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패
미아우 지음 / 마카롱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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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2대 왕 정조는 '비밀 편지 정치'의 개혁 군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300통을 묶은 것과 겉봉투 6권이 2016년 11월 16일 보물로 지정되어 '정조 어찰첩'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이 편지들은 정조가 죽기 전 마지막 4년 간인 1796년 8월 20일부터 1800년 6월 15일 사이에 신하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엮은 것이다. 이 유물은 편지가 총 300통에 달하며 겉봉투을 6권으로 장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설명에 따르면 겉봉에는 수신자인 심환지의 이름을 직접 쓰지 않았으며 심환지를 암시하는 표현이나 심환지가 살고 있던 삼청동을 언급하는 표현으로 대신하였다. 일부 편지에는 정조가 사용한 봉함 인장이 찍혀 있다. 대부분의 겉봉에는 아침, 오후, 저녁, 밤, 식후 등 편지를 보낸 시간이 적혀 있어 정확한 수신 시점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정보들은 수신자인 심환지가 후대에 남길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 내용 중에는 정조가 심환지에게 편지를 읽자마자 없앨 것을 요구한 대목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정조가 심환지에게만 비밀을 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정조가 심환지와 정치적으로 반목 관계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때로 민감한 사안을 함께 의논하는 입체적 관계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조와 편지를 주고받던 심환지는 1800년(순조 즉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여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하게 되자, 영의정에 올랐다. 원상(왕이 병이 나서 정무를 보기 어렵거나 어린 왕이 즉위할 때 왕을 보좌하던 원로대신)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스스로 세도를 진정시킬 것을 자임했다. 치적은 볼 만한 게 없지만 청렴한 생할을 함으로써 칭찬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정조의 어찰에는 편지의 구체적인 주제는 인사 문제, 산림의 여론과 동향에 대한 탐색, 상소의 처리 문제, 조정 인사들의 인물평 등 대부분이 정사(政事)와 관련된 것들이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이 책 『낭패』를 읽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어찰' 외에 표제어로 쓰인 '낭패(狼狽)'에 대해서도 뜻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랑(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고, '패(狽)'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 그 두 짐승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떨어지면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함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두 마리의 짐승은 실존 동물이 아니라 상상 속의 동물이라 한다. 이는 일의 도중에 실패하는 것,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몹시 딱한 형편을 의미한다.

‘낭’과 ‘패’는 서로 도와 공생하다가도 뜻이 맞지 않으면 심각하게 틀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낭’과 ‘패’ 모두는 걸을 수도 없고 사냥을 할 수도 없게 된다. 먹이를 사냥할 수 없으니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뒷다리가 없는 ‘낭’과 앞다리가 없는 ‘패’가 틀어져 둘 다 곤경에 빠져 있는 상태가 ‘낭패’이다. ‘낭패’가 ‘낭’과 ‘패’가 곤경에 빠져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하므로, 이를 근거로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거나 무슨 일이 어그러지다’는 비유적 의미가 생겨날 수 있다.

‘낭패’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인다. 그것도 주로 ‘보다’, ‘당하다’와 어울려 ‘낭패를 보다’, ‘낭패를 당하다’와 같은 형식을 취한다. ‘낭패를 보다’와 ‘낭패를 당하다’는 어떤 일을 도모했을 때 고약하게 꼬이거나 실패로 돌아간 경우를 표현하는 데 이용된다. “일을 그런 식으로 하면 낭패 보기 십상인데······”와 같은 표현이 아주 자연스럽다. 낭패를 보고 낭패를 당하기 전에 서로 돕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자칫 실수하여 ‘낭판(계획한 일이 어그러지는 형편)’이 떨어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낭패』는 저자 미아우의 독보적인 상상력으로 직조해낸 팩션(Faction, 팩트+픽션)으로, 역사 속 인물인 ‘정조’를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내며 사실적 기록에 다채로운 스토리를 덧입히고 있다. 주인공 ‘재겸’은 상단에서 일하던 중 대행수 길평의 계략에 빠져 살인자라는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행수를 찾기 위해 한양의 투전판을 뒤지던 ‘재겸’은 얼굴의 표정 변화로 상대가 가진 것이 좋은 패인지 나쁜 패인지 읽어내는 범상치 않은 실력으로 투전판을 휘어잡는다.

그런 특별한 능력으로 정조의 ‘비밀 편지’를 전달하는 팽례로 발탁된 ‘재겸’은 임금과 뜻을 같이하겠다는 노론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의 복심(腹心)이 진실인지 아닌지 밝혀내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하지만 얼굴의 반쪽이 마비되어 표정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는 심환지로 인해 재겸은 혼란에 빠지게 되고, 오히려 그로부터 진정으로 야심을 숨긴 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은 임금인 정조라고 전해 듣게 된다.

“자네는 그저 수많은 팽례 중 하나일 뿐이야. 야심한 시각에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겠나? 떳떳하지 못한 일. 감춰야 하는 일. 정도를 벗어나 어그러진 일.”(p.134)

이 작품은 ‘진실’과 ‘거짓’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독자들에게 ‘과연 무엇을 믿어야 할까?’라는 질문에 접근시킨다. 재겸은 진실을 알기 위해 사람들을 시켜 궁궐을 나서는 ‘팽례’들의 뒤를 몰래 쫓게 하지만 그들 모두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하거나 실종된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재겸 앞에 자신의 정체를 숨긴 의문의 사내가 나타나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하고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한다.

