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안전가옥 오리지널 24
민지형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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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기억'과 '망각'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면 으레 ‘판도라의 상자’가 떠오른다. 판도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초의 여성으로서 제우스가 프로메테우스로부터 불을 얻은 인간을 벌하기 위해 헤파이스토스를 시켜 진흙을 빚어서 만들게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판도라가 온갖 불행을 가두어 둔 상자를 호기심에 못 이겨 여는 바람에 인류의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결과보다는 인류의 불행의 시작이 된 판도라의 상자에서 무엇이 나왔을까. 다 아다시피 판도라가 상자의 뚜껑을 연 순간, 욕심, 시기, 원한, 질투, 복수, 슬픔, 미움 등의 재앙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깜짝 놀란 판도라가 상자 뚜껑을 닫았을 때 그 안에 남은 것은 딱 하나, 희망이었다. 그것을 안 판도라는 희망을 꺼내 주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힘든 일을 겪더라도 희망 덕분에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이때 나온 온갖 재앙 중에는 '망각'이 있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마지막 남은 '희망'에 중점을 둔 신화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망각은 어떤 것일까? 망각이란 쉬운 사전적 풀이로는 '잊는 것'을 말한다. 망각은 기억을 전제로 한다. 전에 경험 또는 학습한 것을 상기하거나 재생하는 능력이 일시적 또는 영속적으로 감퇴 및 상실되는 일이라고 〈심리학용어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처럼 망각과 기억은 인간의 심리적인 요인과 관련되어 연구 대상이기도 하고 발전 토대이기도 하다. 망각은 일종의 삭제나 퇴화로 본다면 우리 삶의 불안 요소가 되겠지만, 인생이 좋은 일보다 나쁘고 싫은 일을 극복해가는 차원에서 본다면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될 수도 있으리라.

 


 

이 책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은 표제어가 말하는 '망각'에 대한 저자 민지형의 사유를 형상화한 소설 작품이다. 이 소설엔 기억을 업로드하고 체험하게끔 하는 기기(라이프 랜드스케이프)가 나온다. 배경 시점이 현재나 근미래 정도이다. 이 소설은 이로써 SF 소설로써의 조건을 갖추어간다. 입주 가사 도우미 재이는 이 기기를 통해 전혀 다른 표정을 얻은 집주인 내외를 보며 호기심을 키우고, 한 사람의 가장 행복한 기억이 다른 한 사람에게는 가장 끔찍한 기억일 수도 있음 알아낸다. 슬슬 일에 질려가던 어느 날, 재이는 안방에서 난도질된 몸을 발견한다. 낭만적인 기기와 희대의 살인 사건이 맞물리자, ‘라이프 랜드스케이프’의 개발자이자 개발사 호라이즌의 차기 CEO 리사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재이를 찾아온다.

이 소설의 키워드는 등장인물을 제외한다면 단연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다.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는 기억을 사고팔 수 있는 소비재로 만드는 동시에, 그 과거를 전복하여 체험하는 복수 패치를 탄생시키기도 한다. 괴로운 기억은 짐이지만, 짐을 인식할 때 이를 짊어질 힘과 의지를 발견하게 되는 법도 있다고, 소설은 양날이 빛나는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들어 말한다. 나아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싶지 않은” 작가 본인의 기억에서 출발했다고 밝힌 이 소설은 창작 역시 망각에 대한 대항임을, 그러므로 소설은 단순한 전리품이 아니라 그 대항의 자명한 증거임을 보인다.

 


 

인간은 망각이라는 특권을 지닌 존재다. 다만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 속 일부는 특권을 포기할 수 있는 특권조차 살 수 있다. 그리하여 기억하고자 하는 것을 기억하고, 그 기억을 즐기며 잠시나마 살아간다. 그러나 개인의 기억이란 진실일지라도 사실이 아니며, 하물며 같은 사건을 복수의 당사자들은 다르게 기억한다. 한 인간의 행복이나 고통, 즉 개인성의 원천인 기억을 가촉적인 것으로 뒤바꾼 연금술로 인해 바야흐로 사실과 망상이 섞인 기억이 파일 형태로 공유되는 시대다. 이를 통해 이야기는 모험으로 나아간다. 재이와 리사 두 여주인공이 사람이 서로 쫓고 쫓기는 모습은 매초 망각되고 유실되는 세계 속에서 기억을 꼬리잡기하는 듯 그려지며 보는 이의 긴장감을 더한다.

