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꿈꾸던 그날인가 - 98편의 짧은 소설 같은 이향아 에세이
이향아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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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이미 문단에서 중견 작가인 이향아의 작품집을 처음 읽는다. 독자의 독서 부족과 편식 탓으로 생각한다. 독서도 많이 하지 않았지만 소설을 많이 읽었지 수필이나 시는 적게 읽었다는 이야기다. 이 책 『오늘이 꿈꾸던 그날인가』는 제목이 정말 마음에 쏘옥 들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매일을 꿈처럼 살아간다는 느낌을 주는 제목이어서 그렇다. 독자도 나이의 무게를 느끼는 세대여서인지 최근 들어 소박한 행복을 바라며 살아가는 이야기가 쓰인 책을 많이 읽는다. 예전에는 큰 스케일이나 무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었었다. 이 책 몇 페이지를 들춰보며 예전에 독자의 편향된 독서가 작가 이향아를 만나기 어려웠다는 데 스스로 인정된다.

시인이자 수필가인 저자의 간결하고 유려한 문장에서는 따스함과 감미로움이 녹아 있다는 출판사 측 소개글도 공감한다. 이 책의 에세이들은 짧은 소설처럼 재미와 감동이 연속된다. 한 번 손에 잡으면 쉽게 손에서 놓치지 않고 읽을 수 있다. 쉽게 읽히고 내용도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감동을 받을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책 98편의 에세이 속에는 저자의 삶에서 얻은 아름다운 지혜가 섬세한 언어로 한 편 한 편이 모두 다른 광채로 빛나고 있다.

인생에 대한 사랑과 배려와 소망을 담고 있는 에세이는 저자의 내면이 현실적 요소와 함께 결합되어 드러남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준다. 또한 아름다운 문체와 언어의 선택이 돋보이는 이 책에는 명징하게 직조해낸 삶의 편린들이 혹은 노래하듯이 담담하게, 혹은 절규하듯이 다급하게, 혹은 흐느끼듯이 절절하게, 독자들에게 공감과 감동을 선물할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는 책 앞 부분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출간 소감을 냈다. 삶과 행복의 원천이 어디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저자만의 일상이 그대로 담긴 말이다. “내 인생은 하루하루의 평범한 생활입니다. 특별히 포장되어 장롱 속에 보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하는 손바닥 안에, 바삐 뛰는 신발 속에 있는 인생, 그것은 땀과 피와 눈물로 절어 있습니다. 내 글은 겨우 그렇고 그런 삶의 기록입니다. 길게 늘여 쓰지 않았습니다. 혹은 노래하듯이 담담하게, 혹은 절규하듯이 다급하게, 혹은 흐느끼듯이 절절하게. 큰 뜻을 역설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살아있는 숨소리처럼 담겨 있을 것입니다. 돌아다보니 나는 늘 ‘이다음 어느 날’로 기쁨을 미루며 살았습니다. 내가 그리워하는 백조가 지금 어느 하늘을 날고 있는지 궁금해도 참고 견뎠습니다. 자욱하던 강 언덕에 안개가 걷힐 때, 소나기 그치고 무지개가 뜰 때, 나는 생각하곤 했습니다. 혹시 오늘이 내가 꿈꾸던 바로 그날이 아닐까. 나는 오랫동안 이날을 기다리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오늘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겠습니다.”(p.5~6)

