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그림 읽기 - 고요히 치열했던
이가은 지음 / 아트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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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적인 그림 읽기』는 독자에게 두 가지의 지식을 더하게 해주었다. 하나는 새로운 그림 감상법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림에 대해 배운 적도, 직접 그린 적도 없는 독자는 미술 관련 책이나 유명 도슨트의 그림 감상법을 읽고 감상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그림 감상에 입문한 뒤로 될수록 많은 전시회에 직접 가서 보고 느끼는 점을 하나씩 쌓아가는 식이다. 그림의 제목이나 화풍을 보고 누구의 그림인지를 아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여전히 그림에 대한 지식이 많다고 말하기는커녕 그림을 누군가에게 설명해주기에는 어려웠다. 그렇게 쌓은 지식은 그림이나 화가의 일부분만 알기 때문이다. 저자 이가은은 여기에 그림 감상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을 독자에게 알려준 것이다. 먼저 공감하는 그림을 발견하고, 그 그림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실과 화가의 당시 활동에 대한 지식을 얹으면 풍요롭고 수준 높은 그림 감상법을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그림 문외한의 독자를 꽤 지식이 있는 것처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또 다른 하나는 클래식 음악도 마찬가지지만, 왜 문학과 달리 그림을 그리는 여성은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이 책이 그 점을 일깨워 주었다. 독자는 없는 게 아니고, 몰랐던 것이다. 그만큼 그림에 대해 몰랐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저자는 미술 공부를 하다 역사학으로 전환해 공부한 역사와 자신의 일상을 통해 그림을 치밀하게 들여다보고 이 책을 재미와 깊이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책이라고 이 책의 출간 취지를 밝혔다. 저자는 언론학과 서양사를 공부한 새내기 연구자이자 세상의 여러 기준에 맞춰 자신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30대의 한 개인으로서, 하나의 그림을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는 독특한 미술 에세이를 썼다. 바로 이 책이다.

 


 

“역사를 공부하기 전에는 그림이 나의 글감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역사학에 뛰어들면서부터 미술 감상을 즐겼다. 처음에 그림은 내게 유용한 사료였다. 역사서의 한 페이지를 연구하듯 그림을 읽었다. 아는 만큼 보였고, 보이는 만큼 그 안에 나의 경험과 사유를 담아 ‘내 것’으로 사랑하게 되었다.”(p.8)

 

이젠 저자에게 그림은 감상의 대상을 넘어 역사 연구의 재료다. 파리 기념엽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 베로의 그림에서 가정에 귀속되었던 19세기 여성들의 활동 반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 공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는지 돌아보고, 안토넬로 다메시나의 「서재의 성 제롬」을 보며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진 ‘읽기’의 역사를 살폈다. 또 얀 마테이코가 그린 코페르니쿠스 그림에서 신성과 과학이 어색하게 공존하던 시기, 태양중심설이 촉발한 ‘세대 갈등’을 흥미롭게 짚어낸다. 그러나 각 이야기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고민에 대한 작은 해답을 이끌어내는 과정과 매끄럽게 얽힌다.

먼 나라와 여기,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미술작품을 살펴봄으로써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바로 ‘삶의 의미’라고 말한다. 마차 운전석에 앉아 파리의 신작로를 내달리는 여성, 책에 몰입하는 성 제롬, 프톨레마이오스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으로 이어진 세계관을 바꾼 과학자들 등, 저자는 그림 속 인물과 상황에 자신을 대입해 ‘고요히 치열했던’ 시간의 의미를 길어올린다. 이 책에는 우정, 경쟁, 다이어트, 관종, 세대 차이 등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주제로 쓴 개인적이고 역사적인 열다섯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일상의 균형추가 되어준 그림과 과거의 이야기가 적재적소에서 글에 힘을 실어준다.

 


 

