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 -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
성파.김한수 지음 / 샘터사 / 2023년 5월
평점 :
“일이 공부고 공부가 일입니다. 그리 살아야 행복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불교 조계종 제15대 종정 성파 스님은 다른 스님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다. 그의 말처럼 일과 공부는 같은 것이며, 모두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스스로를 닦아온 것이다. 그는 일반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방대한 일을 지난 40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남다른 '욕심'으로 해왔다. 종단에선 그를 '일꾼'(?)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수행 역시 게을리하지 않은 수도승으로도 살아왔다. 특히 도자기, 천연 염색, 야생화, 된장, 옻칠 민화에서 도서 무한대 모으기 등 엄청난 일을 해왔다고 한다. 이 책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의 표제어도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으로서 후배 수행자들에게 강조해온 그대로 정했다. 성파 스님과의 인터뷰를 계기로 그의 수행 과정과 해온 일 등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김한수 종교 전문 기자(샘터출판사 대표, 공동 저자)가 성파 스님과의 대담을 글로 정리 작성했다.
종정(宗正)은 종단의 제일 높은 어른을 일컫는다. 종단의 신성을 상징하며 종통을 승계하는 최고의 권위와 지위를 갖는다. 불·법·승의 세 가지 보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라는 삼보사찰, 이른바 한국의 3대 사찰 중 하나인 통도사에서 방장(사찰의 제일 큰 어른)으로 있던 성파 스님은 2021년 12월 종정추대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제15대 종정에 추대되어 2022년 3월부터 종정으로서 조계종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그는 만장일치 종정으로 추대됐지만 종정이 된 이후에도 자신이 해온 일을 한시도 놓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오히려 일을 더 키우고 새로운 일을 계속 찾아 확대하고 있다. 일이 공부고 공부가 일이다라는 것을 직접 행하고 있는 것이다.
공동 저자 김한수는 "어찌 보면 기인처럼 느껴지는 스님에 대해 궁금함이 컸지만, 스님은 자신의 일과 수행에 관해서는 말씀을 아끼셨다. '나는 남에게 해줄 말이 없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겠나. 내 할 일이나 잘하겠다. 나부터 잘하겠다'는 말씀만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이 아니라 스님이 지난 40년 동안 해온 일 이야기를 물었다. 이 책은 2022년 1월부터 2023년 3월까지 김한수 종교 전문 기자가 성파 스님을 만나 대담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스님은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스님이 들려준 일 이야기 속에는 왜 공부하고 일해야 하는지, 왜 일이 곧 공부이고 공부가 곧 일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의 지혜가 담겨 있다고 강조한다.
일반 대중들 중에는 공부하는 것도, 일하는 것도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런데 제목에는 일과 공부가 함께, 그것도 반복하여 제시된다. 숨이 헉하고 막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파 스님은 “나는 출가 이후로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다.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 늘 행복하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일이 곧 공부이고 공부가 곧 일인 삶을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된다. 스스로 ‘평생 학인, 평생 일꾼’이라 일컫는 성파 스님이 지금껏 걸어온 길을 살펴보면 우리도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난 성파 스님은 집안 사정으로 중학교에 가지 못하고 서당에서 배움을 이어갔다. 보통 10년은 걸린다는 사서삼경을 3년도 안 되는 동안에 다 배우고 한시도 190여 수나 지었다. 그렇게 한학을 익히고 출가한 스님은 경전 공부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탄허 스님이 화엄경을 번역할 때 교정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을 모시고 안거를 난 것을 비롯해 범어사, 봉암사 선원 등에서 27안거를 했다.
