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
마거리트 히긴스 지음, 이현표 옮김 / 코러스(KORUS)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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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국에 가혹했던 전쟁과 휴전』은 한국전쟁 종군기자의 생생한 기록이 담겨 있어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 우리 대한민국은 아직 70년 간 휴전 상태를 지속하고 있으며, 통일을 국가 제 1의 과업으로 지정했으면서도 이루어지지 않은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까 염려가 큰 상황에서 이 책은 더 의미가 있다. 물론 우리의 의사나 의지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란 '꿈'은 '소원'으로 바뀌었지만 70년 전의 상태에서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 안타까움이 만성화될 상태여서 이 책의 발견은 큰 전환점으로, 새 희망으로 삼은 만한 내용이 독자 입장에서는 더 없이 반갑고 고맙게 생각한다.

올해 2023년은 한국전쟁 휴전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70주년의 해이다. 이 책은 이를 기념하여, 미국의 전설적인 여류언론인이 남긴 한국전쟁과 휴전에 관한 글들을 엮어서 단행본 으로 펴냈다. 책의 기획과 제목을 정하고, 주석에 관한 조언은 물론 추천사까지 써준 분은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고, 번역과 주석은 이현표 전 주미국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이 맡았다. 차마 기억하기조차 싫은 한국전쟁의 기억을 다시 꺼내고 되돌아보며 통일에의 염원을 키워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많은 독자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듯하다. 독자로서도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증오나 지구상에서 없애야 할 '적'보다는 대다수는 함께 살아가야 할 북한 주민들에 대한 동정심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어 이 책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특히 독자처럼 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한 시민으로서 인류의 나아갈 길을 함께 생각해볼 기회를 찾는다는 점에서 이 책은 반가움을 넘어 황홀함까지 선사해 준다.

이 책의 저자이자 한국전쟁 초기 6개월을 병사들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당시의 기록과 군의 움직임 등을 생생하게 담아낸 마거리트 하긴스(1966년 베트남전쟁 취재 중 풍토병으로 병사)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를 기리는 계기가 된다.

 


 

하긴스는 한국전쟁 발발 나흘 후인 1950년 6월 29일 수원 비행장에서 전쟁상황의 시찰 차 방한 중인 맥아더 장군을 만나고, 그의 전용기에 동승해 도쿄로 가는 도중 ‘한국에 지상군 파병’에 관한 특종을 건진다. 이후 그녀는 6개월 동안 맥아더 장군의 특별 배려로 전선을 취재하며, 여러 특종 보도를 하고, 1951년에는 한국전쟁에 관한 세계 최초의 단행본 『War in Korea』를 발간하여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다.

기억하기 싫지만 이 책은 어쩔 수 없이 남침 상황의 기억을 꺼내야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인민군)이 한반도를 적화하기 위해 중공을 등에 업고, 소련의 군비지원과 조종하에 침략전쟁을 도발했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한민족의 국기인 태극기를 배신한 채 소련이 디자인해 준 인공기를 앞세운 채 동족의 가슴에 총을 겨눴다.

휴전과 한미동맹체결 70주년에 하긴스를 다시 소환한 분은 이 책의 역자 이현표다. 〈역자 후기〉에 따르면 1999년 9월 어느 토요일 아침,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근처의 유서 깊은 벼룩시장이다. 그곳의 어느 진열대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데어 슈피켈〉 시사주간지에서였다. 1950년대 초에 발간된 잡지들이라 구미가 당겼다. 잡지를 얼마간 들추다가 우연히 미군 모자에 군복을 입은 미모의 표지인물이 눈에 띄었다. 마거리트 하긴스였다. 1951년 7월 11일자 이 잡지는 커버스토리로 「Kriegsschauplatz Korea(한국 정쟁터)」라는 책자의 저자인 그녀를 다루고 있었다. 궁금했다. 도대체 그녀가 누구이길래 독일 최고 시사주간지 표지인물이 되었을까? 그러나 역자가 히긴스의 이름과 얼굴을 알았을 때 그녀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주독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독일에 머무르던 역자는 그녀가 남긴 한국전쟁에 관한 저술이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즉시 베를린의 고서점을 수소문하여, 독일어 번역본을 샀고, 미국의 고서점에 연락하여 영어로 된 원서도 구입했다. 당시 해외에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일이 본업이다 보니 한국과 관련된 영어, 독일어 등 외국어로 된 많은 서적과 음반 등 자료를 수집했다고 역자는 말한다. 부끄럽게도 그때 처음 하긴스를 알았고, 그녀가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도 처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이 경험을 토대로 2000년 5월 28일 주독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의 인터넷 웹진 'Koreaheute(오늘의 한국)'에 마거리트 히긴스에 관한 기사를 독일어와 한글로 실었다고 한다. 또 2005년 2월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으로 부임해서는 2005년 8월 14일 워싱턴의 케네디 센터에서 〈히긴스의 눈에 비친 한국〉이란 음악을 선보였다. 그리고 2006년 7월에는 〈마거리트 히긴스에게 보내는 헌사〉라는 DVD를 제작했다.

누가 자신에게 히긴스가 누구냐고 물으면, 자신있게 이 책의 뒤표지에 실린 사진이라고 대답하고 싶다고 역자는 말한다. 앞서 언급한 이 장면은 한국전쟁 발발 4일 후인 1950년 6월 29일, 대한민국 수원 비행장에서 오른팔을 허리에 얹고 70세의 맥아더 장군과 마주 서 있는 30세의 당돌한 여기자 말이다.

