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5
나카노 교코 지음, 조사연 옮김 / 한경arte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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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전 명칭이 '프로이센'이었다는 사실은 독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가문의 명칭인 줄은 이 책 『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를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은 명화를 통해 유럽 왕조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시리즈’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 책은 『~ 합스부르크 역사』, 『~ 부르봉 역사』, 『~ 영국 역사』, 『~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에 이어 완결작이라고 한다. 저자 나카노 교코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서 시작해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의 역사를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Hohen Zollern) 왕가는 현대 유럽 지도의 원형을 만든 주인공이다. 몇 세기나 신성로마제국 아래 있으면서 300개나 되는 중소 주권국가로 분열돼 있었던 독일은 호엔촐레른가 역대 가주들의 분투 덕분에 19세기에 마침내 하나로 통합된다. 더욱이 이때 같은 게르만 민족이었던 합스부르크가를 배제하는 형태로 독립해 세계 최강국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며 유럽 역사의 주목받는 나라로 탈바꿈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조와 함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왕조가 와해되기 전까지 프로이센 왕조의 찬란한 역사는 지속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왕가를 대표하는 인물이 그려진 명화를 선정해 소개하고, 명화 속 인물에 얽힌 사건과 시대 배경을 알려준다. 그리고 왕가 계보도와 연표를 함께 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프로이센을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재미있고 친근한 스토리텔링을 선보인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독일 근대 역사와 함께 명화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프로이센 호엔촐레른 가문은 합스부르크가가 스위스에서 탄생 후 빈으로 이주해 찬란한 꽃을 피웠듯이, 처음부터 프로이센이 본거지는 아니었다. 처음은 독일 남서부 슈바벤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이었는데, 11세기 중반 이후부터 13세기 어느 시점까지 힘을 기른 후 해발 850미터쯤 되는 호엔촐레른산 정상에 성을 세웠다. 그리고 이때 가문의 이름을 호엔촐레른가로 바꿨다.

13세기 프로이센 지역에 살던 옛 독일인은 고대 토착 프로이센인을 몰아내고 이 지역을 완전히 차지했다. 이유는 종교 문제였다고 전해진다. 기독교 신도인 독일인에게 다신교였던 고대 프로이센인은 정벌해야 하는 이교도 종족에 불과했다. 신성로마제국은 이곳에 종교기사단을 파견한다. 이때 파견된 기사단이 템플기사단, 성요한기사단과 함께 중세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독일기사단(튜턴기사단)이다. 독일기사단은 수십 년에 걸친 분쟁을 제압하고 프로이센을 지배하며 영토를 차지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일종의 수도회 국가가 되지만 어디까지나 바티칸과 신성로마제국의 속박 아래 있었고, 수장인 총장은 공화정처럼 선거로 선출했다.

이로부터 250년이 더 지난 1510년. 20대 젊은이가 제37대 총장에 선출된다. 바로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기사단령이었던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가의 공국으로 거듭난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 때 에스파냐 계승전쟁에서 합스부르크가 진영에 가담하기로 약속하면서 중간 규모의 공국에서 작지만 왕국으로 격상하는 데 성공한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프로이센 왕조 초대 왕이 된다. 이후 9명의 왕이 217년 동안 통치하며 부국강병을 이룬다.

 


 

책에 따르면 프로이센 왕조 역사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단연 프리드리히 대왕이다. 18세기 유럽은 절대군주가 계몽사상을 몸에 두르고자 했던 시대다. 각 국왕은 중세적인 강권 일변도에서 벗어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에 기초해 국민을 지도함으로써 국가 근대화를 촉진하고자 했다. 이 이상적인 계몽 전제군주상에 꼭 들어맞은 인물이 프리드리히 대왕이었고, 이 점이 프로이센의 위상을 더욱 드높였다. 철학자 칸트의 말을 빌리자면 “프리드리히 시대”였다. 그 옛날 베르사유에 군림했던 금빛 태양왕 루이 14세 대신, 새 시대를 맞이한 지금은 군복 차림의 지식인 대왕이 슈퍼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스위스 출신의 초상화가 안톤 그라프가 그린 〈프리드리히 대왕〉은 70세를 앞둔 노년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많은 동시대인에게 왕의 특징을 가장 잘 포착한 초상화라고 인정받은 작품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필연적으로 화가의 대표작이 됐으며, 대량의 복제와 판화가 나돌 정도였다. 이 그림은 눈이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힘 있고 생기 넘치는 큰 눈이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에 걸렸다가는 모든 게 다 들통 나 체념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비록 세월의 무게에 눌려 등은 굽고 피부는 처지고 이마, 눈가, 볼, 입가를 비롯한 온 얼굴에 주름이 깊지만, 왕의 강인한 정신은 조금도 쇠하지 않아 보인다.

