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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프 리플렉스
김강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23년 2월
평점 :
우리나라도 '100세 시대'를 맞았다. 얼마 전 열풍을 일으킨 노래 〈백세 인생〉은 "육십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간다고 전해라"라고 시작한다. 이 노래 원래 제목은 〈저 세상이 부르면 이렇게 말하리〉인데 여러 번 재편곡과 개사 과정을 거치고 2013년 〈백세인생〉이라는 제목이 되었다. 이후 '백세인생'은 입소문을 타고 고속도로에서 많이 찾는 노래 1위로 올라서고 짤방까지 더해져 젊은 층으로까지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 노래가 리바이벌돼 큰 인기를 끈 것은 우리의 '100세 시대'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가요계 평가다. 우리 국민 평균 수명이 '100세 시대'로 불릴 만큼 연장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2009년 출생아 기준으로 80.5세다. 40년 전 보다 평균 수명이 약 18년 늘었다. 의학 기술의 발달로 100세 이상 인구가 머지않아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공식 선언할 무렵이었으니 추정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열풍을 가져 온 이 노래는 리바이벌된 지 10년을 버티지 못했다. 유행가라는 게 원래 일시적이긴 하지만 당시 열풍으로 미루어본다면 너무 일찍 '100세 시대'가 수면 밑으로 가라앚은 듯하다. 아직 ‘인생 100년’의 시대가 변한 것도 아니고,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수명 100년은 건강하지 못하다면 '행복이 아니고 지옥'이라는 자각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재 100세를 넘긴 사람이 많다. 불과 40~50년 전에는 꿈의 숫자였지만 현실화된 것이다. 당연한 것이지만 ‘100세 시대’라 해도 모두가 90세, 100세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90세, 100세를 맞이한다 해도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병간호를 받으면서 병석에 누워 지내기만 하거나, 치매가 되어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죽을 때 만족하며 죽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할까? 그 점을 생각해보면 수명 연장이 마냥 즐겁고 행복할 일만은 아니라는 자각심이 든다.
이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초고령 사회를 배경으로 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주어진 시간 이상의 삶을 누리게 된 미래, 노인들의 세상이 온다.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고, 노인들의 소비만으로도 부를 축적할 수 있다. 권력과 부는 죽지 않는 자들의 것, 손에 쥔 것을 내어놓지 않는 그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식들. 노인이 자식에게 말한다. “기다려라, 너도 언젠가 늙을 것 아니냐?” 자식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뿐, 노인이 되기 위한 시간 혹은 누군가의 죽음. 김강 저자가 쓴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는 우리 사회의 가까운 미래를 담고 있다. 노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소득만으로 먹고살고, 출시되는 신제품은 온통 노인을 위한 것뿐이다. 새로운 정책들은 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급급하다. 그 와중에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20, 30대는 작중의 남매인 안나와 노마처럼 재벌의 마이걸이 되거나 노인들에게 나라에서 지급하는 로봇을 수리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노인이 되기까지 남은 30~40년이 까마득하다. 그런 노마에게 한 노인이 말한다. "자네도 언젠간 늙을 거 아냐?"
필립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아버지 만식의 그늘에 가려 오십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경영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인호는 이십여 년째 아버지의 지역구 영산시를 관리하며 정계 진출을 꿈처럼 간직하고만 있다. 어느 날, 만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의문투성이인 죽음을 뒤로 한 채 필립과 인호는 각자의 야망을 위한 계획에 시동을 건다.
