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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 그린 - 버지니아 울프 단편집
버지니아 울프 지음, 민지현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평점 :
독자는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을 볼 때마다 우리 시인 박인환이 떠오른다. 그의 시 〈목마와 숙녀〉에 '버지니아 울프'가 언급되기 때문이다. 박인환은 버지니아 울프를 동경했던 것 같고, 그의 시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독자는 고등학교 시절 박인환을 알았고, 그의 시를 즐겨 읽기도 했다. 특히 한국전쟁 후 폐허의 서울 명동에서 문우 등 예술인들과 교유하며 대한민국의 가장 비참한 생활을 견뎌낸 시인이어서 기억이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그것보다는 그의 또 다른 시 〈세월이 가면〉은 곡까지 붙여 뒤에 한국인이 사랑하는 노래에 뽑힌 적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중략)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하략) - 〈목마와 숙녀〉
독자 개인적인 이유지만 〈세월이 가면〉 역시 박인환을 기억하기에는 매우 좋은 시이다. 어쩌면 박인환을 아는 사람이라면 으레 노래를 떠올릴 것이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그렇다면 〈목마와 숙녀〉 싯구처럼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는 버지니아 울프와 관련이 된 것일까? 독자가 알기에는 다른 두 인물이라는 것이지만 시인이 직접 밝히지 않는 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시 발표 후에 문학평론가들이 싯구의 문맥상 다른 인물로 추정하는 것이라고 분석한 글을 읽은 적도 있다. 〈목마와 숙녀〉를 몇 번이고 읽어 보면 시의 분위기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나 작품과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 책 『블루 & 그린』은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집이다. 울프의 삶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태어나기는 영국 상류층에서 태어났지만 자랄 때는 무척 불우했던 모양이다. 낳아준 어머니는 울프의 출생 직후 사망했다고 하니 아마 산고를 이기지 못했던 것 같다. 새어머니는 울프를 상류층 자녀답게 성심껏 키웠지만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울프에게는 오히려 장애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유럽은 식민지를 세계 곳곳에 두고, 많은 재물을 침탈해 부를 쌓았으며 대제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부가 유럽으로 쏠려갔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 이 혜택이 전혀 돌아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고 자녀를 낳아 훌륭하게 키우는 역할만 담당하는 남성의 전유물처럼 생각했던 시대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버지 덕분으로 많은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주장할 정도로 스스로를 만들어 나간 것으로 그의 생애를 평가하고 있다. 우울한 성격은 그렇게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독자로서의 생각이다.
그러나 이 책을 펼치는 순간 독자들에게 버지니아 울프는 우울이나 어둠의 정서로만 비쳤던 오인의 그늘을 벗어던질 수 있다. 페미니즘, 여성 퀴어 등 시대를 초월한 주제의식을 포함해 다정함, 따듯한 사랑, 유머와 위트, 그리고 인간의 '마음의 비행'을 끝없이 추적하는 열정에 놀라운 온기를 느낄 것이다.
영문학자 손현주는 책의 뒷 부분에 있는 「버지니아 울프 : 장면 만들기의 마술사」란 작품 해설에서 한마디로 책과 울프를 정리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영문학의 거장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번에 출간된 울프의 단편 모음은 깔끔하고 매끄러운 번역으로 독자들을 울프의 작품세계로 안내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울프는 영국에서 나고 살았지만 '하버드 대학생이 가장 많이 읽은 책'으로 선정됐다. BBC에서 뽑은 위대한 영국소설 25편 중 세 편을 싹쓸이한 유일한 작가, 뉴욕타임스 선정 인류의 필독서, 서울대학교 도서관 대출순위 TOP100에 언제나 올라 있는 작가가 버지니아 울프라는 것이다. 이처럼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버지니아 울프는 독자들의 사랑과 놀라운 기록을 한몸에 몰고 다니는 주인공이었다. 이 책을 출간한 이유이다.
울프는 사망 직전까지 50여 편에 달하는 단편 소설을 썼으며, 『블루 & 그린』은 지금껏 소개되지 않았던 스케치글을 포함하여 모두 18편의 보석 같은 최고작을 엄선하여 담았다고 출판사는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그 위대한 문학에 가장 친근하고 깊숙이 다가갈 수 있는 베스트 단편집이다. 한편 정이현 작가는 “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이 소설을 ‘썼다’가 아니라 ‘쓴다’라고 쓸 것이다. 영원한 현재형으로. 이 시대의 가장 현대적인 고전이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특히 강렬하고 생생한, 생명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여성들에 대한 포착이 뛰어나다는 추천의 글을 더했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인 『자기만의 방』에서 더 나아가 그녀가 창조한 언어의 낙원으로 나아가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이해도 높고 충실한 번역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민지현 번역가가 노력을 더했으며,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임원으로 서울대학교에 출강 중인 영문학자 손현주의 세심한 해설을 곁들였다. 울프의 소설을 접해본 적 없는 입문자부터 오랫동안 사랑해온 마니아 독자까지, 그동안 비범했던 그녀의 삶 자체에 가려진 순수한 소설의 재미와 감동을 맛볼 수 있는 더없는 기회라고 출판사 측은 덧붙였다.
