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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탐구 생활 - 완벽주의와 자기의심에 대하여
사월날씨 지음 / 왼쪽주머니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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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수치심 탐구 생활』은 「완벽주의와 자기의심에 대하여」란 부제를 갖고 있다. 저자에 〈에세이〉란 글의 분류까지가 제목에 포함되어 있다. 빨간색 표지에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란 제목의 '프롤로그'의 문장을 제목 글씨 못지 않은 크기의 활자를 전면에 검은색 글자를 가득 채웠다. 칵테일잔에 담긴 술, 인형인 듯한 금발여성도 표지에 조그맣게 사진이 들어가 있다. 남성은도 한 명 있는데 칵테일바 바텐의자에 앉은 모습의 그림도 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가 다르고 부적절하고 부족하다고 느낀다." 이리저리 생각해봐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여성성을 강조한 것처럼 보인다. 거기에 에세이라니 일상의 단상(斷想)인 듯하다.
저자 '사월날씨'는 필명인 듯싶다. 젠더 갈등과 여성의 수치심에 관한 생각을 더해 페미니즘적 관찰이 아닐까 예상하기 쉽다. 더욱이 저자는 책 속 '수치심'을 설명하는 글에서 "모임에서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나는 먼저 입을 떼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면 그제야 그 의견에 덧붙이거나 변형해 내 의견을 내놓는다. 혹시 내가 영 딴소리를 하는 거면 어떡해.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화장을 안 해도 브래지어를 안 해도 괜찮은데 잠깐, 눈썹은 다듬었어야 하나? 친구가 나를 탈코르셋을 실천하는 여성으로 보지 않고 그냥 지저분한 사람으로 여기면 어쩌지? 수치심은 일상 속에 포진되어 있다가 문득 교묘하게 일어나 자아를 갉아먹는다. 수치심을 가진 사람은 못난 사람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동시에 갖는다. 수치심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자괴와 고립과 평가의 땅이다. 타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차가운 내면의 시선이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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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수치심을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다만 학교 다닐 때 배웠던 맹자의 사단(四端)의 하나인 '수오지심(羞惡之心)' 정도로 뜻을 이해하고 지내왔다. 수오지심이란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배운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때 선생님의 가르침이 큰목소리로 따라 복창하라고 해서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 같다. 성선설을 주장한 맹자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것. 맹자는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고까지 수오지심을 강조했다고 한다. 맹자는 의(義)가 수오지심으로부터 비롯된다고도 가르쳤다고도 들었다.
이에 비해 저자 사월날씨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수치심은 일상적이고 친밀한 감정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건전하고 생산적인 수치심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고 과도하며 내면화된, 그리하여 성격처럼 고정되어 버린 수치심에 대해 이 책에서 탐구한다고 설명한다.
저자에 따르면 수치심은 자신의 불완전함에 대한 깊은 불안이다. 자신이 세상과 타인과 묘하게 어긋나 있는 느낌이자 나라는 존재가 충분하지 않다는 인식이다. 수치심은 어느 부분에서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을 바탕에 두고, 그 완벽을 충족하지 못한 자신에게 불안과 자책을 안겨준다. 그렇기에 수치심의 탐구는 완벽주의와 자기의심에 대한 고찰이 된다. 맹자가 말한 수치심과 저자가 말한 수치심이 겉으로는 달라 보인다. 그러나 책을 읽어가며 독자의 책에 대한 그닥 탐탁지 않았던 독자의 생각이 완전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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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로서는 저자와 저자의 책을 이번에 처음 접하지만 저자 사월날씨는 여성의 삶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드러내 온 에세이스트로 이미 널리 알려진 분이라고 한다. 심리학을 대학원까지 공부한 분이라고 한다. 전작 『결혼 고발』, 『서른에 얻은 말과 버린 말』로 이미 저명한 에세이를 썼다. 특히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고통스럽게 들여다보며 쓴 책이다. 자신의 수치심이라는 특정한 심리적 상태를 탐구해 나가는 이 과정은 심리학과 문학의 경계에 서서 에세이라는 장르의 특성을 탁월히 활용하고 있다고 출판사 측의 소개글도 저자와 책을 잘 설명했다고 공감한다. 상처를 드러내고 살점을 베어낸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또한 마침내 용기 내어 자신의 수치심을 들춰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모르는 걸 아는 척할 때, 모르는 걸 필사적으로 숨길 때, 수치심은 바로 그럴 때 생겨난다고 저자는 이 책에서 말한다.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과 함께 부족함을 드러내면 내쳐지고 말 거라는 불안이 수치심을 키운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모두 5장(章)으로 이뤄졌다. 1장에서는 자신을 구성하는 수치심의 기원을 탐구하고, 2장에서는 수치심이 어떻게 스스로를 괴롭게 하는지 그 영향과 증상을 분석한다. 3장과 4장에서는 수치심을 증폭시킨 사회적 요인들을 고찰하고 5장에서는 마침내 수치심이 해소되거나 수치심과 공존하는 삶에 대해 다룬다. 이 책은 내면의 강렬한 수치심을 기록한 연구서이자 수치심 탐구의 철학서이다. 