이 책은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한 의미 없이 98편이나 되는 글을 한 줄로 나열하기보다 중간중간 쉴 틈을 주기 위해 적당량씩 묶어 가른 듯하다. 계절별도 나누지 않았고, 각 부의 제목도 따로 붙이지 않았다. 각 에세이에 모두 제목이 있기에 분류할 때 또 다른 제목을 붙여 구속하고 싶지 않았나보다. 아니 어쩌면 삶이 그렇듯 열심히 살다가도 가끔씩 한 번쯤은 쉬고 뒤돌아 자신을 성찰하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휴식을 독자들에게 선물하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어느 날 수선화 한 뿌리에서 찾아낸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 오기도 한다. 베란다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치우면서, 모아 놓은 비닐봉지를 버리려는데 밑바닥으로 '툭' 하며 떨어지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 보통 사람들의 어느 하루를 보는 듯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했다. 쪼그라진 수선화 뿌리였다. 언제 보관해 두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저자는 수선화 뿌리는 그곳에 보관되었던 게 아니라, 유폐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긴 겨울 어둠 속에 갇혔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툭' 하는 신음을 내지르며 밖으로 튀어나온 꽃 뿌리. 이걸 보며 저자는 미안함과 염치없음, 그리고 일종의 수치심 등 복잡한 마음이다. 이때의 수치심은 '화를 대신한' 것이라고 해도 맞을 것이라고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저자의 모습이 얼마나 고운지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이를 유리병 속에 담갔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뿌리 바로 밑까지 물을 채웠다. 물속에 넣어 둔 수선화는 샛노란 꽃을 탐스럽게 서둘러 피워냈다단. 꽃숭어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꽃대가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구부러지고 하면서. 그리고 지켜보던 저자가 말한다. 오늘이 닷새째인데 날마다 잎이 새로 돋는다. 나는 그를 볼 때마다 아이 낳고 몸조리도 못 하는 산모를 보는 기분이다. 그를 어떻게 해서라도 보살펴 주고 싶은 마음이지만 나는 겨우 볕 좋은 베란다에 내놓을 뿐이다. 이 짧은 글 속에서 독자들은 수선화를 상상하고 무심결에 발견한 저자의 애정어린 눈길과 손길을 영상 보듯이 떠올릴 수 있다. 동영상처럼 내용이 길지 않고 오히려 한 컷의 일상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저자의 일상과 감동, 그리고 고운 마음씨 등 모든 것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저자는 '숲'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숲'이라고 한 다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정결한 고요에 잠기고 싶다. 숲이라는 말에서는 청량하고 깨끗한 바람 소리가 난다고 한다. '숲'이라고 할 때의 'ㅅ'은 산, 시, 사슴, 새, 수채화, 사립문, 숨결, 사람, 시내, 솔바람 같은 명사들과, 살아가다, 속삭이다, 시작하다, 사랑하다, 사무치다, 섬기다와 같은 동사와, 순수하다, 수수하다, 순결하다아 같은 형용사의 첫소리가 된다고 설명한다. 또 '숲'의 가운뎃소리 'ㅜ'는 밖으로 퍼지지 않게 아늑한 그늘과 무게를 실어주며, '숲'이라고 할 때 입모습이 안으로 모아지는 것도 오붓한 숲의 모습을 닮았다고도 말한다. 이 때문에 저자는 숲은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모여 이룬 나무들의 마을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얼마 전에 급작스럽게 조성된 마을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전설, 위아래의 질서가 유서 깊은 마을이라고 숲의 의미를 풀어낸다. 사람들이 늘수록 세상은 소요와 번잡에 싸이지만 나무들은 여럿이 모여들수록 더욱 은밀하고 깊어진다고 자연의 순리를 칭송한다.

저자의 사유는 숲을 거닐 때면 발밑에서 부서지는 낙엽 소리조차 너무 커서 조심스럽다는 숲을 걸어갈 때의 느낌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만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각이 깊고 지혜로우며 인자한 사람일 것이라고 의견을 꺼낸다. 어쩌면 공자의 '지자요수 인자요산'란 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독자의 지나친 추측일까? 아무려면 어떻겠는가? 저자의 다음 문장은 독자의 지나친 생각만은 아닐 것이란 뜻으로 해석된다. "봄내 여름내 태양을 사모하다가 가을이면 다소곳이 발아래 잎을 떨어뜨리고 묵상하는 나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제가 서 있는 자리에서 거기를 비옥하게 하는 숲. 숲은 홀로 솟으려 하지 않고, 함께 일어서서 어우러진다. 숲의 시선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p.69)

 


 

'침묵'에 대한 저자의 이해는 특별하게 느껴진다. 「침묵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에서 저자는 침묵처럼 강렬한 거부는 없다고 단언한다. 침묵은 무관심의 표현이며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표시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침묵은 상대방을 철저히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몸짓이다. 특히 남성의 침묵은 인격과 유사한 것으로 치부했었다. 꾹 다문 입으로 확실하지 않은 일은 언급하지 않고 반드시 해야 할 자리에서 일갈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은 우리의 일상에서 남자 특히, 말로써 남을 비방하거나 또는 실언으로써 자신을 망치는 '설화'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말에 동조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 책에 글 한 줄을 더했다. 이 글의 제목이 「침묵은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다」인 이유다.

