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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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뜻밖의 미술관』은 표제어부터 독특하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등 묘한 제목이 달린 책의 영향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은유적 뜻을 해석하는 재미도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림의 내용에 대해 다른 시선으로 감상하는 방법이란 것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세상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그림 이야기」라는 깔끔한 설명이 들어 있는 '프롤로그'의 제목이 책의 성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김선지는 미술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들여다보는, 자신만의 그림 감상법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라는 저자만의 질문을 자신에게 한 후 해답을 찾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림 감상도, 글 쓰는 일도 모두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거장들과, 명화로 추앙받는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도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저자의 시선이 꽂힌다.

저자는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에 또 하나의 시선을 보태는, 멋진 일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을 넓고 깊게 통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오래되고 익숙한 시선이 아니라 자유롭고 개방적인 눈을 통해 내 생각과 나의 앎의 범위를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 '알아 낸' 것들을 제시하고 독자와 교감하고 싶어 이 책을 발간키로 했다고 취지를 대신한다. 이 책은 저자가 미술 칼럼니스트로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를 엮어 펴냈다. 저자는 "미술은 우리에게 감각적이고 미적인 쾌감을 준다. 사람들은 예술적인 명화나 건축물, 조각품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을 받는다. 이러한 순수한 미적 만족과는 별개로, 미술 작품은 한 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기록물이기도 하다. 예술가들도 그 시대의 사회 체제와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다." 저자는 미술 작품들을 살펴보는 동시에, 그 안에 내재된 역사와 사회, 문화의 흔적을 종합적으로 풀어내려고 하는 데서 이 책의 이야기가 출발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술이 대중에게 훌쩍 다가선 시대다. 그동안 책이나 TV를 통해 명화를 접했다면 이제는 사람들이 직접 전시회나 미술관을 찾아가 그림을 감상한다. 인기 있는 작품이 걸린 전시회장이나 미술관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전시회장이나 미술관에 가면 어떻게 그림을 감상할지 방법을 잘 모른다. 도록을 사들고 그림을 감상하거나, 끌리는 작품 앞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인증샷을 남긴다. 물론 작품 앞, 그 순간 강렬하게 받는 미적 자극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하지만 미술이 교양이 된 시대에 우리는 한 층 더 깊이 그림을 이해하고 또 나름의 관점으로 사유할 힘을 길러야 한다. 이에 따라 저자는 독자들에게 명화라 칭송받는 작품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그 작품의 숨겨진 뒷이야기를 들려주고 질문을 던진다. ‘명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때는 명화였던 그림이 지금도 명화인가?’ ‘예술성은 화가의 면책 특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그림 속 고다이바 부인이 정말로 벌거벗고 마을을 돌았을까?’ ‘〈우르비노의 비너스〉 속 비너스는 정말 비너스의 현신이 맞을까?’ 하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명화 상식을 뒤집는 질문까지 다양하다.

존 콜리어의 〈고다이바 부인〉은 중세 시대, 고다이바라는 귀족 부인이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주기 위해 벌거벗은 채로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는 설화를 기반으로 그려졌다. 사실 존 콜리어뿐만이 아니라 많은 화가들이 고다이바 부인을 그렸다. 그림들은 한결같이 고다이바 부인을 관능적이며 선정적으로 묘사했다. 고다이바 부인의 숭고한 희생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그렸다기엔 지나치게 에로틱한 누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관람자들의 관음증을 유도한다. 고다이바 부인을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아름답긴 하지만, 우리는 이 그림을 볼 때 그녀의 벗은 몸보다 미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까?

 


 

