며 한 학생으로부터 다음 해에도 여름의 철학과 강의를 더 들으려 한다는 덕담도 한다. 그러나 여름은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앞날에 적잖은 걱정을 한다. 덕담을 한 여학생의 눈빛에서 삶을 긍정하라는 니체의 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자신의 삶은 후회투성이였음을 자성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금과는 다르게살 용기조차 없는 최악의 상태라고 자신을 단정짓는다.
여름은 이미 남자 친구인 태형과 결혼하기로 날짜까지 잡아놓은 상태지만 들뜨거나 즐거운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날은 태형과 웨딩드레스를 고르기로 한 날이라는 것을 상기하고 왠지 마뜩찮은 심정으로 태형과 통화를 한다. "출발? 아, 그게 오늘이었나? 깜빡했네. 회의 있어서 못 갈 것 같은데 그냥 혼자 다녀올래? 드레스 뭐 별거 있나, 뭘 입어도 어울릴 텐데." 태형의 반응에 여름도 "그러자, 태형 씨. 혼자 보면 나도 편하지 뭐. 일 봐요." 둘 사이에 어떤 기대감이나 죽고 못 사는 사랑의 느낌이 없다. 독자들은 분위기를 이 대목에서 눈치 챌 수 있다. 둘 사이가 곧 결혼할 커플이지만 지극히 서로를 사랑해서 하는 결혼이 아니라는 직감이 든다. 무슨 이유인지 마지못해 결혼하는 것처럼 무덤덤한 분위기다. 저자 봄비눈은 둘 사이의 간절함이 없다는 사실을 첫 키스의 장면을 끼워 넣어 함축적으로 표현해 낸다. 첫 키스를 할 땐 귓가에 종소리가 울리고, 결혼할 상대를 만나면 '이 사람이다' 싶다고 하던데, 나는 둘 다 느끼지 못했다.(p.14)
이런 분위기는 〈프롤로그〉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마지막 부분에서 여름의 예기치 못한 사고로 프롤로그는 끝을 맺고 소설은 본격 막이 올라간다. 2학기 종강 후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거리의 분위기는 스산하다. 여름은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끝이 시려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는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걸어 내려가는데 뒤에서 타이어가 끌리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리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밝은 불빛에 눈이 시렸다. 곧이어 머리가 뜨거워진다.
막이 바뀌고 여름은 커피 향이 코끝에 감돌아 눈을 뜬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주위를 살핀다. 전체적인 골조가 목재로 되어 있어 싱그럽고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 안이다. 여름이 앉은 자리는 아주 큰 창문 옆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넓은 연둣빛 잔디밭이 보인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따뜻한 햇살과 바람이 들어온다. 분명 겨울이었는데···. 고요한 적막과 따스한 바람에 이곳이 평범한 카페가 아님을 여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 70대로 보이는 여인이 여름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일러준다. "먼저, 조의를 표합니다. 백여름 님은 금일, 교통사고로 사람하셨습니다. 이 카페는 이승에서 죽은 사람들이 완전한 죽음의 세계, 저승으로 가기 전 머무는 공간입니다."
여름은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멍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다. 익숙한 어조로 그녀는 말을 잇는다. "이곳은 BCD 카페 4호점입니다. 이승에서는 BCD를 인생은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의 선택(Choice)이라고 해석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C는 'Choice'가 아니라 'Chance'입니다. 우리에게 삶이 끝나고 죽음으로 가는 사이, 단 한 번의 기회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름이가 죽은 게 아닌가? 하고 독자들은 의문을 품겠지만 그 기대는 여인의 다음 말로 산산조각 난다. "죽음을 돌이킬 순 없습니다. 다만, 과거의 삶을 1년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p.19)
지금까지 저자가 기술한 사항들을 함축적으로 말한다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앞두고 있던 주인공 여름은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런 여름이 다시 눈을 뜬 곳은 BCD 카페라고 불리는, 낯선 공간이다. 자신을 BCD 카페의 직원이라고 소개한 한 사람이 혼란스러운 여름에게 뜻밖의 말을 꺼낸다. 바로 죽기 전 과거의 삶을 1년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 급작스레 주어진 기회에 여름은 지나온 삶을 회상한다. 젊고 다정했던 부모님의 모습, 부모님께 짜증 내던 기억, 친한 친구와 다른 학교에 가게 되어 울던 자신의 모습과 고등학교 때 열심히 공부하던 추억, 그리고 생을 마감하기 직전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한 모습까지.
