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그 화려한 역설 - 69개의 표지비밀과 상금 5000만원의 비밀풀기 프로젝트, 개정판
최인 지음 / 글여울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문명, 그 화려한 역설』은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최인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의 개정판이다. 소설 속 주인공 모제는 형사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여자친구 유리를 찾기 위해 온 도시를 뒤지고 다닌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유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동시에 450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어 있던 재미동포 흉악범 이카로스가 탈옥한다. 그를 쫒는 형사 모제는 떠난 여인 유리의 환상을 지우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모제의 일상이 드러나는 잠깐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 12시간씩 이 교대 잠복근무를 하다가 5시간으로 바뀌었다. 사흘 후부터는 10시간, 5일이 지난 지금은 12시간씩 근무 중이다. 현재의 근무체계도 일주일이 지나면 24시간으로 바뀌게 된다. 그 대신 잠복조는 조회나 석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승용차로 출근한다. 식사도 불규칙한 근무체계와 비슷한 방법으로 해결한다. 근무교대를 해주는 류대도 지쳤지만, 나도 이제 한계가 왔다. 이쯤 되면 만사가 귀찮고 무엇을 해도 짜증만 난다. 그런데다 몸은 늘어지고 의식은 점점 더 몽롱해져 간다."(p.59)

이 책은 소설 작품이다. 목차에 보면 〈제1부〉 1파트 - 19파트, 〈제2부〉 20파트 - 50파트, 〈제3부〉 51파트 - 69파트로 이루어져 있다. '부'와 '파트'로 구별돼 있지만 3부 69장(章)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 소설의 이력은 다소 의아하고 모호하기도 하다. 「작가의 말」을 통해 저자 최인이 이 책의 탄생에 대해 간략하게 써놓았는데 여느 소설과 조금은 다른 태생 기록을 갖고 있다.

 


 

저자는 이 소설을 구상할 당시 20년이나 30년 후의 이야기를 써 보자 생각하고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20~30년 후의 이야기답게 가볍고 스피디하고 파격적인 표현으로 일관했다고 밝힌다. 소설을 읽어 보면 성관계 묘사가 다소 파격적이긴 하다. 간겷한 단문을 사용해 독자의 호흡도 잘 살릴 수 있다. 또 파트에서 파트로 넘어갈 때도 거리낌없이 넘나들고 있어 시공간의 다른 느낌을 준다. 이 책은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1억원 고료 국제문학상」 당선작이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심사위원들이 당선작으로 선정할 때 묘사뿐 아니라 빠르고 참신하고 재미있다는 점에 있었다고 저자는 기억한다. 그러나 당선작으로 뽑힌 이유인 가볍고 스피디하고 파격적인 전개가 출판의 장애물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당선작으로 확정한 2002년 당시 출판사들은 당선 이유를 이유로 출간을 거절했다. 결국 20~30년 후를 내다보고 쓴 소설은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저자가 출판 거절 이유로 답변을 들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럴 수가? 다른 이유가 있는데 출판사들이 적절한 변명으로 둘러댄 것인가? 아니면 성 관계를 지나치게 파격적으로 묘사해서인가? 저자도 적절한 답변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독자로서는 더욱 궁금하긴 하다. 독자의 생각으로 "혹시?" 하는 부분은 소설인데도 해석하기 어려운 철학적 저서, 성경, 동양 고전, 찰학 이론, 문학이론서 등을 인용해서인가?란 점이다. 이 책은 저자가 말한 대로 69개 파트 시작 부분에 제목만 읽어도 머리가 아플 만한 명저들을 파트 수만큼 인용했다. 마치 파트의 제목처럼 어김없이 인용문이 먼저 시작하고 소설 본문이 뒤따르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그렇다고 출판 거절 이유가 될까? 독자들이 외면할 것 같아서? 즉 잘 안 팔릴 것 같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독자도 갖고 있다. 소설은 우리 삶이나 인간의 감정을 모두 형상화해 알기 쉽게 전해주는 문학 서술 방식인데 철학 이론의 한 부분을 먼저 인용하고 그 부분에 대한 해석을 하듯이 본문을 이어놓는다면 독자들이 쉽게 손이 가지 않을 수도 있으리란 생각은 출판을 모르는 독자도 들긴 한다. 아무튼 태어나기 어려운 이력을 지닌 채 일정기간(공모전 당선작이니만큼 출판권이 주최 신문사에 있을 것)이 지나고 출판권을 저자에게 되돌려 주었다고 한다.