또 우피치 미술관의 인기 작품,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르네상스 시대에 귀족 사회에서 결혼과 사랑의 의미를 환기시키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비너스의 모델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가 아닌 매춘부로 추정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는 자신에게 작품을 의뢰한 상류층 고객을 위해 밀실 감상용으로 이 작품을 그렸고 당시 유명세를 떨쳤던 고급 매춘부 안젤라 델 모로를 모델로 했다. 그래서 원래 제목도 ‘나체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기존 소유주가 사망하고 그림 소유권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16세기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가 여인의 정체성을 비너스로 규정함으로써 〈우르비노의 비너스〉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고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몰랐던 그림 속 여인의 실체였다고 밝혀낸다. 그러니 〈우르비노의 비너스〉는 비너스의 몸을 빌려 신화로 포장한 음란한 포르노그래피이며 그림 속 여인은 당시 상류층 남성의 눈요기를 위한 일종의 핀업걸이었던 것이다. 하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와 함께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화가를 소개한다. 1970년대 여성 예술가였던 메리 베스 에델슨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속 예수와 12사도 자리에 여성 예술가들의 사진을 콜라주한 작품 〈현존하는 미국 여성 예술가들〉로 유명하다고 알려준다. 기독교는 물론이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남성 중심적인 것을 비판한 에델슨은 ‘왜 예수의 12사도가 모두 남자였을까?’ ‘최후의 만찬이 여자들의 최후의 만찬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그림을 통해 제기한다. 그는 예술가이기도 했지만 사회운동가로서 주요 미술관에서 여성 미술가들이 배제되는 현실에 맞서 싸운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평생 페미니즘 사상과 휴머니즘을 담은 작품을 그려낸 메리 베스 에델슨은 우리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거장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닐까? 라는 은근한 질문으로 예술가로서의 에델슨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작품을 소개한다.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성 거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나 18세기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담 르 브룅은 미술사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재조명되는 화가들이다. 요즘 각종 미술사 서적에서도 자주 다루는 것을 독자도 여러 번 접했다. 이 화가와 작품들은 저자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젠틸레스키의 경우 17세기 이탈리아의 여성 거장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나 18세기 프랑스의 여성 화가 마담 르 브룅은 미술사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재조명되는 화가들이다. 젠틸레스키의 경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라는 잔인하고 폭력적인 작품은 물론이고 〈다나에〉, 〈비너스와 큐피드〉 같은 요염하고 관능적인 그림으로 당대 이름을 날렸지만 사후 아버지의 이름 아래 미술사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마담 르 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전담한 궁정화가로서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지만 그 또한 역사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재능 있는 여성 화가들이 오랜 성차별의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여전히 미술 시장에서 성차별은 존재하지만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지금, 우리는 다시금 이들을 소환하고 재조명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거장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화가도 있다는 도발적인 발언도 이어진다. 프랑스 후기인상파의 화가로 잘 알려진 폴 고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것. 19세기 화가인 그는 여전히 미술계에서 흥행보증 수표다. 화려한 색채로 이국적인 정취를 생생히 그린 그의 그림들은 시대를 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러나 사실 고갱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타히티섬에서 10대 아동 청소년들을 성적으로 착취한 범죄자에 가깝다. 그는 식민주의와 인종우월주의로 가득찬 인물이었고, 자신의 그림 속 인물들을 ‘야만인’으로 부르며 멸시하고 혐오했다. 말년에는 자신이 심각한 매독에 걸린 것을 알고서도 13~14세의 소녀들과 성관계를 맺어 병을 옮겼다. 과연 고갱의 예술적 성취가 그의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을까? 미성년 여성을 성 착취한 개인으로서의 고갱과 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예술가 사이에서 우리는 그의 자리와 작품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우리나라의 예술인들 중에도 이런 미묘한 상황에 있는 사람도 많다. 일제 강점기의 문인들 중 작품은 한국문단사에 길이 기록될 정도로 훌륭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으로 큰 오점을 남긴 예술가들도 꽤 많기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는 물론이고 캉탱 마시와 같은 르네상스 의 거장들은 〈최후의 만찬〉이나 〈천지창조〉 와 같은 걸작 외에도 못생기거나 기괴한 형상을 한 사람들을 그린 작품을 남겼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 ‘못생김’은 하늘이 내린 벌이나 악의 표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을 혐오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캉탱 마시의 〈추한 공작부인〉은 늙고 못생긴 여자의 허영심을 풍자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신 연구에 따르면 그림 속 기괴한 여성의 모습은 질환으로 인한 얼굴의 변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추한 공작부인〉은 여전히 ‘추한’ 공작부인을 담은 그림인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또한 못생긴 사람들을 하루종일 쫓아다니며 그들의 얼굴을 화폭에 담았다고 한다. 그리고 붙인 그림의 이름은 〈그로테스크한 머리〉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봤을 때 레오나르도가 그린 〈그로테스크한 머리〉는 명화가 될 수 있을까?