침묵해서는 안 될 자리에서 침묵하는 사람을 경계하는 이유가 저자에게는 있는 듯하다. 얼마나 답답하고 속 터지는 일인지, 생각이 없을 때도 침묵하고, 적절한 말을 몰라서 침묵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좋은지 모를 때도 침묵하는 사람 말이다. 줄곧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 중에는 다수의 언중과 의견이 다른 사람도 있다. 어설프게 나는 생각이 다르다고 표명했다가 공연히 누군가를 섭섭하게 하거나 뒤가 시끄러워질까 봐, 침묵할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눈치껏 처신하는 것이다. 침묵하는 사람 중에는 상황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거나 이견을 선명하게 발표할 언변도 능력도 없어서 침묵하기도 한다. 저자가 이들을 경계하는 이유가 다른 글과 달리 일상에서 일어난 특정 일을 사례로 들지 않는다. 모두 웃을 때 웃지 못하는 것처럼 아무도 웃지 않을 때 혼자 히죽거리는 것도 정상이 아니다. 혹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빤히 알아도 입을 다물고 되어가는 꼴이나 보자고 그러는 사람도 있다. 이런 태도는 얼마나 이기적이며 무책임한 태도인가. 그것이 지나치면 사뭇 잔인해질 것이다. 사례가 분명하지 않은 일에 저자의 의견을 보이는 이 글은 아무래도 세태 즉, 이기적인 사람이 많고, 자신의 이익에만 나서는 기회주의를 경계하는 말이 아닐까 독자는 생각해 본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를 보고 나오면서 그가 왜 위대한가를 생각해보았다. 소설이건 영화건 제목은 편의상 지을 수도 있는데, 왜냐고 캐묻다니. 개츠비가 위대하여서 〈위대한 개츠비〉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영화는 전에도 한 번 보았는데 오늘 다시 보고 싶었던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깡그리 잊어버렸는데도 여운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연 배우도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달라서 사뭇 낯설었다. 전에는 개츠비의 캐락터가 갱이나 마피아단의 두목처럼 보였었다. 그래서 전체적인 흐름이 어둡고 무거워 영화관을 나오면서 개츠비에게 위압감 같은 것을 느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위압감과 전혀 다른 연민이다. 개츠비의 역할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가 달라진 것이다.(p.279~280) - 「그는 왜 위대한가」 중에서

 

저자 : 이향아

 

충청남도 서천 출생. 1963~66년 [현대문학] 3회 추천을 완료하여 문단에 올랐다.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첫 시집 『황제여』를 시작으로 『강물 연가』, 『껍데기 한 칸』, 『동행하는 바람』, 『살아있는 날들의 이별』, 『오래된 슬픔 하나』, 『환상 일기』, 『화음』, 『온유에게』, 『별들은 강으로 갔다』, 『안개 속에서』 등 24권을 발간했으며, 수필집으로 『쓸쓸함을 위하여』, 『하얀 장미의 아침』, 『불씨』 등 16권, 문학이론서 및 평론집으로 『창작의 아름다움』, 『시의 이론과 실제』, 『삶의 깊이와 표현의 깊이』, 『우리 시대 이향아의 시 읽기』 등 8권, 영역시집 『In A seed』, 한영대조시집『By The Riverside At Eventide』를 펴냈다. 시문학상, 한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창조문예상, 아시아기독교문학상, 신석정문학상 등 수상했다.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문학의집·서울 이사, 호남대학교 명예교수로 활동 중이다.

담시집譚詩集인 『캔버스에 세우는 나라』는 세속적인 가치를 비판하고, 이 비판적 사랑을 통해 순수한 향기와 빛깔로 세워진 고용한 궁전과도 같은 나라라고 할 수가 있다. “살고 싶은 나라 하나 세우는 일, 죽어서 묻힐 나라 세우는 일, 반역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 숨어서 몰래 모반하지도 망명도 하지 않고, 원하던 나라 하나 비밀처럼 세우는 일”이 이향아 시인의 캔버스에 세우는 나라』일 것이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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