하긴스는 트루먼, 아이젠하워, 케네디, 존슨 등 당대의 모든 미국 대통령과 인터뷰했던 여류 언론인이다. 심지어 케네디 대통령과 그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 미 법무부장관과는 가족처럼 지냈고, 존슨 대통령은 히긴스의 자택을 방문했을 정도라고 귀띔한다. 이미 베테랑 종군기자이고 영향력 있는 언론인임을 반증하는 예로 이해된다.

 

 

히긴스는 한국전쟁 종군기자로서 전략 지휘관들뿐만 아니라 서울이나 전장의 민간인들도 만나 인터뷰 등 취재에 열과 성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따뜻한 마음으로 한국인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황이 급박한 가운데 불시 침략을 받은 한국군과 미군은 초반 밀리며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전황을 예리하게 읽고 판단하는 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책에 한 대목을 옮겨본다.

해 질 무렵 우리는 호위를 받고 출발했다. 줄곧 앞길을 가로막는 짓궂은 빗줄기를 뚫고 부지런히 달렸다. 스코트 중령이 말했다.

"그들은 여기서 적어도 7마일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서울로 가는 길이 게릴라들에 의해 쉽게 차단될 수 있습니다."

서울에 이르는 길은 피란민들로 붐볐다. 수백 명의 한국 여인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는 커다란 짐보따리를 이고 있었다. 수십 대의 트럭은 나뭇가지로 교묘히 위장됐다. 한국군 장병들은 지프차와 말을 타고 양방향으로 줄지어 쉴새 없이 지나갔다.

비에 젖은 거리 위에서 피란민들이 우리 미국인의 작은 차량 행렬을 향해 환성을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은 가슴 뭉클하면서도 어딘지 겁나는 경험이었다. 그들은 미국이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애처로울 정도로 뚜렷한 확신을 가진 듯했다. 그때 문득 내 머릿속에는 하나의 간절한 소망이 자리 잡았으며, 이후에도 나는 종종 같은 생각을 했다.

"제발, 우리가 저 사람들을 낙담시키지 않았으면 좋겠어!"(p.25)

 


 

히긴스는 책을 통해 그가 한국전쟁뿐만 아니라 세계 정세와 국제 정세에 능통한 관점을 갖고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한국전쟁 동안 종군기자로 활동했지만 세계에서의 공산주의 사회의 확산, 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국제적 힘이 어디로 몰리고 있는지, 그리고 그 힘의 잣대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어떻게 균형을 맞추거나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동하도록 해야 하는지에 대해 혜안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정세 판단을 정확하게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나는 1948년 소련이 베를린 장벽을 설치한 순간, 미국의 지도자들이 가상의 전쟁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어야 한다고 본다. 소련은 그때 힘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트루면 대통령이 350만 명의 병력으로 미국을 방어할 수 있다고 언급한 것은 웃음거리이다. 모든 책임 있는 장교는 우리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면, 1.400만 명에 근접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미국인이라면 다 같겠지만, 나도 전면전을 준비하여 긴장 상태를 조성하는 것은 자유를 위협하는 것임을 잘 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우리가 대처할 수 있을 것으로 새악ㄱ하낟. 우리의 자유로운 바언과 자유로운 언론의 관행은 그 뿌리가 충분히 깊다. 따라서 우리는 군사독재체제가 되지 않고도 소련에 대항하는 군사력을 정비할 수 있다. (중략)

한국전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비공산세계에 손쉬운 표적이 있다고 생각하면, 언제 어디라도 군사력에 호소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침략을 막을 수 있도록 압도적인 힘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p.273~274)

 


 

섹스 심볼 마린린 먼로를 뺨치는 관능적 육체와 미모에 최고의 지성까지 갖춘 종군여기자가 한국전쟁 발발 이틀 후부터 미군과 동거동락하며 전선을 누비고 있었다. 그 이름은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 270명의 종군기자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던 히긴스는 전쟁 초기 6개월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한강 인도교 폭파·평택과 천안전투·대전전투·낙동강전투·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장진호전투 등을 직접 목격한 산증인이었다.

『War in Korea』에는 맥아더라는 이름이 다른 인명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이 등장할 뿐 아니라, 히긴스와 맥아더의 사이가 무척 가까웠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질 만한 부분도 있다. 심지어 히긴스와 맥아더가 이 책을 공동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만든다. 또한 『War in Korea』에는 한국전쟁을 다룬 수많은 국내외의 저술과 차별화되는 매우 시사적이고, 객관적이며, 흥미롭고,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저자 : 마거리트 히긴스

미국 버클리대학교, 컬럼비아 대학원 졸업 후 1942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 신문에 입사하여 런던·베를린·도쿄·모스크바에서 특파원으로 1963년까지 활동하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던 전설적인 여류언론인이다. 특히 한국전쟁 초기 6개월 동안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여러 특종을 보도하고, 한국전쟁에 관한 단행본인 『War in Korea』를 발간하여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 수상자가 되었다. 종군기자로 활동 후에도 1951년∼1954년까지 한국을 7차례 방문해 다양한 인터뷰를 통해 한국전쟁 휴전에 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역자 : 이현표

고려대학교 독어독문과를 졸업하던 해인 1978년 제22회 행정고등고시 합격 후, 문화부 해외공보관에서 30년 동안 해외에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공무원으로 일했습니다. 주로스앤젤레스 한국문화원 문화관, 주독일한국대사관 공보관, 주독일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주미국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을 역임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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