저자의 수치심 탐구를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의 수치심도 양지로 나와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보송보송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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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수치심 탐구는 적지 않은 기간 이뤄져왔지만 오직 한 길로 걸어왔던 탓에 탐구의 깊이가 놀랍다. 또 심리학이라는 학문적 접근에서 시작했지만 심리학의 성격 탓인지 철학적 사유도 만만치 않음을 책 곳곳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작가로서의 길을 걸어왔기에 문장의 유려함이 탁월하다. 다만 학문적 탐구 영역이어서인지 문장이 가끔 너무 길게 늘어지는 일이 있어 독서에 약간의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일부 몇 문장일 뿐이어서 불가피해서인지도 모르겠다. 독자가 심리학은 입문도 한 적이 없고 여타 학문과도 거리를 둔 지 오래돼서 쉽게 이해하지 못한 탓일 수도 있다. 저자의 문장 수업은 한두 해가 아니었을 텐데 감히 독자로서 저자의 글을 논하거나 지적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각 문장의 구조가 더 짧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저자에 대한 투정으로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그 점만 아니라면 잘 쓴 영문 에세이를 최고의 번역가가 해놓은 것처럼 유려한 문장들이 어려운 단어들이 많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서 내심 부러움도 있었다는 점을 덧붙인다.
저자는 「마트료시카의 가장 깊숙한 곳」이란 제목의 '서문'에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수치심의 실제에 접근하려 모색한다. 얼마 전 새로 얻은 사무실의 확정일자를 안 받았다는 사실을 집주인의 문자를 받고 깨달아 평소 '완벽'을 추구했던 자신의 이미지에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놓는다. 이는 사실 단순 실수나 순간적인 착각일 수 있는 일이지만 저자에게는 이 사실이 창피함과 민망함을 넘어선 강렬한 감정이 올라왔다. '화'였다고 단정한다. 자신을 향한 감정이겠지만, 부정적인 감정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순식간에 퍼져나간다. 소식을 전해준 집주인에게 왠지 모르게 화가 났고 전입신고를 처리하는 동안 확정일자도 받지 않겠냐고 물어봐 주는 오지랖을 부리지 않은 주민센터의 이름 모를 직원에게까지 중구난방으로 화가 뻗친 감정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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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란 자각이 곧바로 왔지만 감정은 계속해서 저자를 가두었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난 걸까' 독자의 생각에는 누군가 그 문제를 들춰내 자신을 몰아세운 것도 아닌데, 일반 사람이라면 '수치심'까지 들 정도의 사안은 아니어서 금세 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른바 완벽을 추구하는, 자신은 그래왔다는 '결벽적인 성격' 탓 아닐까 하는 게 독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여기서 누가 지적하진 않았지만 이 감정이 왜 오래갔는지에 대해 성찰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책 『여성의 수치심』을 인용한다. 그 책은 분노를 수치심의 '감정적 대체물'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는 은근슬쩍 자신을 다른 모양으로 둔갑시켜 알아채기 어렵게 만드는 게 수치심의 고약한 성질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껍질을 벗겨 보아야만 겨우 알아채기 마련이라, 수치심을 다루기 위한 여러 단계 중 '인식'이라는 첫 단추부터 끼우기 어렵게 만든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치심 때문에 갖게 되는 감정들은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다종 다양하게 나타나서, 저자의 경우 얼어버리거나 먼지처럼 작아지기도 하고,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괜스레 상대를 미워하기도, 끝없는 자책이 따라붙기도 한다고 털어놓는다. 저자의 수치심은 때에 따라 교묘하게 옷을 바꿔 입고 부정적인 감정들의 핵심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웅크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건드려지면 불쑥 나타나 온몸의 혈관을 타고 재빠르게 흘러 저자를 지배하고 마비시킨 뒤 알아챌 틈도 없이 다시 저 깊고 어두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틀어박힌다. 표현이 조금 현학적이고 영문법적이지만 어딘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어느 날 문득 솟아오르거나 매일 오후 해질녘이 되면 불현듯 떠오르는 감각이 아니라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저자의 설명은 하나의 목각 인형 안에 크기가 차례로 작아지는 인형이 끝없이 들어 있는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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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모임을 앞두고 심란한 마음을 예로 든다. ‘모임이 취소되었으면 좋겠어’라고 적힌 커다란 마트료시카를 앞에 둔 상황이다. 마트료시카를 열어본다는 건 마음을 열어본다는 뜻이다. 그 안에는 한 사이즈 작은 인형이 들어 있어 ‘그 모임은 어딘가 불편해’라는 마음이 적혀 있다. 뭐가 불편한지, 왜 그런지, 계속 파고들다 보면 마지막으로 가장 작은 마트료시카, 더는 열리지 않는 핵심 마트료시카가 어둡고 깊숙한 곳에서 ‘나는 그들과 어울리지 못해. 나는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라고 쓰여 있는 채 발견되는 일이 바로 수치심을 가진 사람의 내면이다. 겉마음과는 영 딴판인 것이다. 모임이 꺼려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다. 하지만 일상의 더께에 파묻혀 둔감해진 상태로는 마트료시카를 열어볼 생각을 못한 채 그저 모임이 취소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실은 받아들여지고 싶은 욕구가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방어하고자 꺼려지는 마음이라는 옷을 입으니, 그들을 멀리하기 때문에 영영 친해질 수도, 받아들여질 수도 없는 아이러니가 연출된다.
