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라이트 연가
백리향 지음 / 하움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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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블루 라이트 연가』의 표제어로 사용된 '블루 라이트'란 단어는 '우울'과 '슬픔'의 뜻이 내포돼 있다. 예술 작품에서는 특히 '블루'는 문학이든 미술이든 은유적 표현 방식으로 사용된다. 얼마 전 코로나 팬데믹 때도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로, '코로나 블루'가 널리 사용되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코로나 블루’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코로나 우울’을 선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일본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한 노래로, 1968년 가수 이시다 아유미(いしだ あゆみ)가 불러 큰 인기를 모았다. 요코하마는 일본의 개항도시 중 하나이자 수도권의 대도시로서 요코하마의 문화와 관광 인프라는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이다. 요코하마는 19세기 중반부터 개항장이었던 칸나이(??)와 그 남쪽에 위치한 야마테(山手) 지역에 외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면서 다양한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는 창구로 기능했다. 일본인이 아이스크림을 최초로 판매한 것은 1869년 요코하마 칸나이에서였고, 일본 최초의 맥주 양조장은 1870년 야마테에 만들어졌다. 빵, 식빵, 빙수, 토마토케첩, 경양식 스파게티가 일본에서 처음 판매된 곳도 요코하마였다. 심지어는 신문, 소방차, 구급차, 경마, 호텔, 바, 은행, 세탁소, 레코드회사, 사진관, 테니스코트, 재즈음악이 일본에 처음 도입된 곳도 요코하마로 알려지고 있다. 20세기 들어서도 요코하마는 미국을 포함한 서구 문화가 유입되는 거점으로 기능하였고, 1960년대부터는 이것이 도시 이미지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요코하마의 서구적이고 도시적인 이미지를 가사로 활용하여 매우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어쩌면 자신들이 전쟁에서 진 미국의 문화가 유입되면서 그 슬픔이나 우울함을 그대로 반영한 노래가 아니었을까도 생각해본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는 당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시점이라 이런 류의 노래는 정부가 '금지곡'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지금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이 노래를 아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독자도 일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노래 가사까지 찾아가며 익힌 바가 아니지만 일본어로 부르던 가사가 일부 생각난다. 무슨 뜻인지 모르고 불렀던 터라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마찌노아 까리카 도테모 기레이네 요코하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로 시작된 것으로 어렴풋이 떠오른다. 가사는 잘 모르지만 흥얼흥얼 따라부르던 그 노래는 짙은 애수가 흐르듯 곡조가 매우 애잔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쩌면 실연한 한 여인이 요코하마 항구의 밤에 부르는 듯한 곡조라면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이 소설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서울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고 공장 등 대부분의 산업시설도 서울 외곽이나 경기도 일원인 경우가 많았다. 아마 물류 비용을 줄여 더 높은 이윤을 창출하려는 기업들이 정부가 마련해준 공업단지 내에 입주해 생산활동을 하던 때이다. 서울 구로동 일대의 '구로공단'도 마찬가지다.

이때 모자라는 노동력은 지방에서 일거리가 없어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이 메웠다. 일부는 서울로 아주 이주를 했고, 또 일부는 집은 지방에 그대로 둔 채 서울로 올라와 공장이나 산업활동에 필요한 노동 인력을 채웠다. 당시 지방에서는 전후 복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무수한 젊은 인력이 지방에서 밥 굶어 가며 농사를 짓던 때다. 이들에게 공단의 단순 노동직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사람들에겐 달콤한 유혹이자 매력 있는 일이었다. 독자가 여기서 고임금이란 표현을 쓴 것은 농사 짓는 것보다는 훨씬 수입이 좋다는 것이다. 너도나도 서울로, 서울로가 유행이었던 시절이다. 이 소설은 그때 산업노동자인 세 명의 여인들의 사랑과 또 당시의 삶의 고단함 등을 그리고 있다. 이들은 돈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모든 기업들이 기숙사를 갖고 있을 수는 없는 일. 공단 근처에는 공단 노동자들의 숙소이자 삶의 터전인 셋방이 우후죽순 들어서기 시작해 거대한 공단의 배후 도시화되었다.