“사람의 평생을 단 하루에 담아 묘사할 거야.” 영화 『디아워스』에서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분)는 「댈러웨이 부인」을 쓰며 이렇게 말한다. 뇌리에서 잊을 수 없는 언어, 장면 만들기의 마술사, 여성 삶과 문학의 혁신가인 울프의 진가는 그래서 더욱, 짧은 단편에 있을지 모른다. “블루 & 그린은 세차게 터져 나온 자유의 함성이다.”(버지니아 울프의 일기 중에서) 문학계에 다시 있을 수 없는 거장의 내면이 직조한 유려하고도 생생한 외침 속으로 들어가보자.
「본드 가의 댈러웨이 부인」은 장갑을 사러 가는 한 부인의 마음속에 지나가는 수많은 생각을 따라가는 역작이다. 울프는 공감은 물론 웃음마저 이끌어내는 글쓰기를 보인다. 「밖에서 본 여자 대학」, 「존재의 순간들」은 여성퀴어 서사에 목마른 독자들에게 단비가 되어줄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는 작품이다. 마주하는 눈동자의 떨림만으로 가슴속에 파장을 일으킨 영화 〈캐롤〉에 못지않은 사랑의 미학을 맛볼 수 있다. 「프라임 양」,「불가사의한 V 양 사건」, 「라핀과 라피노바」 역시 다양한 여성의 세계를 차가울 정도로 똑바로 바라보는 눈과 묘한 유머센스, 가슴 한구석이 아려오는 아픔이 교차한다. 그 짧은 문장과 장면에 순간을, 삶을, 세계를 담아내는 것은 오직 버지니아 울프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강화길 작가는 “버지니아 울프를 읽을 때면 늘 시간이 정지한다. 짧지만 강렬한 묘사들 앞에서 나는 오래도록 머물렀다.”라고 추천사를 썼다. 이 말처럼 분명 1881년부터 1941년까지를 살다간 인물인데 그의 한 줄은 지금의 영혼에까지 일렁임을 일으킨다. 표제작 「블루 & 그린」은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같은 언어에 젖어 푸르디푸른 파랑과 초록을 감각하게 만든다. 「과수원에서」는 카메라에 몽환적 필터를 씌운 것 같은 묘사를 자랑하고, 「월요일 또는 화요일」, 「현악 사중주」, 「유령의 집」은 비일상과 일상, 외부와 내면이 섞인 혼돈 속에 진실을 탐험한다.
천선란 작가는 “단정하고 정갈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것은 혼돈의 속삭임처럼 느껴진다”라고 이 책을 추천했다. 타오르지만 은근하다. 조각났지만 전체다. 어둡지만 빛이다. 차갑고도 따스하다.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일지도 모르는 모순을 꿰뚫는 18편의 단편을 통해, 울프는 훌륭한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문장, 그녀가 영향받은 그림과 음악의 접목, 퀴어를 포함해 평생 관심을 기울인 여성문제와 전기문 형태의 글쓰기 등 어느 형식에 안주하지 않고 한 작품 한 작품마다 서로 다른 시도를 감행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선물하는 형형색색의 꽃다발을 받아들 준비가 돼 있다면 언제든 이 책을 펼쳐볼 일이다.
