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자 안전가옥 앤솔로지 10
최현수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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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는 일상에서 페르소나(persona)란 단어를 자주 쓴다. 원래 ‘인격’ ‘위격(位格)’ 등의 뜻으로 쓰이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본디 연극배우가 쓰는 탈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점차 인생이라는 연극의 배우인 인간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고 두산백과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점점 쓰임새가 확대돼 철학용어로는 이성적인 본성(本性)을 가진 개별적 존재자를 가리키며, 인간·천사·신 등이 페르소나로 불린다. 즉, 이성과 의지를 가지고 자유로이 책임을 지며 행동하는 주체를 말한다. 또 신학용어로는, 의지와 이성을 갖추고 있는 독립된 실체를 가리키며, 삼위일체의 신 곧, 제1 페르소나인 성부(聖父), 제2 페르소나인 성자, 제3 페르소나인 성령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의학, 심리학, 마케팅에서도 이 말을 차용해 쓴다고 하니 우리 일상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이중생활자가 페르소나를 쓴 우리 중의 한 명을 표현하지 않았나 싶어서 든 독자의 생각이다.

이 책 『이중생활자』는 비밀스럽고, 종잡을 수 없고, 아슬아슬해서 매력적인 캐릭터가 중심인 엔솔로지 소설집이다.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과 종합 콘텐츠 플랫폼 〈왓챠〉가 함께 진행한 스토리 공모전에서 찾고자 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모두 2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심사 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최종 당선작 속의 주인공들은, 뜻밖의 정체에 흥미를 품은 독자들의 눈길을 마지막까지 붙잡는 각양각색의 활약상을 이 책에서 보여 준다.

스파이라는 전형적인 이중생활자가 등장하는 밀리터리 드라마 「열일곱, 여름, 전쟁」이 소설집의 문을 연다. 이 작품은 명국(明國)의 군인인 '영'은 비밀리에 암국(暗國)의 특수 용병 훈련소로 파견된다. 암국 전력의 핵심인 ‘데이터 디스펜서’들을 최대한 많이 죽이기 위해서다. 영은 자신의 몸속에 도시 하나를 없애 버릴 만큼 강력한 생체 폭탄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암국의 동갑내기들과 함께 군사 훈련을 받는다.

 


 

훈련소 규칙에 의해 암국의 소년 이비와 한 팀이 된 영은 그와 사사건건 대립하면서도 서서히 마음을 열어 가지만, 영에게 예정된 미래는 머잖아 이비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는 것이다. 작가 최연수가 썼다. 비정한 딜레마 앞에 선 17세 소년들의 마음결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며, 히어로이자 공무원인 교사와 히어로를 동경하는 아이의 파트너십이 돋보이는 판타지 「드림센스」는 꿈꾸는 모두를 밝은 에너지로 응원한다. 초등학교 6학년생 '설이'의 귀 뒤에는 더듬이가 있다. 더듬이가 생긴 뒤로 설이는 다른 사람의 꿈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설이가 갖게 된 능력을 알아차린 또 다른 감각자, 설이의 담임 화식조는 감각자들이 꿈을 먹는 자들인 ‘두억시니’에 맞서 오랜 세월 동안 싸워 왔음을 알려 준다. 두억시니는 밤에 꾸는 꿈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희망, 기억에 감정을 담는 능력까지 앗아 간다. 게다가 자신을 막으려는 감각자를 공격해 죽이기도 한다. 화식조가 위험하다며 말리는데도, 자신이 마냥 평범하다고 생각해 온 설이는 모처럼 얻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해 사람들의 꿈을 지키려 한다. 작가 나혜림의 작품이다.

비밀스러운 공간의 노(老)주인이 이끌어 가는 미스터리 「부귀수산」은 전직 해녀 춘단은 양식장 겸 횟집 '부귀수산'을 운영하는데, 늦은 밤에는 특별한 손님을 받는다. 무언가로부터 도망쳐야만 하는 그들이 숨기려는 물건을 건네면 춘단은 해녀다운 방식으로 물건을 감춘다. 어느 날 부귀수산을 찾아온 재연은 춘단에게 피가 묻은 음악 콩쿠르 트로피를 건네며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일주일만 숨겨 달라고 말한다. 재연의 모습에 오래전에 집을 떠난 딸을 떠올린 춘단은 트로피를 보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나 춘단의 마음은 바로 이튿날부터 흔들리고 만다. 경찰에게서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작가 김해일이 썼다.

