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없는 사진가
이용순 지음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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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카메라 없는 사진가』는 표제어 자체로만 보아도 '슬픔'과 '고통'을 내포하고 있다. 마치 '붓 없는 화가', '펜 없는 문필가'를 연상케 한다. 이 글의 저자 이용순은 사진가다. 저자는 미국 시카고의 콜롬비아 칼리지와 뉴욕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한 정통 포토그래퍼이며, 미국과 서울에서 8회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중견 작가이다. 또 최근의 아홉 번째 개인전에선 특유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내면의 풍경과 문학적 서정의 순간들을 포착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왜 '카메라 없는 사진가'가 되었을까.

고통스러운 기억이지만 이 책이 출간된 과정을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어느 날 카메라가 들려있어야 마땅할 사진가의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알고 지내던 어떤 이의 부탁을 받고 심부름을 해준 것이 빌미가 되었다. 범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파놓은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 일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이 어리숙한 예술가는 2년여의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그 낯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록이며, 영상에 대한 감각을 문자의 형식으로 풀어낸 또 다른 창작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나는 그곳(교도소)에서 에세이 형식으로, 때로는 시의 형식으로 카메라를 대신해 내 생각을 표현해왔다. 그 노트가 무려 17권에 달했다. 다행이었다. 글과 사진은 정말 많은 것에서 비슷했다. 서툰 내 생각이 온전하게 글로 들어와 박혔는지는 내가 판단하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이 행위를 두고, 어느 사진가가 카메라가 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사진을 찍었노라고 이야기해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다."(p.9)

 


 

사진가 이용순이 사진이 아닌 글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해냈다. 극한의 환경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극복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스스로 훌륭하게 이겨낸 자신을 오히려 사진 예술의 진정한 의미를 글로 표현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깊은 울림을 준다. 사실 사진과 문학은 엄격히 다른 분야의 예술이다. 그러나 저자의 글로 쓴 사진은 예술이 무엇을 표현하든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작가 정신, 공감은 서로 다른 분야의 예술에 흐르는 것들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요소임을 확인시켜 준다. 사진가가 글로써 자신의 예술을 어찌 다 표현해낼 수 있으랴. 사진 예술의 독창성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저자는 두 가지 예술의 공통점을 뽑아내 서로 다른 분야에 스며 있는 예술 감각은 같다는 점을 인식시켜준다.

이 책에 수록된 시와 산문도 예사롭지는 않다. 탄탄한 문장력과 문학적 안목이 눈길을 잡아끌 정도로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 보인다. 시 작품의 수준 또한 저자가 사진가가 맞나 싶을 정도다. 책에는 짙은 서정성을 바탕으로 내면의 심층에 다가가는 깊은 시선이 돋보이는 저자의 아름다운 사진 작품 20여 점을 수록되었다. 책의 전반에 흐르는 일상과 주변, 인간의 내면에 대한 섬세한 관찰, 따뜻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예리한 감수성이 빛을 발하는 매우 독특하고도 매혹적인 책이 됐다. 사진에서 흐르는 분위기는 고독하지만 평온함을 준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교도소 안의 생활을 표현한 부분을 읽을 때면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했을까. 모든 것을 감수하고 교도소에서의 생활에도 적응하면서 저자의 마음속에서 숨어 있던 예술 감각과 예술혼이 일어나는 것 같다. 그것이라도 있어야 살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안타까움에 독자가 오히려 미안할 정도다.

 


 

독자의 심정도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뜻이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저자를 만난 일도 없을 일반 독자들은 교도소 생활을 견딘 것만으로도 위로 격려가 된다. 그러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풀리겠는가? 저자는 자신의 사진 20장을 곳곳에 배치해 답답한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듯이 평온함을 보여준다. 또 어쩌면 분노할 독자들을 위해 평온하고 일상적인 풍경도 보여준다. 물론 여러 장의 「비 오는 날」 중에는 비는 보이지 않는데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이 바닷가를 배회하는 듯한 모습에서 '모순된 행동'을 표현하는 듯하다. 또 「하얀 아침」에서는 자욱한 안개로 흐릿한 시야로 자신의 교도소 생활을 떠올리게도 한다. 「자화상」은 그야말로 고독한 모습의 한 사람만 텅빈 바닷가에 서 있다. 철저하게 고립된 자아의 표출인 것 같다. 몇 장의 같은 제목 「사막에서」에는 사람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덩그러니 사막의 모습만 드러내고 있다. 이 또한 철저한 고독과 함께 막막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숨어 있다.

예술가에게 획일적 질서의 강요는 치명적일 것이다. 더욱이 통제와 감시 속의 예술가는 뭍에 오른 물고기나 다를 바 없을 터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의 예술가들이 일제에 항거했는지를 되돌아보면 예술가와 통제, 감시, 획일적 질서는 전혀 맞지 않는 단어들이다. 그가 교도소에서 보냈을 인고의 시간은 수백 배 더 길게 느껴졌으르리라. 또 사진 예술가인 저자에게 더 견디기 힘든 건 창작 도구(카메라)의 상실이었을 것이란 추측은 쉽게 이해된다. 자, 이제 어찌할 것인가. 머릿속에 들끓은 이미지들의 아우성을 어떻게 끄집어내 형상화할 것인가. 저자가 주저 없이 펜을 든 이유다.

