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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 제19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문미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3년 5월
평점 :
품절
"벨이 울리고 있었다. 엄마가 또 머리맡의 벨을 누르는 모양이었다. 명주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모로 누워 귀를 틀어막았다. 그런데도 엄마가 계속 머리카락 몇 올을 틀어쥐고 잡아당기는 기분이 들었다."(p.8)
"준성은 햇볕이 잘 드는 공원 벤치에 아버지를 태운 휠체어를 세웠다. 햇볕이 있긴 해도 바람이 차가워져 산보객이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운동을 나오기 전 아버지는 온갖 구실을 대며 꾀를 부렸다."(p.19)
“연금 100만원에서 한 달 생활비를 제하면 28만원이 남았다. 명주는 몇 번이고 다시 계산한 뒤 28만원에 동그라미를 쳤다. 28만원은 엄마의 진료비를 내고, 병원 약, 기저귀와 패드, 영양 캔과 속옷 들을 사던 금액이었다. (중략)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명주는 엄마가 남겨준 풍요와 여유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p.52)
이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치매 어머니를 간병하는 50대 여성 명주와 뇌졸중 아버지를 돌보는 20대 청년 준성의 이야기다. 소설은 명주가 연금을 받기 위해 어머니 사망을 숨기면서 시작된다. 임대아파트 이웃인 명주와 준성은 빈곤 가정의 부양자이며 친족의 간병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이 소설로 “신선하면서도 노련하다는 점에서, 그 밖에 여러 면에서, 군계일학”이라는 심사평과 함께 제19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소설은 빈곤과 간병 문제를 다루는 사회 소설의 모습을 보이지만, 어둡지만은 않다. 정체불명의 남성이 명주에게 전화해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며 전화를 뚝 끊고, 준성의 부친에게 발생한 사고를 명주가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서사는 급물살을 타며 긴장감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주제에 걸맞게 가난과 도덕이라는 소재를 짓누를 정도로 묵직한 분위기지만, 무엇보다 뒷얘기가 궁금해지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 문미순은 소설, 그중에서도 장편소설은 재밌어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잊지 않았다. 그는 “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절박함과 긴박함이 스릴러 같은 분위기를 낸 것 같다”며 “의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장편은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47세이던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가 된 늦깎이다. 등단 이후에도 2021년 심훈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8년간 마트 아르바이트와 베이비시터 등 여러 파트타임과 풀타임 직업을 오갔다. 그는 “일과 습작을 병행하느라 첫 장편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회를 보는 눈을 키운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끓는 물에 장화가 녹아 발에 화상을 입는 급식 노동자 명주, 매달 착실히 납부한 보험료를 회사에 착복 당하는 대리운전 기사 준성 등 살아있는 캐릭터가 그 '소중한 시간'에서 나왔다는 말로 읽힌다.
저자는 “코로나19 시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간병하며 개인에게 맡겨진 돌봄의 무게를 소설로 다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가장 애착 가는 인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 준성”을 꼽았다. “술 취한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상으로 아버지를 때려죽이고, 그 죄책감에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장면을 쓸 때는 준성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상상임에도 마음이 아팠다”고 수상 인터뷰를 통해 말한 바 있다.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에서 얻은 문학적 상상력이 느껴지는 말이다.
엄마의 친구라는 할아버지, 이혼 후 떨어져 살던 딸 은진이 명주에게 접근해오자, 엄마의 매장이 시급해진다. 화상 후유증을 진통제로 달래면서 매장할 장소를 고민하던 명주는 피를 묻힌 채 복도로 뛰쳐나온 옆집 청년 준성과 마주친다. 명주의 옆집에 사는 준성은 고등학교 때부터 뇌졸중과 알코올성 치매가 있는 아버지를 돌보며 사는 스물여섯 살의 청년이다. 물리치료사가 되어 병원에 근무하는 것이 꿈이지만, 매일 아버지를 운동시키고 살림에 대리운전까지 하는 그의 나날은 녹록지 않다. 아버지를 회복시키려는 그의 노력에도 몰래 술을 사 마시는 아버지에게 절망하던 차, 집에 불이 나 아버지가 화상을 입게 되고, 준성마저 손님의 외제차에 손상을 입혀 거액의 수리비가 나온다. 준성은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오고 수리비를 재촉하는 차주의 압박전화에 시달리며 점점 피폐해져간다. 그러다 아버지를 목욕시키던 중, 실수로 아버지를 놓치고 마는데, 어찌 손 쓸 틈도 없이 아버지는 머리를 부딪치고 사망한다.