 

 

휴일이나 휴식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열악한 노동 조건 하에서도 공단 노동자 특히 여성들은 지방 부모의 힘을 덜어주는 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월급 노동자의 일자리는 한 집안 아들의 공부를 위해 투자되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남동생을 대학 공부시키기 위해 고단한 노동의 시간을 감내하고, 자신의 노동으로 부모 봉양은 물론 국가 산업 발전에도 이바지한다는 의식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여성들이 주로 일하던 곳은 당연히 공단의 노동자(이때 공돌이, 공순이라는 비어도 나왔다)이고, 버스를 타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나 학생의 발이 되는 버스의 차장 등이 많았다. 일부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다 술집 호스티스로, 일본인 현지처로도 신분을 숨기는 일로 빠져들어가기도 했다. 이들 여성들도 노동자로 일하는 한 삶을 이어가기 때문에 그들끼리, 혹은 다른 직종의 사람들과도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혼한 여자는 공장에서 선호하지 않아(아마 출산이나 기타 개인적인 일로 회사를 빠지는 인력을 대체하는 인력이 쉽지 않은 터라) 중도 하차하는 경우도 많았으리라.

이 책은 당시 3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삶과 사랑에 얽힌 일들을 글로 쓴 것이다. 이 과정에서 특히 연애와 사랑 등은 대부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비련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을 터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이 소설 『블루 라이트 연가』는 실제 세 여자가 청춘 시절에 겪었던 사랑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태로 구성한 소설이다. 우리나라 산업화 절정의 시기였던 1975~1980년 사이가 배경이다. 등장인물 백영주, 김명자 그리고 이선희 세 청춘은 그 시절 영등포에서 각자 서로 잘 모르는 사랑을 숨기고 같이 생활했다. 모든 사랑의 패턴이 그렇듯이 세 여자의 사랑은 처음에는 우연히 또는 가볍게 시작해 불같이 타오르는 과정을 거치며 세상 모두를 얻은 희열을 맛보다 추락할 때는 어떤 고통보다도 힘든 고통을 겪는다.

 


 

『블루 라이트 연가』는 죽는 것이 편하겠다고 느낄 정도로 혹독한 아픔의 시기를 보낸 세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담하게, 하지만 정열적으로 그려 내고 있는 작품이다. 당시의 세 여자는 죽음을 옆에 두고 살 정도로 극심한 고통의 시절이었다고 한다. 세 여자의 사랑은 아프고 시린 사랑이고, 그 사랑의 내면은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표현보다는 열정적인 사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 같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의 절정인 70년대 중반 영등포 공장 지대에서 세 명의 청춘이 같이 한 방에서 보냈던 그 시절의 얘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영주의 이야기는 현실은 슬프지만 하지 말아야 할 금지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70년대의 삶에 대해 대부분의 독자들은 쉽게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당시 생산 노동자들의 생활은 성공적 경제 발전을 결과적으로 이뤄냈지만 당사자들은 비참한 생활과 작업 환경, 그리고 낯선 '서울 문화'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 등 한두 가지의 역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나때는'이란 단어가 '꼰대'들의 전형적인 말투라고 해서 쏘옥 들어가버린 이제 생각한다면 어떻게 견뎌왔을까 하는 생각이 공통적으로 들 것 같다. 돈 벌러 온 서울 생활에서 무슨 연애고 사랑이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 청춘들은 그런 것마저 없었다면 아마 버텨내기 힘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회적으로 판단해도 지금의 젊은 층과는 완전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을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또 순수하고 열정적일 나이, 청춘이 아니던가. 결국 이별로 끝나리란 것을 알기에 더 슬픈 사랑이고, 더 슬프기에 더 아름다울 수 있다. 그때의 '사랑법'이랄까. 당시 유행가에도 이 같은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크게 히트칠 수 있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영주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두 번째, 명자의 이야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셋이 함께 살 만큼 서로는 마음이 그런 대로 맞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휴대폰은커녕 집 전화마저 놓지 못하는 그들의 서울 생활은 연애하기에는 매우 부적절했을 것이다. 소설 속 명자는 조선시대처럼 '편지'가 통신 수단이다. 군인과의 연애담(?)이다. 영주와 조금 다르게 명자는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있는 여성이다. 씩씩하고 당당한 성격의 여인이지만 결말은 예견되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도 든다. 아니면 명자의 성격이 보기와는 다르게 내성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자신의 삶을 씩씩하게 일궈나가는 여인에게도 연애는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를 보러 간 것도 아니고 그가 나를 찾아온 것도 아닌 그저 일 때문에 우연히 찾아온 그를 오늘 보았다. 내 엄마와 아버지에게 그리고 내 형제들에게 큰 상실의 시간을 안겨 준 그다. '지금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잘 살겠지.' 하는 분노, 그리고 잊고 있었던 좌절감을 다시 새겨 주고 있다."(p.177)