비극의 시작이 수치심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괜한 자신의 게으름이나 무기력, 부족한 사교성이나 친화력, 혹은 나쁜 경우에는 상태를 탓하면서 점점 고립된 상태가 된다. 수치심이 저자를 데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자괴와 평가와 고립의 땅이라고 단언한다. 들킬까 봐 늘상 불안한 곳, 그곳에는 잘하는 걸로 자신을 증명해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못난 사람이 되는 걸 견디지 못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둘 다 갖는 사람이 산다.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수치심을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나를 납득시켜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인 사람이 가면을 쓰고 수동적으로 굴며 거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감정이나 욕구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익숙지 않아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가 편안하지 않으며 소속감을 느끼기 어렵다.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겁먹어 있다. 이 모든 게 자신만의 문제이며 그러므로 혼자 견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수치심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이다. 그곳에 저자가 산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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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수치심의 모든 것을 이 책에 서술한다. 독자는 '수치심'에 대한 책도 읽어보지 못한 채 이 책으로 수치심을 모든 것을 알아버린 느낌이다. 그만큼 이 책은 일목요연하고 세밀하게 수치심의 모든 것을 밝혀내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수치심이 찾아내기 어려울 만큼 자아에 들러붙어 있는 건 자의식과 밀접하게 연관된 탓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도한 자의식은 수치심의 토대가 된다. 타인의 눈에 비친 나를 의식하는 마음, 세상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 끝없이 두리번거리는 마음이 비교와 평가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수치심을 간직한다는 건 다소 오만하고 위태로운 일임을 저자는 경계한다. 남을 무시해야 내 자리를 만들 수 있는 혐오와 경쟁의 시대에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수치심을 안고 살아간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아니 에르노가 『부끄러움』에 쓴 것처럼 "부끄러움에서 가장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나만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믿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을 쉽게 나누지 못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끈질지게 연구하고 사유하고 경험하며 물고 늘어진 '수치심'은 존재에 관한 지속되는 수치심, 과도한 수치심, 내면화된 수치심이다. 결코 일시적으로 생겨났다 사람지는 수치심, 상황에 따른 수치심, 혹은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만한 건전한-자기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생산적인-수치심은 아니다. 독자들의 독서목록에 이 책을 넣어둘 것을 권유한다.
우리는 뭐든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여자다운 여자가 되어야 하는 과제를 받아 든다. 여자다운 여자란 무엇이든 되려고 나서고, 돌진하고, 주관을 갖고 밀어붙이고, 탐험하고 깨지고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성나게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래도 아니다. 여자에게 좋은 직업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놓고 그것은 제한이 아니라 너를 위해 좋은 것이라고 포장한다. 무엇이든 해보라고 말하면서, 실패했을 때는 더 가혹한 비난을, 성공했을 때는 덜 화려한 상찬을 내린다. 앞길을 닦아줄 생각은 없이 그저 뒷짐을 진 채 진정으로 원한다면 어떤 방해물도 헤치고 나아가야 하는 거라고 내게로 책임을 넘길 뿐이다. 모름지기 여자란 잘남을 현명하게 숨겨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되기를 진실로 격려받을까? 너무 똑똑하고 잘나가는 여자는 악바리이거나 독한 것, 잘난 척하고 거만하고 재수 없다고, 남자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인생의 한쪽에만 치우쳐서 다른 것을 놓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디까지 마음껏 뻗어나갈 수 있을까?(p.162)
저자 : 사월날씨
심리학자, 에세이 작가. 대학원에서 연구하던 중 자기애 성격의 특성인 수치심이 어떻게 진로 발달을 방해하는가에 대한 심리학 논문을 썼다. 여성의 일과 관계, 자아에 관해 탐구하고 글을 쓴다. 지은 책으로 《결혼 고발》, 《서른에 얻은 말과 버린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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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