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 - 수도원에서 띄우는 빛과 영성의 그림 이야기
장요세파 지음 / 파람북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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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요세파 수녀의 전작 『그림이 기도가 될 때』를 읽은 적 있다. 『그림이~ 』는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독자가 그림을 잘 알거나 장요세파 수녀의 뛰어난 감상평 때문이 아니다. 그림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가 매우 평온해서다. 그림을 대하는 마음 자체가 감정이 실려 있다면 제대로 감상을 하거나 감상의 느낌을 글로 옮기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독자는 그림을 좋아할 뿐, 그림을 그린 적도 없고, 따로 배운 적도 없다. 그래도 그림을 보고 있을 때 올라오는 감정이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이고 평온하게 해주어서 자주 그림을 들여다보게 된다. 저자 장요세파 수녀에게 그림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한다. 진실된 마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니 세상이 보인다는 말은 참이다. 독자가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책을 좋아하는 이유다.

모든 뛰어난 작품에는 한 시대의 모습뿐만 아니라, 시대를 관통해도 변함없는 우리 삶의 진실이 들어 있다고 한다. 화가도, 비평가도, 또 그림을 잘 아는 많은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한다. 인류의 문화적 정보가 한 장으로 압축된 것이 곧 그림이라는 말이다. 저자는 이 책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에서 그림의 의미를 읽어내기 위해서는, 먼저 그림이라는 압축파일을 제대로 풀어내 봐야 한다고 말한. 미술관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가능하지만, 똑같은 그림이라도 안내자가 곁에 있을 때 감상이 더욱 풍요로워지는 것은 그래서일 테다. 『그림이 기도가 될 때』,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 등, 최근 몇 년 사이에만 벌써 여러 권의 그림 묵상 책을 펴낸 요세파 수녀는 이 책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에서도 회색빛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의 마음의 창을 지치지 않고 두드리는 중이다.

 


 

'창을 두드린다'는 저자의 설명에도 공감한다. 저자는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림」이라는 〈머리말〉을 통해 "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무언가 비밀스럽고 두 사람만의 오고 감이 있을 것 같고, 따뜻함과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창을 두드린다는 말을 들을 때 다가오는 첫 장면은 연인들 사이의 그 애틋함, 로미오와 줄리엣의 그 절박함, 가족들의 반대에도 결코 꺾이지 않는 사랑의 간절함 앞에 마주서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저자 자신이 그림을 볼 때, 반대로 그림이 저자의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는 연결되는 순간이다. 만일 벗이 일부러 문을 통하지 않고 창을 두드린다면 무슨 재밌는 일이 있을지 살짝 가슴이 두근거릴 것이다. 벗과 걸어온 그 여정과 이제 막 일어날 조금은 흥미진진한 일 앞에서 삶의 일상성이 살짝 한 단계 올라가는 긴장의 에스컬레이터가 펼쳐지는 순간임을 고백한다. 벗이나 연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만, 혹시 귀여운 옆집 아이가 놀러 온다면, 그리고 나무통을 밟고 올라서 방을 두드린다면 또 다른 느낌일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어쨌든 창을 두드린다는 것은 그렇게 저자 장요세파 수녀에게는 서로에게 특별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설명하고 있다. 수도자인 수녀로서는 하느님 혹은 예수님이 늘 창을 두드리는 분이기도 하겠다.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두드리는 일은 수녀로서 당연하겠지만, 또 하나의 창을 두드리는 행위를 하는 이는 누굴까? 저자는 단연 '그림'을 꼽고 있다. 지치거나 나태해지거나 삶에서 열정이 식어버릴 위험에 처할 때 그림은 늘 저자의 창을 두드린다고 털어놓는다. 하느님이나 예수님에게 기도 드리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 할 때는 그림을 본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뜨거움이 부글거리거나 냉기가 싸아 하니 드라이아이스 연기를 피울 때에도 그림은 저자의 마음에 평화의 강물이 초원 위 풀잎 사이를 흐르듯, 숲속 안개처럼 고요함이 찾아오듯 평온함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전작 『그림이 기도가 될 때』에서 저자는 그림과 자신의 마음에 대해 그림과 기도를 동일시했다. '동일시'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기에 '공감'으로 바꾸어야 할 듯하다. “그림 앞에 서면 눈이 환해집니다. 침침했던 눈에서 무엇인가 걷히면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그림은 제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고, 제 몸이 무거워 들어가지 못했던 신비의 세계를 열어줍니다. 생명, 자유, 용서, 사랑, 초월적인 것,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 종교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그림들은 가만히 있는 저를 잡아당겨 세웁니다. 우선 화가의 삶이 그 안에 녹아 있고, 더 들어가면 화가 자신마저 넘어 저 먼 어떤 것, 인간의 눈에 희미한 어떤 것 혹은 실재가 우리 앞에 턱 놓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어설픈 종교체험보다 훨씬 강렬하게 인간을 초월적 실재 앞에 놓아줍니다. 더욱이 형식적인 예배, 틀에 박힌 기복적 기도로는 가까이 가보지도 못할 세계를 열어줍니다."