옻칠 민화, 천연 염색, 한지 공예 등 전통 미술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최고의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스님은 본분인 경전 공부와 참선 수행도 게을리하지 않은 것이다. 책에 따르면 성파 스님은 22살에 통도사에 들어가 종손 의식, 즉 주인 의식을 갖고 통도사에만 머물렀다. 1980년대에 통도사 일대를 도립공원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자 스님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통도사 주지를 맡았다. “사찰은 우리 민족 정신문화의 구심점이 돼야 하고, 전통문화를 지키고 보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통도사를 지키려 한 것이다. 스님의 이러한 생각은 도자기, 천연 염색, 한지, 옻칠 민화 등 한국의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보존하는 일을 하는 데에도 원동력이 되었다. 성파 스님은 통도사 주지를 마치고 ‘출출가’했다고 말한다. 성파 스님에게 출출가는 백지화를 의미한다. 속세 20년, 출가 20년을 지낸 스님은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맨바닥에서 재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새로운 출가는 전통문화의 보고 서운암을 만드는 출발점이었다. 독자도 '출출가'란 말은 처음 듣지만 설명을 듣고보니 꼭 알아두어야 할 말인 것 같다.
통도사 주지를 마치고 서운암으로 온 성파 스님은 주지 시절 익힌 도자기 기술을 활용해 3,000점의 불상인 ‘도자 삼천불’과 팔만대장경을 도자기로 구운 ‘16만 도자대장경’을 조성했다. 16만 도자대장경을 굽고 장경각을 지어 이를 봉안하는 데 20년이 걸렸다. 이것만으로도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업적이지만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감지금니 사경을 하는 데 필요한 감지를 직접 만들려고 쪽 염색과 전통 한지를 되살렸으며, 버려지는 항아리가 안타까워 50년 이상 된 큰 항아리 5,000개를 수집하고 그 항아리를 이용해 전통 된장과 간장을 만들었다. 중국에 건너가 산수화를 배우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베이징에 있는 중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귀국 후에는 옻칠로 전통 민화를 재현하며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현하고 있다.
또한 통도사에 차밭을 재건하고 선농일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감나무밭을 일궜으며, 종교에 관계없이 국민들 누구나 들러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서운암 4만 평에 야생화를 심고 축제를 벌였다. 순수 한국문학인 시조를 지원하기 위해 40년 가까이 성파시조문학상을 시상하고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으며, 버려지는 종이책을 정해진 목표 없이 모으는 ‘종이책 무한대 모으기’를 진행 중이다. 그런가 하면 전통문화가 아닌 신기술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적극 받아들인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을 찍기 위해 드론 자격증을, 세계 3대 미항보다 아름다운 남해안을 다니기 위해 요트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포클레인을 직접 운전하며 일하기도 한다.
성파 스님은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에 걸쳐 한 가지 이루기도 어려운 일들을 연달아 개척해 왔다. 스님은 스스로 “나는 500살 인생을 산다”라고 말한다. 수행에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즉 단번에 경지로 뛰어넘는 것처럼 다른 일도 그렇게 하기 때문에 시간을 줄여서 해낼 수 있다고 웃음짓는다. 다양한 장르에 무모하리만치 용감하게 뛰어들 수 있었던 비결로는 ‘콩깍지론’을 이야기한다. 꽃이 떨어지면 바로 작은 열매가 달리는 다른 과일과 달리, 콩은 꽃이 떨어지고 달리는 콩깍지 속에 콩알이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콩알이 생기고 커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할 때 주춤하거나 겁을 먹지 말고 우선 계획을 짜놓고 안을 채우라는 말이다.
“무소유를 해야 훌륭한 스님이 된다, 그런 말은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정반대라. 나는 욕심이 대적이다. 무소유와는 정반대라, 욕심이 대적이라. 큰 대(大) 자, 도적 적(賊) 자. 큰 도둑놈이라. (…) 나는 이루고자 하는 거라. 소유하고자 하는 거라. 무소유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소유하고자 하는 거라. 내 이 생이 있는 한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가 소유라. 안 그러면 눈 감아버리지, 왜 밥을 먹고 약을 먹나. 그래서 나는 소유가 엄청 나. 남의 것도 내 거라.”(p.315) - 〈무소유? 나는 욕심이 천하의 대적〉 중에서
스님은 ‘욕심이 대적’, ‘무소유가 아니라 삼라만상이 내 소유’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스님의 욕심은 정신적인 것이다. 전통문화를 되살리려는 욕심, 국민들이 사찰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마음껏 즐기며 안식을 얻기 바라는 욕심이다. 스님이 해온 일은 과거 전통 시대에는 사찰을 중심으로 이어져 왔으나 근대화 이후로는 사찰에서도, 민간에서도 사라진 전통을 되살리는 것이었다. 출가자로서 도자기, 천연 염색, 옻칠 민화, 된장 등을 하는 것에 대해 외도한다는 수군거림이 있었지만 스님은 그 일들을 행복하게 수행해 왔다. 후대를 위해 지금까지 해온 작업을 사진과 도표로 정리하면서 말이다.