그림 속 앞가슴에 찬 검은 독수리 훈장에는 ‘SUUM CUIQUE’라는 라틴어 문자가 새겨져 있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에서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한 각 개인은 원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라는 의미로 해석됐다. 왕국의 일체감 및 자유주의와 종교적 관용의 기초가 되는 문구이자 프리드리히 대왕이 목표로 삼고 마침내 이뤄낸 나라의 모습이기도 하다.

 


 

3대 왕인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프로이센은 점차 세력을 키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3세, 4세를 거쳐 흰수염왕으로도 불리는 빌헬름 1세 때 이르러 독일 제국을 통일하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는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라는 이인삼각 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프로이센 왕조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다. 이로써 호엔촐레른 왕조 217년의 역사는 빌헬름 2세를 끝으로 종언을 맞이했다.

프로이센은 자그마한 공국에서 시작해 왕국으로 성장한 후 독일 통일을 이룬 뒤 제국으로 발돋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왕조, 로마노프 왕조들처럼 와해되고 말았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정신이 밑바탕에 있었기에 이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을 잘 극복하고 지금도 여전히 대국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근검절약, 실용주의 정신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접할 수 없었던 프로이센의 명화와 역사를 명쾌하고 흥미진진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이야기와 함께 따라가다 보면, 프로이센이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역사가 아닌 더 알고 싶은 역사로 다가올 것이다.

앞서 언급한 호엔촐레른성은 15세기 중반에 발생한 전란으로 완전히 파괴됐다고 책은 언급하고 있다. 얼마 후 같은 곳에 두 번째 성을 재건하지만 합스부르크가에 빼앗겼고, 18세기 말 합스부르크가가 버리다시피 한 뒤로 폐허가 됐다. 현재 남아 있는 성은 세 번째 성으로, 19세기에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폐허가 된 성을 다시 세우고 아름답게 단장했다. 왕태자 시절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일족 발상지인 호엔촐레른성이 무참히 파괴된 모습으 보고 재건을 결심했다고 알려져 있다. 북부 프로이센(발트해 연안 지역)이 거점이 된 지 이미 몇 세기가 지났음에도 자손은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센과 독일의 역사는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배울 때 익혔던 것이 전부이지만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 재상〉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독일의 중흥기에 뛰어난 활약을 했던 인물들이라고 배웠기에 그렇다. 이 책에는 70세를 앞둔 시절의 '노년의 대왕' 프리드리히 2세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눈에 띈다. 스위스 출신의 초상화가 안톤 그라프가 그렸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많은 동시대인에게 왕의 특징을 가장 잘 포착한 초상화라고 인정받은 작품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화가의 대표작이 됐으며, 대량의 복제와 판화가 나돌았던 사실은 앞서 언급한 대로다. 한 가지 덧붙일 말은 히틀러의 지하 참호 집무실 벽에 걸려 있던 유일한 그림으로도 유명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프리드리히 대왕 노년의 초상화를 그려 이름을 널리 알린 안톤 그라프는 그로부터 약 10년 후 새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재위 1786~1797)에게도 초상화 의뢰를 받는다. 그 작품이 바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이어 42세의 나이로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왕태자 시절이던 21세에 사촌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지만 3년 만에 이혼 후 같은 해 재혼해 여덟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그러나 초혼과 재혼 상대 모두 대왕이 밀어붙인 정략결혼이라서 왕비에게는 아무런 애정도 느끼지 못했다. 결국 죽을 때까지 화려한 엽색가 기질을 발휘해 왕비를 불행에 빠뜨렸다고 전해진다.

빌헬름 2세는 끊임없이 애접과 연인을 만들었는데, 개중에는 비밀 결혼한 여성(물론 중혼이다)도 두 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사랑한 여성은 아홉 살 연하인 빌헬미네 엘케뿐이었다. 빌헬미네는 아버지가 궁정악사로 신분은 천했다. 하지만 15세 때 왕태자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왕태자의 애인이 됐고, 나중에는 리히테나우 여백작 지위를 받아 공식 총회에까지 올랐다. 폴란드인 여류 화가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가 그린 벨헬미네의 초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풍성한 핑크빛 새틴 드레서 타조 깃털 장식을 곁들인 맵시 있는 모자에 뺨에 그려 넣은 점까지 완벽한 프랑스 로코코 복장이다. 아름다운 눈썹과 고집 있어 보이는 눈, 두툼한 입술이 특징인 그녀에게 붙여진 별명은 '프로이센의 퐁파두르'였다. 총회 퐁파두르 후작이 루이 15세 대신 정치를 움직였듯이 빌헬미네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를 뒤에서 정치적으로 조정했을까? 저자도 의문부호를 남긴다.