하지만 그는 죽었다. 그가 나의 감성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끔찍한 일이야! 너무나! 그렇게 무정했다니! 저기 그가 앉았던 노란색 안락의자가 있다. 낡았지만 여전히 견고한 저 의자는 우리를 능가하여 세상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벽난로 위 선반에 진열된 유리와 은 장식물도. 그의 생명은 벽과 카펫에 줄무늬를 그리는 햇빛 속에 떠도는 먼지처럼 덧없다. 내가 죽는 날에도 태양은 그렇게 잔디와 은 식기를 비추겠지. 그리고 앞으로도 수백만 년간 노랗고 넓은 오솔길, 이 집과 마을을 지나 무한히 먼 곳까지 비추겠지.(p.170)
특히 영문학자 손현주의 작품 해설은 버지니아 울프와 그의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해 울프와 그의 작품을 이해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순현주는 울프의 문학은 "기승전결을 갖춘 사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내면을 의식의 흐름을 따라 서술하거나, 마치 피카소나 샤갈 등 인상파 화가들처럼 하나의 장면을 다각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고 분석해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독자는 손현주의 해설을 읽고서야 뒤늦게 앞에서 읽은 작품들을 다시 읽는 등 몇 번을 읽고 해설과 작품이 절묘하게 잘 들어맞고 있다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손현주의 상세한 해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나 이미 읽었던 독자들에게도 울프를 읽는 지침서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물론 울프의 출생, 자라면서의 환경, 성격 형성 과정의 부모의 역할 등을 모두 섭렵해 작가론을 다졌다. 손현주는 또 울프의 대표작은 물론 이 책에 실린 짧은 단편들도 빠짐없이 그의 문학적 해석을 가했으며 그 지적은 영문학자로서 그의 울프에 대한 지식이 바탕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울프가 태어난 해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손현주는 시대적 상황을 빠짐없이 체크하며 울프의 활동과 발표한 작품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1882년 무렵은 빅토리아 여왕이 대영제국을 다스리던 빅토리아 시대 후반기였다. 여성의 역할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것이었고 여성을 '집안의 천사'로 추앙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울프는 여성이 작가가 되려면 "자기만의 방과 1년에 500파운드의 수입"이 필요하다고 과감한 주장을 폈다고 말한다.
특히 『자기만의 방』에서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주디스 셰익스피어의 비극적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그중 가장 많이 논란이 되고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만일 엘리자베스 시대에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여성이 있다면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라고 질문하면서 울프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가상의 여동생 주디스의 삶을 상상으로 재현해 냈다고 설명한다. "울프는 누구보다도 여성들의 억눌린 삶에 대해 분노하고 여성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웠다"고 평가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창조성과 여성운동가로서의 열정을 모두 갖춘 글로 투쟁하는 '문사(文士)'로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작품 해설을 놓치지 말 것을 권유한다.
저자 :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본명은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으로 1882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생 정신 질환을 앓으면서도 다양한 소설 기법을 실험하여 현대문학에 이바지하는 한편 평화주의자, 페미니즘 비평가로 이름을 알렸다. 빅토리아 시대 소위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환경에서 자랐고, 주로 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평가이자 사상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의 서재에서 책을 읽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오빠 토비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한 후 리턴 스트레이치, 레너드 울프, 클라이브 벨, 덩컨 그랜트, 존 메이너드 케인스 등과 교류하며 ‘블룸즈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당시 다른 지식인들과 달리 여성들의 적극적인 예술 활동 참여, 동성애자들의 권리, 전쟁 반대 등 빅토리아시대의 관행과 가치관을 공공연히 거부하며 자유롭고 진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어머니의 사망 후 정신질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버지의 사망 이후 울프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평생에 걸쳐 수차례 정신 질환을 앓았다. 1905년부터 문예 비평을 썼고, 1907년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리먼트]에 서평을 싣기 시작하면서 『댈러웨이 부인』, 『등대로』, 『파도』 등 20세기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들과 『일반 독자』 같은 뛰어난 문예 평론, 서평 등을 발표하여 영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울프는 내면 의식의 흐름을 정교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내면서 현대 사회의 불확실한 삶과 인간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1970년대 이후 「자기만의 방」과 「3기니」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면서 울프의 저작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자기만의 방」이 피력한 여성의 물적, 정신적 독립의 필요성과 고유한 경험의 가치는 우리 시대의 인식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버지니아 울프는 픽션과 논픽션을 아우르며 다작을 남긴 야심 있는 작가였다. 그녀의 픽션들은 플롯보다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더욱 초점을 맞춘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해 쓰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출항』, 『밤과 낮』, 『제이콥의 방』, 『댈러웨이 부인』, 『파도』,『현대소설론』 등과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에세이 『자기만의 방』과 속편 『3기니』 등이 있다. 1927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쓰인 『등대로』를 발표하며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올랜도』, 『물결』, 『세월』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 왔던 울프는 1941년 독일의 영국 침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정신 질환의 재발을 우려하여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역자 : 민지현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립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뉴욕에 살면서,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의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어메이징 브루클린』, 『너와 마주할 수 있다면』, 『동물농장』, 『카피캣』, 『갤럭시』, 『할아버지의 위대한 탈출』, 『불법자들: 한 난민 소년의 희망 대장정』, 『메이슨 버틀이 말하는 진실』, 『애자일 마인드』, 『홉킨스의 잘 팔리는 비밀』, 『사랑의 완성 결혼을 다시 생각하다』, 『공감』, 『감정의 역사』, 『선을 긋는 연습』 등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