 

 

재겸은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낭’과 ‘패’처럼 임금의 ‘팽례’로서 마지막 임무까지 완벽히 해낼 수 있을까. 서로를 속고 속이는 급진한 상황의 연속을 통해 독자들은 왕실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음모를 추적하는 긴장감과 흥미를 느낄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고뇌했던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겹쳐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에는 정조의 가장 믿을 만한 신하이며, 대 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산 정약용도 등장한다. 정약용이 소설 전면에 부각되지 않지만, 신분의 차이가 극과 극이지만 주인공 재겸과 임금 정조가 서로를 도우며 각자의 장기를 발휘한다면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하고 나라를 보존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진 다산이기에 저자가 정약용을 배경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사실 모험 소설에서의 주인공은 대체로 극단적인 역경을 겪고 큰 원한을 품기도 한다. 특히 역사소설에서는 정치적 힘겨루기에서 밀려나 억울하게 죽은 대신의 아들 등이 주인공으로 적절하다. 이는 결말이 역사 속에 이미 정해져 있지만 그 스토리를 끌고 가는 과정에서 작가의 상상력의 무한 발휘될 시공간이 주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재겸은 어렸을 때 끔찍한 일을 겪고 내내 누명을 쓰고 떠도는 신세이다. 그 과정에서 대단한 능력 하나를 키웠는데 사람의 표정을 보고 그 마음을 읽어내는 놀라운 재주이다. 우리가 감정 변화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이들을 이른바 '포커페이스'라고 하는데 도박판에서 나온 용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러나 도박판에서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이길 수 있다고 한다. 주인공 재겸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들의 얼굴이나 상반신 근육이 보이는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 그 사람의 속마음이나 감정 동요를 알아내는, 비상한 재능의 소유자다. 소설 속에서 그는 감각적으로 결론을 내는 게 아니라 과정의 이론화까지 가능할 정도로 '표정 읽기'의 달인이다.

 


 

이 재주를 통해 형사 난제 사건을 하나 해결한 재겸은 당시 벼슬이 '참의(정3품 관직)'인 정약용의 주선을 통해 정조의 손발 노릇, 즉 '팽례'의 일을 맡게 된다. 이 과정이 무척 재미있다. 정조의 서찰을 읽는 표정, 또 거기에 대해 답신을 쓰는 품을 보고 그의 속내를 알아채는 게 맡겨진 일이다. 서신을 주고받는 상대는 대사헌 심환지(나중에 이조판서)인데, 이 소설에서 매 챕터 제사로 인용되는 구절들이 역사상 그들 사이에 실제 오갔던 편지들에서 발췌한 것들이라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앞서 언급한 '정조 어찰'이다. 정조의 편지는 내용을 읽어보면 그저 안부를 전하고 군신간의 그윽한 정을 확인하는 수단이 아니다. 거꾸로 상대의 속을 읽고 타격을 주거나 이용할 구석을 캐내는, 소름끼치는 소통 방법이다. 상례적이지만 점잖은 어투로 인사말을 나누고, 그 속에서 상대를 이용하거나 제압할 구실을 찾는 게 정치인들의 편지인 듯하다. 물론 정조만 했다지만. '길평'이라는 단주에게 끔찍한 음모의 희생양이 되어 평생을 망치다시피한 재겸은 혼자 힘으로 진상을 알아내고 재능을 키웠다는 것이지만 조금은 뜬금없는 일이어서 작품 구성의 인과성이나 유기적 구성에 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대목이다.

재겸에게도 약점은 있다. 뿌리 깊은 피해 의식 때문인지 남을 잘 믿지 못한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왜 정조를 완전히 믿지 못하고 심환지, 혹은 그 외의 당사자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지 재겸이 이해되지 않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 나오듯 죽을 고생을 여러 번 하고, 윗사람한테 지독한 배신을 당한 과거가 있기에 설득력 있는 인물 설정이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런 인물은 자신의 삶이나 운명을 단순히 운에 맡기거나 맹목적인 충성으로 일관하는 사람보다 확실히 소설 인물로는 적합하리라고 독자는 믿는다. 너무 똑똑해서 자기를 과신하다 일을 그르치는 역사 속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해 보면 소설 속 등장인물인 재겸이 훨씬 매력적이다. 다만 재겸의 인식이 정교한 기술 체계를 넘어 그 이상의 학문적 정리가 불가능하다는 점은 소설의 불완전함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는 하다.

 


 

남의 표정을 읽는 달인이라고 해서 자기 표정을 남한테 안 읽히는 데 능하지는 않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읽는 능력은 정조와 심환지가 재겸만 못하지만, 안 읽히는 능력은 두 사람이 훨씬 낫다. 아무튼 이 소설은 '정조의 비밀 편지'를 소설로 엮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뒷받침되어 우리에게 전달됐다. 독자들은 정치 이면의 술수나 이해 관계에 집중할 필요 없이, 주인공으로 내세운 재겸에 대해 더 주의를 기울이면 이 소설을 더욱 재미 있게 읽게 된다. 역사 소설을 읽는 또 다른 재미를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낭패』의 주인공인 재겸도 사람과의 신뢰에 깊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그 모습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중략)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감정에 휩싸여 원치 않는 실수를 하는 우리처럼. 오랫동안 쌓아 올린 노력이 무너지는 건 바로 그런 순간들이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 나 혼자뿐이고 주위에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라 불평하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항상 누군가가 있을 것이다. (중략) 내가 먼저 움직여야만 나의 동반자가 되어줄 ‘낭’과 ‘패’를 발견할 수 있다.(p.297~298) -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 : 미아우

 

악몽을 모으는 이야기 수집가. 독일에서 거주하던 중 공모전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7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우수상 수상작인 『크리스마스까지 100일』을 출간했다. 그 외에도 ‘2021 컴투스 글로벌 콘텐츠문학상’에 『당신의 꽃』이, 제1회 ‘창작의 날씨 서치-라이트 공모전’에 『나는 살해당할 것이다』가 당선되었다. 『낭패』로 제9회 ‘교보문고 스토리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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