김강 작가는 장편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에서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미래 사회의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 노인들만 대상으로 사업을 해도 최대 재벌이 될 수 있는 기업인, 노인들을 위한 로봇을 수리하고, 수명 연장을 위한 인공 장기 밀매를 벌이는 청년들이 노인만을 위한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
소설 『그래스프 리플렉스』 속에서 노인들은 나라에서 주는 소득만으로 먹고살고, 출시되는 신제품은 온통 노인을 위한 것뿐이다. 새로운 정책들은 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급급하다. 그 와중에 아직 노인이 되지 않은 20, 30대는 작중의 남매인 안나와 노마처럼 재벌의 마이걸이 되거나 노인들에게 나라에서 지급하는 로봇을 수리하면서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노인이 되기까지 남은 30~40년이 까마득하다. 그런 노마에게 한 노인이 말한다. "자네도 언젠간 늙을 거 아냐?" 노마는 노인들을 가리켜 "신 같다"라며 한탄한다. 노마는 여동생 안나가 만식의 아이를 가졌을 때, 인생의 큰 비극이 닥쳤다고 생각하고 분노하지만 앞으로 노마에게 벌어질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다. 저자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사회의 거대한 힘을 다뤄왔고, 이 작품에서도 인간을 특정한 방식으로 살게 만드는 이야기를 꺼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필립은 영원히 살려고 하는 아버지 만식의 그늘에 가려 오십이 넘는 나이가 되도록 경영 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만식은 늘 주변인들에게 '아직 경험이 부족한 2세에게 경영권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인호는 이십여 년째 아버지 영권의 지역구 영산시를 관리하며 정계 진출을 꿈처럼 간직하고만 있다. 인호가 정계에 진출하겠다고 영권에게 말하자, 영권은 아들에게 평생 정계 진출을 하지 못하도록 못박는다. 어느 날, 만식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며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권은 자신의 후원자가 당한 의문투성이인 죽음을 발판 삼아 정치적인 퍼포먼스에 열을 올린다. 필립과 인호는 노인 세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필립에게 안나의 일을 따지러 온 노마는 필립이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필립은 노마에게 좋은 일자리를 소개해주고, 노마는 필립이 안나와 안나의 아이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이들은 노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한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마땅히 내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지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힌다. 만식과 영권, 필립과 인호, 노마와 안나가 모든 것을 불태워 부딪히고 난 후, 이들에게는 만식이 남긴 한 마디만 남는다.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 2025년에 초고령화사회에 진입한다. 소설 속 영산시와 같은 지방 도시는 이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기 시작한 지 오래다. 저자의 소설은 이러한 현실을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 겪어보는 사회에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소설에는 우리에게 펼쳐질 미래의 단서가 숨겨져 있다.
저자는 책의 뒷 부분에서 「작가의 말-묻습니다」를 통해 초고령화 시대를 눈앞에 둔 우리들이 묻는 질문을 대신 하고 있다. 소설의 초고를 쓴 지 5년 만에 세상에 내놨다고 말한다. 저자 자신이 소설에서 하려는 말에 대해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용감하지 못한 탓도 있다고 털어놓는다. 물을 용기. 이제야 소설로 출간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로서는 이 시점에 내놓지 않으면 시기를 놓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란 예상이다. 저자는 "용기를 주는 사람들이 꽤 곁에 있기 때문"에 출간했다고 말한다. 지금이나 5년 전이나 세상이 바뀌지 않은 듯,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듯하다는 판단이 내려진 때문이란 속내를 드러낸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무엇을 묻고 있는 것일까? 따지지 말고,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냥 좀 따라오라는 사람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밝힌다. "하고 싶은 말을 어찌 다 하고 살아"라는 사람에게는 저자는 이런 답을 내놓는다. "말은 해봐야지, 물어보기는 해야지. 듣는 이 없으면 크게 소리를 내어보기도 해야지. 답하는 이 없으면 어떻게든 남겨 기억이라도 해야지."
이 소설은 여덟 개의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가질 것이다」, 「노송(老松)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찰 영(盈)에 돌아볼 권(眷) 길 영(永)에 권세 권(權)」, 「마이걸」, 「올림퍼스의 노예들」, 「그 길밖엔 없어」, 「바닥에는 검은 진흙이」, 「누구나 마땅한 일을 하는 겁니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인공 장기에 관한 시술자와 치료자, 그리고 혜택자의 관계를 유대 관계를 보여준다. 돈 때문에 시술하고 치료를 해주는 의사(이 교수), 돈으로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재벌급 인물(만식)이 등장한다.