사실 미술 작품은 예술가의 개성과 미학의 산출물이지만 화가가 살았던 시대의 투영이기도 하다. 그림 역시 사회의 프레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었는데 그림을 보는 관점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에서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때는 칭송받았지만 지금은 비판받아 마땅한 그림들, 한때는 추앙되었으나 지금은 비난받아 마땅한 화가들. 물론 현재 시점에서 몇천 년 혹은 몇백 년 전 의 작품이나 화가를 판단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나 삶의 본질,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 같은 것들. ‘인간의 욕망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 ‘불평등은 정당한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렇듯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미술 작품은 결국 우리가 세상을 더 넓게, 다르게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존재 이유이며 미술의 쓸모일 것이다. 그림을 발견하고 생각을 확장하고 궁극적으로 삶까지 변화시킬 수 있는 이 일련의 과정이 바로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이 책은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 〈명화 거꾸로 보기〉와 2부 〈화가 다시 보기〉다. 우리가 예술에서 흔히 보듯 '작품론'과 '작가론'의 구분이다. 저자는 작품과 작가에 대한 기존과는 다른 시선으로 봐야 그림과 화가들에 대한 정확한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는 신념에서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와 명화 등을 중심으로 이 책을 쓴 것이다. 이 책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필요하다면 중세, 그 이전까지도 넘나드는 서양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보다 진보된 시선으로 작품과 화가를 분석한 새로운 감상문이라고 하면 될 것으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저자의 설명으로 우리는 그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새로운 감상법을 하나 더 배운다는 기쁨으로 쉽게 이해하고 읽을 수 있다. 저자의 글쓰기나 작품 해설의 솜씨야 우리가 감히 지적할 지식도, 여유도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더하거나 덜 필요도 없는 독창적 감상법이고 탁월한 감상평이다. 저자가 건네는 질문들을 따라 그림을 뒤집어 보고 비틀어 보고 깨뜨려 보면 뜻밖의 관점으로 그림을 다시 보게 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발견이다.

이 책은 거의 모든 서양미술 화가와 작품들이 망라돼 있어 일일이 그 목록을 평가할 수 없지만, 쉽게 읽히는 만큼 단숨에 읽어내려 가다가 얼핏 스치는 느낌은 독자에게 남는다. 많은 작품 가운데 상당수가 성이나 폭력 등에 관련된 것들이고, 페미니즘적 시선이 가미된 것 아닌가 하는 독자로서의 느낌이다.

 

그렇다면 리얼돌은 현대 남녀 피그말리온들의 꿈을 실현해준 것일까? 그리스 신화의 피그말리온은 일단 환상적인 아내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의 결말이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Happily Ever After’)였을까? 아니다. 갈라테이아는 고대 그리스의 가부장제 사회 가치를 투영한 창조물일 뿐이다.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아름답지만 자아가 없다. 주인을 만족시키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갈라테이아가 진짜로 인간이 되었다면, 피그말리온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번존스 그림 속 갈라테이아의 공허한 눈빛이 말해주듯이.(p.49) - 「피그말리온은 오래오래 행복했을까?」 중에서

 


 

미술 작품 속에는 역사가 들어 있다. 중세 유럽 예술가들은 종교적 사고의 틀에서 전염병을 이해하려고 했다. 흑사병이 신의 징벌이라고 여겼던 그들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깨지기 쉽고 일시적이며 덧없는가를 상기시키려고 했다. 삶의 취약성에 대해 말하는 이러한 그림들은 코로나19의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도 삶의 본질과 의미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와 가장 가까운 시간에, 가장 비슷했던 팬데믹을 겪은 뭉크가 남긴 그림은 코로나19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떤 느낌과 공감으로 다가올까?(p.329) - 「뭉크가 남긴 100년 전 팬데믹의 기록」 중에서

 

저자 : 김선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역사를, 동대학원에서 미술사와 현대미술을 공부했다. 미술사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모으며 글을 써오던 중 한국천문연구원 웹진에 게재한 짧은 글 「명화 속 별자리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천문학자 남편 김현구 박사와 함께 『그림 속 천문학』을 출간했다. 별과 우주를 사랑한 화가들의 삶과 그림을 살펴보고 그 속에 담긴 천문학적 요소를 찾아 흥미롭게 엮어낸 책이다. ‘미술사에서 사라진 여성 미술가들’로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이 연재를 묶고 보완해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를 출간했다. 2020년부터 《한국일보》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예술가들의 숨은 이야기를 소개하는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사’를 연재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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