1부 「외롭지 않은 고독」에서는 외로움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오롯이 세우는 태도를 보여주고, 2부 「아름답게 치열할 것」에서는 매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숭고함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을 미술작품을 통해 전한다. 3부 「고요하게 바라보는 시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변화 앞에서 지나간 것과 다가올 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는 시간에 대해 풀어냈다. 1부 1장(章)에서 저자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우산〉을 통해 스스로 예민해지고 자신이 전공을 바꾼 데 대한 회의감도 들었던 것 같다. '왜 사서 고생일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등 불안하고 우울한 감정에서 벗어나는 의지를 〈우산〉을 통해 스스로 일깨운 듯하다. 저자는 여성들이 사용하는 '우산'에 대한 역사적 고찰을 더한다. 르누아르가 〈우산〉을 그린 시절은 우산의 대중화가 실현되어 귀족과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 다수가 값싸고 가벼운 우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대라는 점을 알아낸다. 이에 따라 르누아르가 〈우산〉을 그릴 무렵 파리 시민들은 내심 비가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새로 구입한 우산을 챙겨 다니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우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소한 기쁨을 안고 우산을 펼쳐들었을 것이라고 연상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르누아르가 그때 저자의 삶을 관찰하고 그린다면 아예 다른 작품이 되리라고 확신하다고 말한다. 르누아르는 분명 비 오는 날에도 의외의 설렘과 즐거움을 찾아내 그것을 더 신경써서 그릴 테고, 완성된 그림을 보여주며 "봐, 네 시간이 그렇게 울적하지만은 않았다니까?라고 말할 것으로 저자는 단언한다. 그러면 그제야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저자가 놓쳤던 순간, 배우고 얻은 것, 소소한 기쁨 들을 기억해내고 그 나날을 좀더 소중히 여기게 되리라고 설명한다. 저자와 화가, 작품에 대한 연결성을 말하는 것이다. 저자가 르누아르 〈우산〉을 보면서 '우산'의 역사, 당시 화가의 화풍, 시민들의 유행하던 것, 시민들의 일상을 세세한 것까지 모아 분석한 후 자신을 대입시켜 비 오는 날의 고독을 씻어내고 좀더 활동적이고 즐거운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저자 자신의 마음 치유를 드러낸 감상을 독자들에게 슬며시 내놓는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전시하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은 거리가 텅 빈 늦은 밤, 잠들지 않는 뉴욕을 그린 작품이다. 한낮 도시의 불빛과 소음은 소거되고, 정적이 드리운 배경에 한 심야식당의 조명만 밝히고 있다. 바의 손님들은 과묵하고 무심한 얼굴로, 어떤 교류나 대화 없이 그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모습이 멍때리는 것 같기도 피곤한 듯하기도 한데, 분명 일말의 열심이나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호퍼의 다른 작품에서도 작중 인물들은 대개 이와 흡사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로 인해 그들의 내면은 항상 쓸쓸함, 외로움, 우울 등의 멜랑콜리한 정서들로 해석되어 왔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20세기 도시인들의 불안과 공허를 사실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가 호퍼를 향한 가장 흔한 찬사였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이 그림을 생각한다. 다른 시선으로 감상하는 것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 마치 그림 속 거리의 행인이 된 듯 유리창 너머를 오래 주시했다. 작품은 그만큼 흡입력이 컸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흔히 말하듯 단지 외로움과 쓸쓸함만은 아니었다.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던 덕분인지 지극해 개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니, 작품에 흘러넘치는 단절과 적막에서 외로움보다는 편안함이 느껴졌다.

호퍼의 피사체들은 늦은 밤 드디어 찾아온 고요한 시간을 가장 익숙하고 편한 장소에서 휴식하며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관계에 지쳐 있던 때, 내가 갈구하던 시간을 그들이 누리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p.54~55)

특히 홀로 앉은 남자의 뒷모습에 좋아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저자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말한다. 퇴근 후 아늑한 카페에서 휴식하기, 멍하니 산책로를 거닐기, 늦은 밤 영화관에서 감성에 젖어 훌쩍이기, 집에서의 휴식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낯선 이들 사이에서 익명성의 투명 망토를 입고 다채로운 고독을 즐긴다. 그림 속 남자도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투영된 저자의 마음은 할걸음 더 나아가 어떤 방식으로 적막을 깨뜨리는 행위는 그의 고독을 존중하지 않는 실례가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2부 「아름답게 치열할 것」 첫 장에서는 주세페 카데스의 〈아이아스의 자살〉을 다룬다. 여성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이하 〈스우파〉)의 인기가 절정일 때인 2021년 겨울, "그게 그렇게 재밌냐?"는 친구의 물음에 "스우파에서 인생을 배워"라고 답했다고 한다. 난생 처음 보는 댄서들. 그들이 선보이는 춤과 무대도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화려한 공연이 전부였다면 그렇게까지 과몰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스우파〉에서 댄서들의 내공과 사연이 빚어내는 강력한 드라마를 읽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그들이 펼치는 도전, 갈등, 좌절, 우정, 꿈, 자존감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한번쯤 찾아오는 보편적 이야기이다. 춤과는 서먹한 저자는 그 안에서 현실을 발견했고, 저자가 실제로 맞닥뜨린 삶의 과제들을 너무나 멋있게 풀어가는 댄서들의 매력에 빠져들게 됐다는 것. 승자와 패자, 강자와 약자,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경쟁에서 우리는 후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꺼이 경주마가 되어 달린다. 승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고, 모든 수고는 허사가 된다. 그저 도태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속에서 패자의 존엄은 고사하고 승자의 존엄도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니 '아름다운 경쟁'이라는 말만큼 비현실적이고 위선적인 자기 위로가 있을까?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스우파〉가 보여준 것은 다름 아닌 이기지 못한 경쟁에도 의미가 있고, 도전 자체로 감동을 줄 수 있으며, 승자와 패자 모두가 빛날 수 있다는 아름다운 경쟁의 가능성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그들에게 결과는 중요했다. 심사위원과 대중의 선택이 공개될 때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에게는 하고 싶은 무대를 했는지, 진심을 다했는지, 스스로에게 만족한지가 더 중요해 보였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이에 따라 저마다 멋진 무대를 만들어냈고, 패배가 예견된 경쟁이라도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더라고 말한다. 여기에 저자는 주세패 카데스의 그림 〈아이아스의 자살〉을 비유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 『아이아스』의 한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중앙에 자살을 감행하는 남자가 극의 주인공 아이아스다. 한눈에 봐도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비극적 정서가 느껴진다. 아이아스는 그리스 최고의 전사였으나 어떤 한 경쟁에서 패배한 후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비극이다. 저자는 공연과 연극, 그림이 표현하는 그 무엇이 공정한 경쟁과 패자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현실 세계를 펼치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자성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현재와 고대의 시점에서 '경쟁'에 대한 우리들의 깨우침을 주려는 듯하다.