손에 피를 묻힌 채 뛰쳐나온 준성을 급히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명주. 욕실 바닥에 피를 쏟고 누워 있는 노인을 보고 119를 부르려는 순간, 난 이제 감옥에 가느냐며, 이제껏 내 인생은 뭐였는지 모르겠다고 울부짖는 준성을 본다. 평소 준성을 안쓰럽게 여기던 명주는 준성이 경찰 조사와 재판을 받고 죄책감에 폐인처럼 살아갈 모습을 떠올리며 그를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 고민한다. 긴 간병의 터널 끝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들의 결정에 돌을 던질 수 없으리라는 사실이다.
"품위 있는 삶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생존은 가능해야 하지 않겠어? 나라가 못 해주니 우리라도 하는 거지. 살아서, 끝까지 살아서,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하는지 보자고. 그때까진 법이고 나발이고 없는 거야.(p.218)
엄마의 부재에 대해 거짓에 거짓을 보태고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명주의 일상은 스릴러 소설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명주는 나무관에 누운 엄마의 상태를 매일 관리하며 주변의 시선을 예의 주시한다. 어머니 잘 계시냐는 이웃의 가벼운 인사에도 의심의 촉수를 세우고, 제각각의 이유로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철저히 경계한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엄마의 친구라며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오는 진천할아버지와 돈을 뜯어내기 위해 막무가내로 접근해오는 딸 은진의 존재다. 엄마와 제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는 진천할아버지는 엄마의 쾌유를 빌며 계속해서 문자와 선물을 보내고, 눈치 빠른 은진은 작은방의 나무관을 본 후 “저건 뭐야? 꼭 관처럼 생겼네? 그 안에 혹시 할머니 있는 거 아냐?”(p.193)라며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다. 생각지도 않은 복병들의 눈을 피하려면 하루속히 엄마를 흙으로 보내드려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명주는 골칫덩이 은진과 티격태격하다 그 방법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엄마가 사놓은 땅은 대지 80평에 건물이 17평 정도 되는 작은 시골집이었다. 엄마는 폐가로 나온 집을 늙어서 살 요량으로 사놓은 것 같았다. (…) 명주는 이제야말로 작은 동아줄이라도 잡은 기분이 들었다.(p.196)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은 가족을 간병하는 일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 어려움, 그로 인해 일상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묘사한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엄마의 치매에 명주는 처음엔 “밖에서 겪는 모멸감에 비하면 내 엄마를 간병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지만,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결국 하루하루는 지옥이 되고 인간의 존엄이란 바닥으로 떨어진다. 준성의 처지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벗어나려 할수록 발이 빠지는 진창이고, 미래는 꿈꿀 여지가 없다.
“개인의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불운과 절망”으로 시작된 소설은 두 주인공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잔혹한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인간적인 연대와 온기를 발견해가는 과정으로 전환된다.”(소설가 은희경) 임대아파트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인 명주와 준성은 서서히 서로의 처지에 공감하며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명주가 준성에게 연민을 느끼고, 준성이 명주에게 동조하면서 둘은 서로를 의지해 앞으로 나아간다. 공포와 죄책감을 떨쳐내고 큰일을 함께 치른 두 사람은 어느덧 새로 형성된 가족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두 사람을 태운 트럭이 두 구의 미라를 싣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고속도로를 헤쳐 나가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제 그들이 혹한의 겨울을 지나 온기 가득한 계절로 진입하고 있음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가슴속에서는 오라고, 어떤 운명도 상대해줄 테니 오라고 나지막이 속삭이고 있었다. 준성은 지금 바닥으로 떨어진 제 인생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인생을 아버지의 방식대로 살아냈듯이, 준성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가고 있다고.(p.243)
저자는 “다음번엔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상상력은 다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향할 것 같다. 세대 갈등, 지방 소멸, 디지털 약자 등이 그의 관심 주제다. “이 소설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 소설은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를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저자의 작품이 적어도 사회적 약자로 표현되는 빈곤층, AI 시대의 필수 노동층 등과 가까이 하리란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전작 『고양이 버스』를 출간한 후에 예스24와의 인터뷰에서도 "우리는 이제 팬데믹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팬데믹의 시대에 필수노동자들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지만, 그 가치나 처우는 아직도 제자리에 있다는 것도요. 앞으로 저는 이런 변화된 사회속에서 여전히 분투하며 살아가는 주변부의 인물들을,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자기식의 저항을 하는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인물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보고 싶습니다. 지금까지의 작품들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메세지를 담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어긋나지만은 않는 작품들을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물들을 깊이 탐구하고 소설 속에서 녹여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어 그의 시선과 소설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 지 가늠해볼 수 있다.
저자 : 문미순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1년 심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첫 소설집 『고양이 버스』를 펴냈다. 2023년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으로 제19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