그리고 행복해 보이지 않은 자신을 직면한 여름은 문득 첫사랑이었던 유현을 떠올린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타이밍 때문에 솔직하게 자신의 맘을 내보이지 못하고 끝난 첫사랑, 안유현. 여름은 그때 자신이 좀 더 솔직하고 용기 있었다면, 그래서 유현과 만났더라면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생각한다. 첫사랑과 이어졌다면 여름의 인생은 더 반짝였을까? 여름은 카페의 규칙을 지킬 것을 서약하고 죽기 전 마지막으로 주어진 1년, 유현을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
카페의 여인은 여름에게 지금까지의 삶을 단 5분간의 영상을 되돌려 보여준다. 살아온 나날들을 5분 동안 되돌려보며 여름은 그간 자신이 살아온 도중 무심했던 부모의 사랑과 왜 부모들이 그 고생을 했으며, 자신의 결혼과 사랑, 진정으로 사랑을 느꼈던 순간을 모두 알아낸다. 다시 고인이 원하는 시점으로 돌려보내 1년 간의 삶을 더 살 수 있도록 해주는 카페 규칙대로 한 것이다. 여름은 비로소 짧은 영상에서 친한 친구와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되어 우는 모습, 고등학교 때 코피 흘리며 공부하던 모습이 연달아 나온 것도 본다. 수능을 치고 난 뒤 친구들과 함께 머리를 염색하고 서툰 화장을 하는 모습엔 웃음이 나기도 했다. 대학 입학해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며 취한 모습이 나온 순간 놀라기도 하지만 정말 놀란 모습은 그 다음 순간이다. 많이 놀라 두 눈을 번쩍 떴지만 그 순간 영상도 끊긴다.
안유현. 나의 첫사랑. 여름이 놀라는 순간 스치듯 지나간 모습이 분명 그 사람이었다. 그는 15년이 넘은 동안 내 마음속 한 부분을 차지했던, 다른 사람과 연애하면서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날 수 없지만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 21살에 만난 그와의 추억은 시간이 오래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운 얼굴을 보니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이 소설 작품은 우리에게 두 번째 삶이 주어진다면 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란 조금은 허무맹랑한 질문이 들어있기도 하지만 보다 근원적인 이야기는 두 번째 삶이 주어져도 더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삶의 모습을 존중하고 치열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삶은 늘 성공과 행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을까?란 저자의 질문엔 '그렇지 않을 것이다'란 답이 내포된 것이나 다름없다. 책에서 다시 주어진 삶의 기회에 여름은 이번에는 지난 첫 번째 삶에 비해 훨씬 잘해 낼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결코 녹록치 않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책에서도 두 번째 삶 또한 그리 쉽게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첫 번째 삶의 후회를 껴안은 채 유현에게 다가가는 여름의 모습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슬그머니 미소와 함께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스치는 코끝이 찡해지는 향수와 추억의 장면들이 느껴지기도 한다. 풋풋하고 아름다웠던 첫사랑의 추억이야 오죽하겠는가. 주인공은 여자이고, 독자는 남자이지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은 모두 아련한 그리움을 연상케 하고, 눈물마저 고이게 한다. 이름도 기억나고 모습도 희미하게나마 풋풋하고 싱그러운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다른 나이든 모습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게 모습이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독자의 경우엔 그렇다. 이 소설은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인간적인 여름의 두 번째 삶을 통해 우리에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찰하게 만든다.
이 소설 작품의 완성도는 구성에서 약간의 아쉬운 점이 드러난다. BCD 카페의 존재가 이 소설의 전개에 기장 기본적 역할을 하는데 1년의 삶의 연장 혜택이 주어지는 이유나 원칙의 제시 없이 서명 날인한 3조 9개항의 〈주의 사항〉만 주어진다. 주의 사항도 이용 전, 이용 중, 이용 후 3개조에 각 2~4개의 항목뿐이다. 이 가운데 '이용 전' 4항의 경우 "모든 계약자에겐 1년의 기회가 주어진다. 단, 때에 따라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여러 번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는 항목도 너무 작의적인 느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 명기해야 할 듯하다. 독자가 이 주의 사항에 집중하는 이유는 BCD 카페가 죽은 사람에게 1년 간의 삶이 더 주어지는 특이한 설정인데, 이를 관장하는 카페의 분위기와 지켜야 할 사항을 명기해놓은 것이 조금은 허술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책의 남자 주인공 유현은 카페에서 두 번의 혜택을 받았다. 여름과 헤어진 후 한참 있다 우연히 다시 만나는 등의 일이 일어난다. 이를 명기한 〈주의 사항〉의 내용은 상대적으로 아쉬운 점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에 따라 〈에필로그〉에서 안유현이 태어날 때부터의 삼장 이상의 증세가 있었고, 또 여름의 입장에서 전혀 모르는 이 일들이 따로 밝혀야 하는 불필요한 일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런 타임슬립 소설에서 아쉬운 점이 대개 기본 설정에서 허술할 경우 뒤에서 꿰맞춰야 하는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문장이나 구성 부분에서는 이 소설은 탁월하다. 특히 싱그러운 시절의 첫사랑이나 연애 감정을 되새겨볼 독자들에게는 그리움을 선물하는 타임슬립 소설로 안성맞춤의 이야기다.
저자 : 봄비눈
해가 뜨면 철학을 가르치고, 달이 뜨면 사랑 이야기를 씁니다. 당신의 '여름'은 언제인가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커피나 맥주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의 여름 이야기를 읽는 시간보다, 당신의 '여름'을 떠올리는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