이 소설의 서두는 “이것은 과학 기술을 가장 낭만적으로 이용한 사례가 될 것이며, 현대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품이 될 것입니다.” 신제품 개발에 대한 TV의 제품 소개로부터 시작된다. 가사 도우미 재이가 쪽잠에서 깨어날 무렵 어렴풋이 들리는 소리다. 재이가 잔 수천만 원짜리 소파에 대한 품평도 자신만의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순간 별안간 누군가가 재이의 몸을 만지기 시작한다. 발목 언저리를 두툼한 손가락으로 더듬기 시작해서 종아리에서부터는 손끝을 세워, 손톱이 살갗을 스치는 느낌이 선뜩하다. 재이는 당황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이 대저택의 주인, 재이가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60대 중반의 늙은 남자가 소파 끝에 앉아 태연한 얼굴로 TV를 보면서 손으로는 재이의 다리를 지분거리고 있었다.

입주 가사 도우미로서 재이의 제1 목표는 언제나 적게 일하고 많이 쉬는 거였다.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많이 엿보는 것.(p.11)

 

 

추천사를 쓴 소설가 전혜진이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을 언급한다. "마치 SNS의 확장판 같은 발랄한 기술을 통해 사람들의 기억이 업로드되어 공유되고 재생되는 콘텐츠가 될 때, 경험한 기억과 생생한 망상이 뒤섞이고, 때로는 해상도를 높이거나 낮추며 수정될 때, 기억을 콘텐츠로 만들고 다시 체험하는 과정에서 어떤 기억이 타인의 의지에 따라 삭제되거나 변조될 때, 우리의 '기억'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사람들의 비밀에 관심이 많고 선을 넘나드는 트릭스터 가사 도우미 재이와,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었지만 정작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아버지의 억압에 짓눌려 있는 리사, 그리고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호라이즌의 총수로 냉혹한 신처럼 군림하는 노아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기억'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흔들어 놓는다.

누군가의 끔찍한 기억이 타인의 음습한 욕망의 먹이가 되고, 개인의 기억을 권력을 쥔 자들이 입맛대로 손댈 수 있는 시대, 타인의 업적을, 정치인의 비리를, 기업의 과실을, 대형 참사와 노동자의 죽음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지우고, 다크웹을 통해 누군가의 악몽 같은 순간들이 “죽이는 파일”의 형태로 돌아다닐 때, 이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는 것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잊고 싶지 않은, 혹은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의 힘이다. 누군가는 욕망을 위해 이용하는 타인의 기억에, 누군가는 공감하고 연대하며 복수에 나선다. 시스템에서 그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혹은 그 당사자가 죽는다 해도, 기억을 이어받는다는 행위는 뜻을 이어받는 일이다. 망각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지가 주는 마음의 평화라면, 고통을 기억하고 의지를 이어 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미래로 가는 열쇠다. 기억하고 기록하여 과거를 미래로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영광이 있으라."(p.300~301)

 


 

저자 민지형은 「작가의 말」을 통해 창작 동기와 수정-완성 과정에서 단편이 장편으로 전환된 이유 등에 대해 자세히 기술한다. 이 소설의 구상은 어느 날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방에서, 그 사람을 찌른다.

실제로 있던 일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피가 흐른다.

그 장면을 떠올릴 때, 나는 사실 그를 찔러 죽이고 싶은 것보다는 그때의 나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고 느낀다.

하지만 가끔 은밀히 상상해 보는 것이다. 쪽- 아래로 찢어발길 때 흐들흐들해지는 고무 같은 몸과 아무리 후려쳐도 얼굴에 일체형처럼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신비로운 안경, 갈라진 가슴팍에서 꾸룩 뿜어져 나오는 끈적한 액체 같은 것을.