저자의 그림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이 책을 통해 한층 엄그레이드 됨을 느낄 수 있다. 우선 저자는 화가의 작품에 담긴 내면 세계를 그려내고자 한다. 한 작품은 실로 화가에게 하나의 세계와 같다. 작품이라는 세계 안에서 화가가 그려내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며, 화가의 어떠한 고뇌가 그러한 세계를 창조해냈는지를 저자 요세파 수녀는 추적해간다. 독자는 요세파 수녀의 글을 따라가며 좀 더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그림에 담긴 작가의 내면을 이해하고, 마침내 작가가 꿈꾸던 하나의 세계와 조우하게 된다.

수도자인 저자에게 그림 읽기는 기도행위와 일치한다고 독자가 이미 간파했다. 세상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찾아가고자 하는 노력은 성과 속, 소박함과 화려함 등 인간이 그어 놓은 모든 경계를 넘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물이 조화롭게 아우러진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장요세파 수녀의 그림 읽기는 구도자(求道者)의 길이기도 하다. 이 책이 환경파괴와 인간성 파괴를 동반하는, 위기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놓치지 않는 까닭도 된다. 요세파 수녀가 그림 읽기를 통해 궁극적으로 건네고자 하는 메시지는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문화적 지식의 축적 이상으로 삶을 바라보는 신선하고도 예민한 지혜와 통찰이 담긴 책이다. 저자의 그림 읽기는 우리 스스로의 내면을 더욱더 깊게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에게 그림은 더 많은 것을 품고 마음을 더 깊게 두드려주는 매개 역할을 해준다. 그림이라는 수단은 눈을 통해 마음의 창을 두드려준다. 요세파 수녀는 그림 이야기를 통해 평면적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더욱더 깊은 내면의 세계로 초대한다. 또한 우리가 미처 못 보았던 것들을 들여다보게 하고, 우리가 넋 놓고 당연하게 바라보았던 사물과 풍경을 달리 보게 한다. 어찌 저자의 글을 안 읽을 수 있을 것이며, 어찌 공감과 감동이 빠질 수 있겠는가?

독자로서는 그림을 통해 어떻게 이처럼 풍성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지 저자의 능력에 놀랍기만 하다. 거기에는 요세파 수녀의 글이 관통하는 하나의 중요한 맥이 있다고 이해된다. 그림을 지식의 관점이 아닌 지혜의 관점에서 풀어낸다는 점이다. 그림이 저자에게 말을 걸어오고, 그 그림과 저자의 대화를 엿듣다가 깊게 빨려들어가는 느낌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 하찮게 여기던 것들과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게 되며,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해준다. 존재 이유를 확인하는 것만큼 위로와 치유를 안겨주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주는 현대문명의 비판으로까지 나아간다, 카스피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는 보기에 따라 호연지기를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저자는 모든 것의 중심에 선 인간의 모습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려는 인간의 오만한 의지를 엿본다. 저자는 개인 내면의 성찰과 문명 비판은 궁극적으로 하나로 이어진다고 얘기하며,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서야 할 인간상을 그려내길 갈망한다.

저자는 그림이 화가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손가락과도 같다고 한다, 그림이라는 창 안에서 화가 자신의 고통과 기쁨, 삶의 질곡과 환희, 승리와 패배의 모든 역동성은 어우러지고 상징으로 버무려져 관찰자에게 참으로 다른 세상을 열어준다. 저자는 자신의 창을 두드리는 그 손가락들을 함께 나눌 기쁨과 설렘, 긴장이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인도한다고 고백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화가의 생애나 삶 또한 마음의 창을 두드리는 손가락들이다. 수많은 화가의 삶이 평탄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 삶의 깊은 계곡에서 그들이 짊어졌던 무거운 짐을 건져 올리며, 요세파 수녀는 그들이 품었던 그 깊은 울림을 번뜩이는 통찰과 함께 전해준다.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었던 아름다움, 두려움, 평화, 혼돈마저 우리 마음의 창을 두드린다.