 


 

이 시기 독일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한 인물은 아무래도 비스마르크다. 우리에게 '철혈 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는 과도한 업무와 폭음, 폭식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눈빛만은 여전히 상대를 압도할 듯 날카로웠다고 한다. '귀공자 화가'라는 별명을 가진 부유층 출신의 프란츠 폰 렌바흐는 60대부터 만년에 이르는 비스마르크 후작의 정장, 평상복, 군복 차림을 비롯해 모자를 쓰지 않은 모습, 철모나 중절모자를 쓴 모습, 당당히 서 있는 모습, 피곤하게 앉아 있는 모습 등 실로 다양한 모습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가운데 〈비스마르크〉는 날카로운 눈빛이 살아 있다. 일어서면 그 거구(190cm, 100kg)에 압도될 듯하다. 더욱이 젊은 시절부터 수십 번이나 결투를 치른 용사라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그 자신감과 위엄을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을 '독일인'이라기보다 '프로이센인'이라고 생각했고,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오스트리아가 됐든 독일 영방이 됐든 전쟁을 일으키는 데 아무 망설임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비스마르크는 노구에도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열정으로 프로이센의 강대국 만들기에 앞장 섰다. 그의 외교력은 물론 국제 감각, 전쟁에서의 승리하는 방식 등 한 나라의 왕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정치가였던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게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오랜 준비와 함께 결코 중단 없는 추진력을 발휘한다. 중간 중간 필요하다면 어느 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한다. 아니 어쩌면 유도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전쟁 대비에도 철저했다고 한다. 주위 강대국을 하나씩 하나씩 정복하고 굴복시키는 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전쟁을 '이길 전쟁'으로 바꾸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주변국의 모든 정세를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렵 비스마르크에게 가장 눈엣가시는 프랑스였다. 프랑스가 독일 통일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의 전쟁 불가피 상황을 만들어놓은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관광객으로 가장한 프로이센의 스파이가 프랑스 각지의 전장이 될 만한 곳을 돌며 몰래 조사했으며, 철도망, 무기와 탄약, 병사, 병참 모두를 파악하고 대비했다. 프랑스는 아무것도 몰랐다고 한다. 스당전투는 불과 하루 반 만에 끝났다. 나폴레옹 3세는 8만3,000명의 장병과 함께 항복했다.

 


 

근심 따위 없는 이 아담한 궁전에서 대왕은 전쟁과 정무 틈틈이 플루트 콘서트를 열고 시 쓰기와 작곡, 독서를 하고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기력을 충전했다. 선별된 소수만이 이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었는데, 대왕의 누이와 여동생과 그들의 시녀를 빼고는 거의 남성뿐이었다. 당연히 별거 중인 왕비를 초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쌍한 왕비는 남편을 존경했다고 하는데, 대왕은 가끔 왕비와 마주칠 때마다 “마담, 조금 살이 찌셨나요?”라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p.80) - 「제4장 아돌프 폰 멘첼, 〈상수시궁전의 식탁〉」중에서

 

저자 : 나카노 교코(なかの きょうこ, 中野 京子)

일본 홋카이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교에서 독일 문학과 서양 문화사를 강의하고 있으며 독문학자이자 작가로 활발히 활동 중이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 《나카노 교코와 읽는 명화의 수수께끼》, 《명화와 함께 읽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 《다리를 둘러싼 이야기》 등 다수의 저서를 집필하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등을 옮겼다. 월간 〈분게이슌주〉에 ‘나카노 교코의 명화가 말하는 서양사’를 연재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무서운 그림》 시리즈, 《명화의 거짓말》 시리즈, 《나카노 교코의 서양기담》, 《욕망의 명화》, 《운명의 그림》, 《처음 가는 루브르》, 《내 생애 마지막 그림》, 《오페라처럼 살다》, 《명화로 보는 남자의 패션》, 《미술관 옆 카페에서 읽는 인상주의》, 《마리 앙투아네트 운명의 24시간》, 《세계의 다리를 읽다》, 《잔혹한 왕과 가련한 왕비》, 《무서운 그림으로 인간을 읽다》,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 등이 있다.

 

역자 : 조사연

일본 도쿄가쿠게대학 대학원에서 일본근대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일본 교도통신의 한국어 번역팀에서 근무했으며, 글밥 아카데미 수료 후 지금은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경영전략으로서의 영업』, 『구독경제는 어떻게 비즈니스가 되는가』, 『나는 낯을 가립니다』, 『질과 골반이 건강해야 여자가 행복하다』 등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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