*

이 소설을 쓰고 고치면서, '기억'이라는 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잊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중략)

이 소설은 원래 단편으로 쓰였다. 자전적인 그를 써야 하는 워크숍이었다. 덕분에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낸 순간들과 그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엇고, 그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나열할 수 있는 소설의 장치로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라는 가상의 기계를 고안했다. (중략)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한 이들을 위해 그러니까- 우리들을 위해서, 나는 이 이야기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p.303~306)

 


 

이 소설이 단편에서 장편으로의 전환, 기억과 망각이라는 개념, 수정과 출간까지 많은 작업을 도왔다는 출판사 이지향 PD의 말은 소설의 내용과 저자 민지형의 주제 의식, 심지어 줄거리도 꿰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작품은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끌리는 정반대의 두 사람이 서로를 속고 속이며 끝까지 달려가는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이기도 하다. 두 사람이 서로를 잡거나 피하려고 계획을 짜고, 그 계획이 성공하거나 실패할 때 두 사람 사이에 피어오르는 증오와 애정에 대해 작가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에서라도, 심지어 상대가 미울지라도 끌릴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감정이 절망적인 상황을 견디고 돌파하는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말도 못하게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솔직하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여자들을 그리고 싶은 저자의 마음에 동의했다.

실제로 작품 속의 두 여자 재이와 리사는 살아온 환경도 생각도 생활도 정반대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평상이라는 결코 마주칠 일 없는 두 사람이 리사가 개발한 기억을 재생하는 기기인 '라이프 랜드스케이프'로 얽히게 된다. 매우 지독하게.

'기억'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기억'과 '상상'을 관장하는 부분이 뇌의 같은 영역이라는 사실을 이 작품을 프로듀싱하면서 알게 됐다. 바로 해마라는 뇌속 일부 기관인데 기억을 다루는 기능과 미래를 상상하는 둘 다 해마가 담당한다. 그래서 해마가 손상된 사람은 어제 뭘 먹었는지, 어린 시절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다음 주에 뭘 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기억하지 않는 자에겐 미래가 없다"는 구호는 상징적ㅇ니 차원에 그치는 말이 아니라 과학적 진실에 가깝다."

 


 

다음 순간, 리사는 미친 듯이 직원 전용 통로를 뛰어서 드넓은 활주로로 나갔다. 아무런 근거는 없지만, 직감이 그를 이끌었다. 상대적으로 날렵한 경비행기가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이 저 멀리서 보였다. 작은 리사의 몸으로는, 아무리 달리고 또 달려도 도저히 거리가 줄어들지 않았다. 활주로라는 것이 이렇게 길고 넓었 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리사가 뛰어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비행기가 드디어 이륙을 준비하는 듯 천천히 속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리사는 이를 악물고 비행기를 향해 달렸다. 그러나 속도를 내기 시작한 비행기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가속이 붙었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올라, 한계에 다다른 것을 깨달은 리사는 쏟아지는 눈물을 멈추지도 못하고 화풀이라도 하듯 충동적으로 주머니에 들어 있던 권총을 꺼내 들었다.(p.158) - 「리사는 갖고 싶다」 중에서

 

저자 : 민지형

 

1986년생. 서강대학교에서 국문학과 신문방송학, 일본학을 공부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대학원에서 극영화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2015년 대한민국스토리공모대전에서 「조선공무원: 오희길 전」으로 우수상을 수상했고, 2019년 TV드라마 [레버리지: 사기조작단]의 극본을 썼다. 영화와 드라마 현장에서 작가로 일하며 한국영화성평등센터 소속 성폭력예방교육 강사로도 활동하고 있다.

첫사랑은 중학교 3학년, 첫 연애는 대학교 2학년. 이후 연애에 나름 소질(?)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선 열심히 연애하고 이별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페미니즘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우리들의 연애와 사랑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경험하며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소설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는 그 경험들에 관한 이야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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