 

 

그가 교도소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종일 떠들어대는 TV 소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힘들었던 초기의 몇 개월이 지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일을 〈책 머리에〉 적었다. 이에 따르면 첫째는 독서였다. 사람은 정말로 적응하는 존재 같았다. 그 소음 속에서 마침내 책의 글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오래전 글을 쓰던 기억을 더듬어 주섬주섬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보다는 그동안 읽지 못했던 철학서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원해서 교도소 안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진가다. 표현의 욕구가 강한, 카메라가 없는 사진가다. 이 상황을 어찌할 것이낙. 어떻게 사진을 찍을 것이가. 어떻게 이 눈에 보이는 생소한 그러나 충만하게 내 가슴을 적셔오는 이 오브제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혼란스러운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나는 이내 사진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될 것이다. 첫째, 사진이 카메라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진의 개념을 좀 더 현대에 맞게 풀어낸다면 아무래도 그 의미의 폭이 넓어져야만 한다. 둘째, 종이에 프린트된 것만이 사진이라고 하지 말자. 지금은 영상의 시대다. 영상의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있으며 사진도 그 영상의 중심 언어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 역시 문제는 없다. (중략) 사진은 분명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가슴으로부터 토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로 인해서 사진은 거짓이 아닌 참으로써 내적 경험을 토대로 한다. 내적 경험은 감정으로서의 경험이며 이는 생각 혹은 사고에 의존하다. 또 이는 외적 경험에 대한 주관적 판단일 수도 있다. (중략) 요즘의 나는 종종 시를 쓴다. 나는 결단코 나의 시가 언젠가는, 누구에게는 사진으로 환원되어 보이기를 바란다. 나는 사진가이기 때문이다.”(p.28~30) - 「시는 사진이다」 중에서

 


 

저자는 그렇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다. 조리개로 들어오는 광원을 계산하며 셔터를 누르는 대신, 용수철 없는 재소자용 플라스틱 펜에 마음의 빛을 비추며 써 내려간 것들이었다. 계절이 열 번쯤 바뀌고 그가 일상에 복귀할 때, 그의 손에는 이 책의 초고가 될 열일곱 권의 노트가 들려있었다. 이곳에 담긴 글에는 역시나 ‘사진가다움’이 선명히 드러난다. 사진이란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는 한 지점을 포착하여 물성을 부여하는 것. 그래서 사진을 흔히 기록의 동의어처럼 취급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사진은 그곳에 콘텍스트가 부여된 기억(memory)에 가깝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진은 역사를 담고, 어떤 사진은 인물의 개성을 담고, 어떤 사진은 정치를, 어떤 사진은 철학이나 과학을 담고, 어떤 사진은 거짓말도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저자는 그렇게 포착한 사물, 인물, 사건을 감방이라는 암실에서 종이와 펜으로 인화한다. 교도소 운동장의 맨드라미, 창살 바깥 산과 구름들, 동료 재소자들의 얼굴, 죄수들끼리 몰래 만든 요리의 메뉴들, 사동 안에서 소문으로 떠도는 사건들까지. 특히 저자가 즐겨 다루는 방식은 시(poem)다. 마치 오브제를 놓고 장면을 구성하듯, 때로는 연작사진을 이어 사건을 구성하듯 기억을 사로잡는다.

저자에 따르면 출소 후, 교도소의 노트에 등장하는 테마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책은 사진이 출품되는 전시회에 맞추어 출간된 것인데, 해당 작품들은 책에도 대부분 수록되었다. 동일한 모티브가 글과 사진으로 어떻게 텍스트화되고 이미지화되는지를 비교하는 것도 독자의 흥미 요소 중 하나다. 하지만 저자가 교도소에서 기억을 글로 남기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삶’이다. 자신이 끌어안아야 할 삶이며 타인의 삶이기도 하다.

 


 

책에 따르면 너무 익숙하고 당당하게 수감생활을 시작하는 살인범, 억울하다고 푸념만 늘어놓고 ‘고문관’ 노릇만 하는 목사님, 은박지와 건전지로 불을 붙이고, 수건과 옷에서 실을 뽑아서 십자가 기념품을 만드는 예술가들, 누가 벌금의 대납 대신 초코파이 15박스를 넣어준 노역수, 아무도 보지 않는 TV 화면 옆에서 각자의 일거리에 몰두하는 재소자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 바로 삶이다. 진부함과 반전이 늘 공존하는,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삶. 그곳에는 당연히 온갖 비열함과 야비함 곁의 명예로움과 인간다움이 존재한다. 재소자들은 미국의 주가 몇 개인가 하는 따위의, 언뜻 사소한 사실을 놓고 수십만 원 내기를 건다. 심판은 교도관들이다. 미국 유학파인 저자는 내기에 자주 이겨 (교도소 기준으로) 엄청난 돈을 딴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누구도 돈을 건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의 시간이 다 허비는 아닙니다. 여기에도 분명 유익함이 머무는 곳이라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을 얘기한다면 저는 생각하는 시간이 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거창하게 철학이 아니어도 부디 사고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밥 먹고 잠자며 달력에는 엑스표 해가며 자신을 죽여 가는 시간이 아니라 꿈을 꾸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 꿈은 곧 여러분의 미래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p.71) - 「세상에서 가장 큰 죄」 중에서

 

저자 : 이용순

 

경기 광주 출생. 콜롬비아 칼리지 시카고,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2023년 5월 개인전 〈비 오는 날〉을 포함해 서울과 미국에서 9번의 개인전을 가졌고 1995년 사진예술사가 주최한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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