 

 

「부처핸접」은 엄마와 딸, 저지른 자와 숨기는 자, 죄와 벌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랩 하는 스님의 고군분투를 담은 오컬트 코미디다. 이 소설은 인간이 잃지 말아야 할 가치들을 경쾌하게 되짚는다. 설악산 근처의 작은 절인 학선사에 기거하고 있는 여승 지거(知去)는 랩 연습 중이다. 치매를 앓고 있는 주지 스님이 사채업자에게 빌린 5억 원을 강원랜드에서 탕진했기에 랩 경연 프로그램 〈샤워 미 더 머니〉의 우승 상금 5억 원을 노리게 된 것이다. 심사 위원 중 한 명은 템플스테이를 하러 학선사를 찾았던 무량이지만, 그는 가발과 비니 차림에 가명을 쓴 지거를 알아보지 못한다. 게다가 학선사의 기운이 좋다고 믿어 팀 회의를 열겠다며 거듭 찾아오기까지 한다. 정체를 숨기고 무량 팀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지거는 ‘악귀 때문에 절의 결계가 약해진다’는 말을 되풀이하는 주지 스님의 치매 증세까지 감당해야 하는 신세다. 작가 전효원이 썼다.

마지막 작품은 세탁편의점 사장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늘한 추적극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릴러 소설이다. 「단골손님」은 1949년생, 세탁편의점 주인인 '나'가 주인공이다. 나는 가까이 지내던 형을 만나러 갔다가 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형의 집 뒤편에는 기이하게도 고양이들이 포개진 채 죽어 있었고, 고양이들의 송곳니는 모두 빠진 상태였다. 이튿날 손님들이 맡긴 옷의 주머니 속을 확인하던 나는 낯선 물건 안에 보관된 동물의 송곳니를 발견한다. 물건의 주인은 평소 점잖은 태도를 보여 온 단골 청년이었다. 호기심에 사로잡힌 내가 청년의 뒤를 밟기 시작하자, 청년은 내 예상대로 조용히 대응에 나선다. 이 소설은 삶의 쓸쓸한 순간들을 차분하게 응시한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주인공들을 떠나보내기가 못내 아쉬운 까닭은, 강렬한 캐릭터란 무릇 또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이산복이 썼다.

 


 

히어로의 대명사 격인 슈퍼맨은 어리숙한 기자 클라크 켄트와 동일 인물이다. 초등학생 탐정 에도가와 코난의 정체는 고등학생 탐정 쿠도 신이치다. 이들은 상반된 매력을 지닌 두 인물 사이를 오가며 다채로운 활약을 선보이고, 때때로 숨겨 온 모습을 들킬지도 모르는 위기에 휘말려 긴장감과 흥미를 유발한다. 이중생활을 하는 마법 소녀, 스파이, 괴도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오랜 세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왔다. 한 사람의 몸으로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이중생활자는 동경의 대상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또 다른 자신을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동정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들은 왜 굳이 험난한 길을 걷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들에게 그토록 끌리는 것일까? 이 책 『이중생활자』의 수록작 속에서 해답을 구할 수도 있다.

이중생활자들은 세계의 이면을 본다. 군사 스파이라는 신분을 숨기고 적국의 용병 훈련소에 입소한 「열일곱, 여름, 전쟁」의 영은 약소국 국민들이 강대국의 점령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조국에 헌신한다는 강의를 듣는다. 침략에 저항한 대가로 강제 징용된 부모를 둔 영이 잠자코 듣기에는 무리가 있는 내용이다.