“갑자기 기계가 멈추고 그런 일은 없겠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제품이라 신경 쓰이는데.”
코디네이터는 인공 폐를 개발한 회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었다.
“그럼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환자가 다른 이유로 사망하는 일이 생겨도 인공 폐는 혼자 숨 쉬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아무튼, 지독한 노인네야. 그렇지 않아? 저 밑에서 일하지 않는 게 다행이지.”
이 교수는 만식의 몸에서 작동하고 있을 인공 심장과 인공 간, 인공 폐 그리고 인공 신장을 떠올렸다. 쉽게 죽지는 않겠어. 이 교수는 혼잣말을 했다.(p.10~11)
가까운 미래 소설 주요 등장 인물들로 꽉 찬 세상은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면 지옥처럼 살벌하다. 인간의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 가장 중요 주제이지만 그 욕망을 빌붙어 사는 사람들의 행태도 볼 만하다. 어느 정치인은 노인들의 표만으로도 정권이 유지될 수 있다고 믿고, 노인들만 상대하는 것 만으로도 재벌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기업인도 있는 세상이다. 또 노인들을 위한 로봇을 개발하고, 수명 연장을 위한 인공 장기 밀매를 벌이는 청년들이 노인만을 위한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면 아날로그 감성으로 보면 지옥이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노인 환자들을 위한 폐·간·심장 등 인공 장기들도 자유로이 쓰여지는 세상이 오더라도 사회의 근본 정신이 변화하지 않는 한 기술의 발전이 지옥행 급행 열차로 변하리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사실 위에 열거한 내용들이 인간의 욕망을 뺀다면 2023년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아닌가? 하는 데 생각이 미치니 '지옥'이란 단어가 저절로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것은 이미 책을 읽을 때부터 독자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던 단어이다. 이에 따라 20~30대 청년들은 부모님 세대가 수명이 40년씩 늘어난다면...
이 소설은 세대간 차이와 의견이 다름을 경제적인 문제를 굳이 들먹이지 않고도 부자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현재 닥친 문제에 대해 슬기롭게 이끌어가지 못할 경우 어떤 댓가를 치르게 될지 생각해보는 소설로서의 구성은 저자의 소설적 재능이 한껏 발휘된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는 것, 그렇게 나아가는 방향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다면 짚어내 보여주는 것이 소설 쓰는 전업 작가로서의 보람이라면 저자는 그 직업에 매우 충실한 능력 있는 분이다.
만식은 영원히 살기로 마음먹은 사람 같았다. 그것도 건강하게. 그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챙겼고 수명 연장과 관계된 새로운 것들을 찾아다녔다. 만식이 기댔던 것은 의학 기술이었다. 새로운 기술과 신소재를 앞세운 인공 장기 업체들은 고가의 상품을 사용할 수 있는 돈 많고 절실한 소비자가 필요했고 만식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효과적인 기술을 원했다. 새로운 기술과 소재들은 만식이 지불한 금액만큼 효과가 있었다. 만식이 여든이 되었을 때 만식의 심장과 만식의 콩팥 중 하나와 만식의 간, 그리고 관절의 일부는 만식이 태어날 때 가지고 왔던 그것들이 아니었다.(p.36~37)
영산시는 노인 복지에 있어서는 항상 다른 지역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노인들의 의료보험 본인 부담금을 지자체가 모두 부담하는 정책, 노인 전용 급식 식당의 개설, 노인용품 바우처 제도 등의 정책이 전국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었다. (중략) 영산시는 노년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노인들은 새업에서 자유로워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다녔다.(p.190~191)
저자 : 김강
부산에서 태어났다. 2017년 단편 소설 「우리 아빠」로 21회 심훈 문학상 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2020, 아시아, 아르코 문학나눔 권장도서), 『소비노동조합』(2021, 아시아), 앤솔러지 『여행시절』(2021, 아시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