 


 

2부 세 번째 장 〈관종 시대의 자기표현법〉에서 독자의 여성 화가에 대한 의문점이 풀렸다. 저자는 이 장에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크의 〈자화상〉을 들고 있다. 저자는 젠틸레스키의 그림을 볼 때면 작가의자기표현과 관련해 많은 귀감을 얻는다고 고백한다. 물론 이미 '관종'에 대해 저자는 "관심을 원하지만, 지나친 관심은 원치 않는다"라고 적절한 거리를 둔다고 말한 바 있다. 젠틸레스키는 17세기 초중반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흔치 않은 이탈리아 여성 화가란 설명을 앞세운다. 예술가 길드인 아카데미아 디 아르테 텔 디세뇨의 높은 성별의 벽을 넘은 첫 여성 회원이라고 젠틸레스키를 꼽는다. 여성은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던 시절,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미술가로 인정받을 만큼 그녀는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젠틸레스키는 본인 작품에 자기 얼굴을 자주 등장시키는 화가였다. 성경·역사·신화의 장면이 그녀 작품의 주 소재였는데, 그녀는 종종 그림 속 여주인공의 외모에 거침없이 자기 모습을 그려넣은 화가다. 당시 대부분의 작가가 남성이었기에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덧입히는 인물도 남성에 한정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혜성처럼 나타난 한 여성 작가가 상징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자신의 얼굴로, 그것도 빼어난 실력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그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젠틸레스키는 단지 자신의 외양을 알리기 위함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책에 따르면 젤틸레스키는 주로 여성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렸다. 우리에게 알려진 57점의 작품ㅈ 중 49점이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거나 남성과 동등하게 묘사하고 있다. 젠틸레스키가 반복해 그린 여성 중에는 구약성서 외경 『유디트서』의 주인공 유디트가 있다. 유디트는 조국을 정복한 아시리아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미인계로 유혹하고, 그의 목을 칼로 베어버린 신화적 여성이며, 카라바조를 비롯한 저명한 화가들의 오랜 사람을 받아온 주제이다. 그 중에서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가장 강렬하고 극적인 연출로 유명하다. 당대인들은 이 작품을 보며 세 가지에 놀랐다. 첫째로 여성의 실력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둘째로는 그림의 과격성과 강인함에, 마지막으로 유디트의 모습이 화가를 너무 닮아서였다.

 


 

젠틸레스키의 인생에서 관심은 꼭 필요하면서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심은 양날의 검이 되어 그녀에게 명예도 주고 상처도 입혔다. 그 가운데 그녀는 항상 할 수 있는 최선으로 목소리를 냈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닿기를 바랐다. 물론 작품으로 그녀의 전부를 알 수는 없다. 누구나 자기에게 유리하게 자기를 해석하고 드러내기 마련이니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가장 하고 싶었던 말, 그래서 애써 기록으로 남긴 그 말들을 지금 우리가 400년의 시차를 극복하고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p.171)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에 대비하며 살다보면 어느 날 불현듯 죽음이 찾아온다. 이 마지막 순간을 포착하는 중세 예술의 알레고리가 ‘죽음의 무도’다. 이때 죽음은 ‘죽음의 승리’에서와 같은 냉혈하고 비인격적인 살육자가 아니다. 그보다는 익살스러운 악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죽음은 잔뜩 신명 난 표정과 몸짓으로 풍악을 울리며 이제 막 삶을 마친 인간에게 다가온다. 이들의 역할은 아직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인간을 죽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다.(p.295)

 

저자 : 이가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부터 소통의 도구인 언어와 미디어에 관심이 많았다. 점차 ‘무엇’이 의미 있는 메시지인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그때부터 지나간 인생들이 남긴 흔적을 즐겨 좇았다. 역사와 미술을 향한 애정은 그 여정 가운데 탄생했고, 깊어졌다. 축적된 시간 속에서 다양한 삶을 탐색하고, 감정과 철학을 읽어내는 작업이 좋다. 어제의 정답이 오늘의 오답이 되는 일이 반복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자체를 가치 있게 여긴다.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동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쓰고, 인문학지도사로서 온·오프라인 역사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일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leeegenna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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