누구보다 밑바닥 인생으로 보였던 탄광촌 광부들에게 애정을 가졌던, 열정의 사나이 고흐는 광부들과 함께하다가 깊은 좌절을 맛본다. 하지만 그 좌절이 그를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이끈다. 살아생전 그림 한 점 제대로 팔아보지 못한 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며 생계를 이었던 이 가난한 화가는 시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방탕한 삶을 이어가다가 심지어 살인까지 저지른 카라바조는 인간적인 약점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그의 약함이 하느님의 도구로서 회심의 명작을 탄생시켰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화가와 그림이 혼연일체된 경지를 그려냄으로써, 그림 하나 안에서 화가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이다. 「한 사람 여기, '자기 잊음'과 '자기 비움' 사이」란 제목의 글에서 작가 에른스트 바를라흐(1870~1930)의 마음은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득해짐을 느낀다고 말한다. 금방이라도 몸을 일렁거리며 낮은 노랫가락이 흘러 나올 것 같다고 한다. 실제 이 자세를 취해보면 마음이 한껏 가라앉으면서 눈이 감긴다고도 한다. 이 조각상의 모습은 어떤 해석이나 분석에 앞서 마치 허락받을 필요도 없다는 양 그냥 사람 안으로 슥 들어와버린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면 삶 안의 다른 것은 뒤로 사라지고 그곳에 있는 자신마저도 잊어버리고 함께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고 덧붙인다. 자신마저 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을 잊어도 될까? 잊을 수나 있는 것일까? 여러 개의 질문을 독자들과 스스로에게게 던진다. 그리고 "한마디로 표혅하자면 자신을 잊어야 참 자신이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늘 자신을 의식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하나의 표지라고 말한다. 저자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아기를 바라볼 때, 악기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절정에 달할 때를 생각해 볼 것을 독자들에게 주문한다. 이 조각처럼 자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도,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신이 아닌 상대에 집중하고 있다고 알려준다. 아니 오히려 자신을 잊었기에 생겨난 집중은 그 자체로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열어준다고 나지막하게 전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 잊음과 자기 비움은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자신을 비우고 타인에게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채우고 또 채워도 모자라 더 긁어모으기를 온 인생 바쳐 찾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잊을 수 있겠는가?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을 누르고라도 자신이 1등을 해야 하는 사람의 자아는 얼마나 굳어 있겠느냐며 저자는 반문한다.

 


 

봉쇄수도원의 수도자인 저자에게 ‘그림 읽기’는 또한 지극히 간절한 신앙행위이자 구도의 과정이다. 세속의 사람이 일상의 삶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기란 쉽지 않다. 성화는 글을 읽지 못하던 신자들에게 ‘성스러움’을 전하기 위해 발전되어, 그리스도교가 번성하던 시기에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성화는 직접적으로 성경 속 이야기를 전하지만, 요세파 수녀는 굳이 성화가 아니더라도 모든 그림 안에서 하느님의 임재를 확인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평소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우리 머리카락 수까지 다 헤아릴 만큼 늘 함께하는 하느님을 믿는다.

고된 노동 후에 국밥을 나누는 소박한 이웃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찾고, 밑바닥 인생의 거친 삶에서도 하느님의 모습을 찾는다. 요세파 수녀가 그리는 하느님의 사랑은 너무도 원대해 모든 것을 온전히 꼭 안아준다. 기도이자 묵상이기도 한 그림 읽기는 꼭 신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영적 가치를 돌아보게 해준다. 이 책은 저자 요세파 수녀와 그림의 깊은 대화다. 독자는 처음에 엿듣는 심정으로 귀 기울이는 청자에서, 이내 직접 그림과 대화하는 화자로 변해갈 것이다. 그림과 함께 온갖 하소연을 나누며 치유와 위로를 온몸으로 느끼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 : 장요세파 수녀

 

일본 홋카이도의 트라피스트 여자수도원에 입회. 현 창원 수정의 성모 트라피스트 봉쇄수녀원에서 수도 중이다. 지은 책으로 시집 『바람 따라 눕고 바람 따라 일어서며』와 그림 에세이 『수녀님, 서툰 그림읽기』, 『수녀님, 화백의 안경을 빌려 쓰다』, 『그림이 기도가 될 때』, 『모자라고도 넘치는 고요』가 있다. 엄격한 수도회의 규율에 따라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해 밤 8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도와 독서, 노동으로 수도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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