저자는 당선작보다 더 좋은 소설을 쓰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결론 짓고, 9편의 장편을 추가로 쓰기에 이르렀다고 회고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최근 새로 쓴 9편의 소설도 탈고가 완료되었고,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일만 남았다.(독자가 알기로는 몇 편인가 발표되었다) 드디어 저자는 그동안 틈나는 대로 수백 회 이상 탈고하고 이 작품을 출판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 이 소설을 20년 이상 끌어안고 씨름한 것은, 파격적인 표현을 예술로 승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문장을 갈고 다듬는 괄골요독(刮骨療毒)*의 과정과, 좋은 글을 위해 육신과 영혼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생취예(捨生取藝)**의 정신으로 일관했다고 덧붙인다.

 

* 괄골요독(刮骨療毒) : 뼈를 깎는 고통을 안고 독소를 씻어내다.

** 사생취예(捨生取藝) : 삶을 기꺼이 바쳐 예술을 얻는다.(이상 독자 주)

 


 

이 소설은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다. 〈비밀풀기〉 현상 공모다. 현상 공모 내역을 보면 쉽지 않은 비밀인 듯하다. 문제가 표지에 있다는 점 외에는 어떤 힌트도 주어지지 않았다. 현상금의 파격일 뿐만 아니라 출판계에도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독자로서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현상금은 무려 5,000만 원. 책 표지에 69개의 비밀이 있으며, 이것을 푸는 첫 번째 독자에게 5,000만 원의 상금을 지급한다는 것. 이 개정판뿐만 아니라 초판본 구매자도 자격이 주어진다. 해답은 10~50자 이내로 쓸 것을 주문하고, 긴 문장이 필요한 경우 글자 수를 초과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답 앞에는 반드시 일련번호(1에서 69까지)를 붙일 것을 특별 요청한 것으로 보아 이 책의 69편으로 이루어진 것에 다소의 힌트가 되지 않나 싶다. 다만 독자의 추정일 뿐이다. 이처럼 상금액이나 비밀풀기 공모가 파격적이긴 하지만 독자로서는 '특전'에 더 시선이 간다. "연인이나 커플, 부부가 도전할 경우 비밀 3개를 면제해 줍니다."

다른 대부분의 장의 서문처럼 들어가는 인용문(고딕처리)이 첫 장(파트)에는 인용하지 않고 저자의 지론을 써놓은 듯하다. 인용문이란 아무런 표식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 형식의 문체라기보다 논저나 사상서 같은 느낌이다.

"사회적 분열과 해체기의 인간들은 하나의 극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사랑 면에서는 쾌락이나 금욕을, 감정 면에서는 충동이나 절제를, 행동 면에서는 방종이나 겸손을, 생할 면에서는 파격이나 관례를, 이념 면에서는 극좌나 극우를, 그러나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행과 불행, 선과 악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가치관과 이념은 물론이고 진실과 진리까지도 표묘(??)*** 속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p.11)

 

*** 표묘(??) : 끝없이 넓거나 멀어서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어렴풋함.(저자 주)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급진적인 현대문명과 왜곡된 자본주의에 대한 묵시록적 기록이란 출판사 측 소개글처럼 '문명의 역설'에 주목된다. 특히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사상과 서구문명이 다다른 막다른 골목을 냉정한 눈으로 지켜보며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는 주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무거운 주제의식을 가벼우면서 재미있고 스피디하게 다루는 방법을 선택했다. 즉 적의 칼로 적을 제압하는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의 전략이 엿보인다. 조금 어렵게 썼지만 서양 문명의 빛나는 발전 속의 그늘지고 어두운 문화를 지적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소설 속의 세계는 가볍고 경쾌하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섹스하며, 사소한 것에 탐닉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젊은 인물들이 소설을 끌고 간다. 이 책에 섹스가 자주 묘사되는 이유이다.