여기서 문득 든 의문점 하나. 당시에는 연인에게 '오빠'란 호칭을 안 썼을 텐데... 하는 점이다. 오빠란 명칭은 90년대 이후에 새로 생긴 것 아닌가? 결혼한 부인이 남편을 아빠라고 부르는 데 대해 결혼하기 전 남자를 '오빠'라고 불렀다는 게 "정말 그랬을까?" 하는 생각은 든다. 군인 남자가 야학을 운영하며 노동자를 위한 모임에 참여하다 감옥에도 갔던 경력 때문에 아이들을 교육하는 학교 선생님으로는 취업이 불가능한 대목도 나온다. 맞다. 당시 대학생들이 학생 운동의 일환으로, 또는 확대로 노동운동을 위해 현장으로 뛰어들어간 시기임에는 틀림없다. 이후 그들은 노동운동의 투사가 되기도 하고, 재야의 인사가 되기도 한다. 암울한 상황 속에 명자의 선택 부분이 나온다. 바로 임신 중절의 문제다. "자유 수출 공단 인원의 대다수가 여공이어서 공단 근처에는 산부인과 병원 및 내과 병원이 꽤 있다."(p.254) 자신을 버리고 떠난 남자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명자의 태도도 그 시대 우리 사회의 한 축이었으리라.

 


 

마지막 이야기는 짠한 슬픔과 분노마저 감도는 '현지처' 이야기가 있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패배 후 폐허에서 한국전쟁의 군수품 보급 기지가 된다. 일본이 전후 급속하게 발전이 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한국전쟁이 꼽힌다. 돈이 되는 일이라 일본은 그들 특유의 단결심으로 한마음으로 산업 부활을 꿈꾼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진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결국 그들은 기존 기술이나 기술인력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쉽게 경제 부흥에 성공한다. 그리고 기업들도 속속 들어선다. 한국은 한국전쟁 후에도 일본의 기업들 때문에 먹고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의 물건들을 수입해 쓴다. 산업화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그들 중 일부는 한국에 지사를 세우거나, 혹은 관광차 한국을 들를 때마다 필요한 여자를 한 명 이상씩 살 집을 마련해주고 여성들을 농락한다. 이때 '현지처'란 듣도보도 못한 이름의 직업이 등장하게 된다.

호스티스 문화도 이때 등장하는데 이를 테면 일본인 재력가의 일인 호스티스인 셈이다. 호스티스는 무작정 상경한 어린 여성이 꾐에 빠지거나 이곳저곳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다 우여곡절 끝에 벌이가 괜찮은 호스티스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호스티스 문화는 수많은 영화를 낳았다. 호스티스의 생활을 한 여성의 대부분이 슬픈 사랑의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는 검사가 된 사람의 뒷바라지를 해주다 결국은 검사의 버림을 받는 슬픈 사랑의 주인공도 있었다. 이 책은 모두 슬픈 사랑의 세 주인공이 등장해 산업화 시대의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했을지 가늠하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저자 : 백리향

 

기성 작가도 아니고 한번도 작품을 출간 해 본 경험이 없는 그저 평범한 일반인이다. 고등학교 대학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창작이었지만 현실 생활을 쫓아 취업을 하고 주변의 다른 분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생업에만 종사해 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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