성파 스님은 지금껏 해오신 일 이야기를 들려주며 당부의 말도 했다. “종교인들이 보면, 내려다보면서 가르치듯이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나는 그런 거 없어요.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따라오라는 것도 아니라. ‘나는 이렇게 일한다’, 그뿐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스님의 말씀은 ‘내가 이렇게 해봤으니 누구나 할 수 있다’라는 권유로 들린다. 모두가 스님처럼 살 수는 없겠지만, 일과 공부를 하나로 여기는 자세로 산다면 행복이 바로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는 스님이 이 시대에 건네는 화두이자 권유이며 응원이고 격려다.
우리는 부처님을 만나지 않고도 가르침을 배울 수 있어요. 서산대사, 사명대사 직접 안 만나도 배울 수 있지요. 공자, 맹자, 노자 같은 선인(先人)들도 만날 수 있어요. 무엇으로?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습니다. ‘나옹(懶翁, 1320~1376) 선사 만나러 가자’ 하면 그냥 《나옹집》을 보면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누구 만나고 싶으면 그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됩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읽으며 지금 여기에 없는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있는 거라.(p.297)
이제 우리 사회가 전문성이 많잖아요. 전문 분야가 많고 그 분야마다 전문가들이 많아. 그런데도 혼란스러움이 더 많아. 그건 관찰력은 있는데 통찰력이 없기 때문인 거라. 관찰력에는 능하고 자신의 전문 분야만 자꾸 파고들어 가잖아요. 그런데 통찰력은 좀 부족한 거라. 이걸 위입서궁(蝟入鼠宮)이라 해요. 고슴도치가 쥐구멍으로 들어간다 하지요. 고슴도치가 작은 구멍으로 깊이 들어는 가는데, 등의 가시 때문에 못 빠져나오거든.(pp.346~347)
저자 : 성파 스님
1939년 경남 합천 해인사 인근에서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조봉주(曺鳳周). 성파(性坡)는 법명이고, 법호는 중봉(中峰)이다. 통도사 월하 스님을 은사로 1960년 사미계를, 1970년 구족계를 받았다. 1980년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부장, 교무부장, 규정부장을 역임했고, 1981년 3월 통도사 제20대 주지로 취임해 교구본사 및 지역 불교 발전에 진력했다. 통도사 주지를 마친 후 통도사 서운암 감원으로 주석해 수행에 매진했다.
2000년 4월 통도사 서운암에 무위선원을 개원한 이후 선농일치 정신을 선양하고 통도사에 차밭을 재건했으며 감나무밭을 일구고 야생화를 심었다. 2002년 2월 노천당 월하 대종사로부터 중봉(中峰)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특히 28년간 도자기를 구워 도자 삼천불과 16만 도자대장경을 조성하고 이를 모시기 위해 장경각을 건립했다.
전통 불교문화 계승 차원에서 천연 염색 및 새로운 옻칠 기법을 개발해 단청과 건축, 발우, 탱화, 건칠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영역으로 확대시켰다. 2013년 4월 대한불교조계종 원로의원이 됐고, 2014년 1월 조계종 최고 품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다. 2018년 3월 산중총회에서 영축총림 제4대 방장에 추대됐고, 2021년 12월 종정추대위원회를 통해 15대 종정으로 만장일치 추대됐다. 2022년 3월 26일 종정 임기를 시작해 종단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저자 : 김한수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1991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93년부터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다. 2003년부터 종교를 담당했으며 2014년부터 종교 전문 기자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우리 곁의 성자들》, 《종교, 아 그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