'모제'와 '집주'와 '이카로스'는 상징으로 가득 찬 이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세 명의 인물이다. 또한 형사 모제(27세)는 풍요와 자유의 얼굴을 한 신세대 문화의 전형적인 수혜자이다. 그는 21세기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자유분방한 형사이다. 모제는 삶에 대한 집착도 목적도 없다. 순간을 즐기고 소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팝송, 패스트푸드, 양주, 자유로움, 바, 나이트클럽, 섹스 등이 모제를 나타낼 수 있는 기호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고 만다. 지난밤을 디나와 섹스로 지새웠다는 걸 밝힐 순 없다. 다미에게 나는 오빠이면서 아빠 같은 존재니까. 나는 머리를 굴리다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p.23)

 


 

새로운 세대의 형사답게 모제 주변에는 수많은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누구든 가리지 않고 섹스를 즐기는 새로이 등장한 새로운 세대이다. 여자친구 유리(24세), 편한 친구 파라(27세), 술집 호스티스 디나(22세), 마담 지바(37세), 친구 동생 마리(20세), 화교 나래(20세), 번역작가 미사(35세), 꽃집을 경영하는 피여나(24세), 가출 학생 다미(16세)가 그들이다. 그들 중 유리는 이 혼탁한 도시문명에서 발견하기 힘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여자이다. 그런 유리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은 현재형 문장 특유의 빠른 속도감과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기표들에 대한 산뜻한 묘사로 쉽게 읽히는 미덕을 지녔다. 작가는 이렇게 화려하고 산뜻한 포장지 속에 비수를 숨겨 놓았다. 그 비수는 작고 둔중하면서도 날카롭다. 서구사상사와 문명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창조해낸 인물과 사건들은 하나같이 상징적이다. 이 소설의 주제는 진지하다. 그러나 전혀 무겁지 않다. 빠르게 읽히는 문체와 기발한 이야기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최인의 소설은 늘 그렇듯 흥미롭고 재미있고 반전의 묘미가 있다. 그리고 시대의 아픔과 상처와 모순을 지적하고 세련되게 아우른다. 달콤하고 세련된 문장을 선물상자 속에 포장한, 한마디로 경쾌한 신세대형 소설이다, 라는 평이 말해준다.

"허다한 전설에 있어서 동물과의 친교와 동물의 언어 이해는 낙원적 징후를 보여준다. 태초에, 즉 신화적 시대에는 사람은 동물과 평화스럽게 살았으며 동물의 언어를 이해했다. 성서에 나오는 인간타락의 전승에 비교될 원초적 파국이 오기 전까지 인간은 오늘날과 같은 삶, 즉 죽어야 하며 성적이고, 자신을 양육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며, 동물과 대적관계에 놓인 것 등과 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다. 엘리아데의 『샤머니즘』 중에서(p.152)

 


 

독자 역시 저자의 의식 흐름을 따라가기 벅차다. 소설에 사용되는 용어뿐만 아니라 각종 세계적 명저에 대한 저자의 탐구나 열정에 미치지 못한 원인이 클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가에 대한 주제가 확실한 소설이니만큼 읽어가는 데는 큰 문제를 겪지 않는다. 더욱이 독자로서는 저자의 전작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미 읽고서 저자의 소설 형식에 낯설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신세대'란 용어는 쓰지 않지만, 신세대든 MZ세대든 이 소설에서는 상관없다. 시대의 청춘을 가리키는 용어는 계속 바뀌어도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기 때문이다. 여기 문명, 그 화려한 역설 속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청춘들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이 책의 첫 페이지를 넘겨보면 즉각 알게 될 것이다. 어느덧 각각의 인물들에게 몰입되어 자칫 ‘화려해 보이는’ 그들의 미래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이 역설적이고 불투명하고 모순적일지라도.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본의 본문, 표지 등 220개의 비밀을 69개로 대폭 줄여, 어렵게 느껴지던 비밀 풀기의 난이도를 낮췄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가벼움 속에 진지함과 깊이감을 숨기고 있는 이 소설은 결국 희망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과 무덤이 있는 곳에서만이 부활은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이 책을 펼친다면 이제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는 일만 남았다. 지금까지의 소설 읽기와는 다소 다른 느낌의 소설 읽기를 시도한 작품이다.

 

저자 : 최인(崔仁鎬)

 

본명은 최인호다. 경기도 여주시 명성황후탄강구리에서 태어났다. 199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비어 있는 방」으로 등단했으며 2002년 『문명, 그 화려한 역설』로 1억 원 고료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2008년-2019년 12년간 ‘최인소설교실’을 운영했다. 인천지방경찰청에서 13년 근무했으며 파출소장과 형사반장을 역임하였다. 저서 『안개 속에서 춤을 추다』, 『킬리만자로 카페』, 『뒤로 가는 버스』, 『장미와 칼날』, 『크리스마스 전야』, 『그 바다엔 낙타가 산다』, 『인베이더』, 『그들 그리고』, 『악마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