작가 최현수는 「작가 후기」를 통해 "이 이야기는 전쟁으로부터 무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내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혹은 나도 모르게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위한 이아기이기도 하다. 처음엔 '이중생활자'는 특별한 직업군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소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나?라고 우리 모두가 이중생활자인 것 같다. 이중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너는 그 우유 배달부 같은 거야. 조금 다른 점이라면, 네가 우유를 배달하는 배달부이자 우유 그 자체라는 거지. 그 우유가 적어도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파괴력을 지녔지만 어떤 검역 시설도 잡아낼 수 없는 생체 폭탄이라는 점도, 그리고 그게 네 몸속을 흐르고 있다는 것도.”(p.12) - 「열일곱, 여름, 전쟁」 중에서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숨기기 때문에 '이중생활자'가 된다. 「드림센스」의 초등교사 화식조는 꿈을 먹는 자 ‘두억시니’에 대적할 수 있는 ‘감각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인 설이 감각자가 되었음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의 힘에 대해 함구한다. 「부귀수산」의 춘단은 경찰이 수사 중인 강력 사건의 전말을 짐작하고 있지만 입을 다문다. 엄마와 딸 사이의 애증을 이해하기에 발휘된 직감이다. 일단 이해하고 나면 각자의 죄와 벌을 간단히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깨닫게 되고 만다. 「부처핸접」의 승려 지거는 자신이 출연하는 랩 경연 프로그램의 진정한 목적을 알아챈 뒤 위험을 대중에게 직접 알리는 대신 다른 길을 걷는다. 이는 본인의 능력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한데, 『이중생활자』의 주인공들은 모두 과시와는 거리가 멀다. 「단골손님」의 주인공 ‘나’는 70대 노인으로, 죽지 못해 살아온 긴 시간에 대한 반동을 동력 삼아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게임의 설계자가 된다. 물정에 어두운 눈과 허술하고 느린 몸짓 안쪽에서 모험을 원하는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들은 모른다. 그러니 승산이 있는 것이다.

"젊은이가 나를 관찰하고 있듯이, 나 또한 집에 들어오면 저녁 식사를 준비하다가 도중에 TV 소리를 키워 놓고 샛문으로 나가 나만의 은신처에서 젊은이가 도사린 곳을 바라본다. 그도 나도 서로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공을 들였다. 젊은이가 관찰을 끝내고 돌아가는 시간은 일정했다. 그는 날마다 조금씩 대범해졌다.(p.332) - 「단골손님」 중에서

「단골손님」의 작가 이산복은 "독거노인이나 고독사, 동물학대 등 사회문제에 평소 관심이나 조예가 있었는지 물어오면 부끄러워진다. 나는 남들보다 아는 게 별로 없다. 다만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재미있길 바란다."는 「작가 후기」를 남겼다.

 


 

저자 : 최현수

이야기를 쓴다. 주로 소설과 희곡. 이야기가 필요한 이름들을 종이와 무대 위로 호명하기 위해 읽고 쓴다.

 

저자 : 나혜림

단편소설 「달의 뒷면에서」로 소설집 『항체의 딜레마』에 참여하였다. 장편소설 『클로버』로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했다.

 

저자 : 김해일

바다 위로 작열하고 싶다. 읽는 이에게 들이닥치고 싶다. 영원하고 싶다. 안전가옥 앤솔로지 《이중생활자》의 〈부귀수산〉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저자 : 전효원

잘 벼려 낸 칼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으며, 손에서 칼을 내려놓은 동안에는 휴대폰과 엄지 두 개를 사용하여 글을 쓴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한두 가지 정도 담아 내는 이야기를 목표로 하고 있다. 삼라만상에 다양한 관심을 두고 있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것은 많지만, 어느 분야든 깊이 파지 않는 성격으로 심도 있는 지식은 부족한 편이다. 대자연 속에서의 휴식을 즐기지만 잠은 튼튼한 지붕 아래에서 자야 하는 모순적인 취향의 소유자이다.

 

저자 : 이산복

시나리오와 소설을 습작하며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가족과 가까운 지인들은 작가 대접을 해 주었으나 사실상 육아빠로 지냈다. 막연한 앞날에 동기부여 결여로 무념무상하게 지내다 안전가옥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반전을 맞아 인생의 후반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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