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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仁祖 1636 - 혼군의 전쟁, 병자호란
유근표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3월
평점 :
얼마 전 친구들과 저녁 식사를 할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정치 한 사람이 정치 화두를 꺼냈다. 지금 정치 상황에 대한 의견들이 오가다 갑자기 다른 한 사람이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배운 한국사 중에서 가장 한심하고 무능한 최고 지도자가 누구일까?"란 질문을 했다. 각자의 의견을 한마디씩 냈다. 질문자가 '갑자기'여서 좌중이 잠시 머뭇거리다 '지금 대통령 얘기야?" 하고 되물었다. 현대사든 고대사든 한반도 5,000년사를 '통틀어' 하는 질문이라고 다시 '통틀어' 를 강조했다. 여기 저기서 한마디씩 하면서 현 대통령 이름도 섞여 나왔지만 "아직 임기 중에 판단은 곤란하니 빼자"는 말이 다시 흘러나왔다. 모두들 동의하는 듯하면서 제각기 한 사람씩 이름을 댔다. 절반의 사람이 '인조'를 꼽았다. 대개 동의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선조와 연산군, 이승만 대통령도 이름이 거론됐다. 그러나 인조라는 말에 가장 많은 이가 동조했다.
그렇다. 우리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한심한 왕이자 최고 지도자였다. 우리 친구들끼리 이야기였고 비전문가의 이야기들이라 정식으로 거론할 문제는 아니지만 인조는 왜 우리들에게 무능하다고 점찍혔을까? 광해군의 폭정을 뒤엎고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인조는 외교와 국제정세의 흐름에 둔감했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임진왜란 이후의 난세 극복이라는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못했다고 배운 바대로다. 임진왜란에 대비해 군사 등 국방력 강화에 소홀한 선조도 무능력 군주로 역사에 불명예로 남았다. 그리고 이 두 왕에는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도성(서울)과 백성(국민)을 버리고 자신만 도피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청의 갑작스러운 침략으로 속수무책 우선 몸을 피해야 했기에 백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말에는 좀 더 역사적 고증이 필요하겠지만 청의 왕에게 삼전도로 나아가 삼배구고두로 신하로서 예를 하는 치욕을 당했다. 인조는 청 태종에게 무릎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했다.
1636년이라면 우리는 병자호란으로 청에 항복한 해로 알고 있다. 이 책 『인조仁祖 1636』은 병자호란에 대해 완전히 다른 문제 인식을 제공하는 책이다. 먼저 저자는 1636년을 중심으로 조선의 내외 정세 및 대응 그리고 전쟁의 실질적 피해자인 백성들의 참상을 사료를 근거로 상세히 서술한다. 저자에 따르면 병자호란은 불가피한 전쟁이 아니었다. 이 책은 인조반정→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이르는 시간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무능한 지도자의 그릇된 인식과 판단이 엄청난 전쟁의 원인이며, 그것의 최종 피해자는 백성임을 밝힌다. 이 책은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주전파와 주화파의 허망한 논쟁보다, 인조의 삼전도의 굴욕보다 남한산성에 숨은 왕을 구하기 위해 근왕군으로 동원된 병사와 의병 그리고 백성들의 죽음,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억울한 백성들이 왜 그러한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그 원인을 추적한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막연히 조선의 3대 혼군으로 알려진 인조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오욕의 역사에서 현재를 생각하는 ‘역사의 눈’을 조금씩 더 키우게 될 것으로 믿는다.
인조반정은 병자호란의 원인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인조는 광해군의 ‘폐모살제와 명나라에 은혜를 갚는다는 재조지은을 명분으로 반정에 성공한다. 따라서 인조에게 전 정권 세력 척결과 광해군의 외교 정책 폐기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왜 그랬을까? 인조는 떠오르는 강자 후금을. 한낱 오랑캐로 규정할 뿐이었다. 더구나 인조는 명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드는 정책으로 일관해, 당시의 국제 정세를 이해하려고도 수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구체적인 첫 번째 사건이 정묘호란이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1618년 명과 후금은 사르후에서 전투를 벌인다. 조선은 강홍립을 필두로 1만 3,000의 지원군을 파견하는데, 중원 진출을 노리는 후금은 명을 치기 전에 조선을 먼저 정벌해야 할 군사적 필요성을 확신한다. 게다가 후금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명나라 장수 모문룡의 가도 주둔을 조선이 불러들인 것으로 여겼다. 따라서 어리석은 군주 인조의 시간은 정묘호란으로 그 서막을 올리게 된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은 금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을 내세우자 1627년 후금은 조선을 침입하여 정묘호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때 조선과 후금은 강화를 맺고 양국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친명정책을 취하는 조선을 견제하게 되었고 배후의 안정을 위해 조선을 굴복시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후금은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의 대등한 관계에서 군신지의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 세폐와 정병( 3만을 요구하였다. 1636년 2월 용골대·마부태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유문을 내려, 후금과 결전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자 홍타이지는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하였다. 12월 2일 청나라 홍타이지(태종)는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을 떠나,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사실을 알았고, 14일 청나라 군은 개성을 통과하여 한양 외곽에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급히 판윤 김경징을 검찰사로, 강화유수 장신을 주사대장으로,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삼아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대신 윤방과 김상용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와, 세자비·원손·봉림대군·인평대군을 비롯한 종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격문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사진출처 : 두산백과>
남한산성에 갇혀 청군의 홍이포 공격에 속수무책이던 인조는 도성 이남의 군 지휘관들에게 납서를 보내 근왕군을 동원하여 자신을 구하라고 명령했다. 병자년 12월, 삼남에서 몰려온 군사들, 의병들, 지휘관들은 혹독한 추위와 군수물자의 부족 속에서 왕을 위해 혈전을 벌였다. 남한산성에 스스로를 가두고 주전파와 주화파 놀이를 주관한 것도 인조였고, 거듭되는 패전에 스스로의 목숨을 구걸한 당사자도 인조였다. 병자호란을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에서만 원인을 찾는다면 왕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병사, 의병, 장수들 그리고 억울하게 청으로 끌려간 수십만 명의 백성들의 역사적 한(恨)은 여전히 방기되고, 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은 남지 않을 것이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죽고 얼어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인조에게 항복 조건으로 청이 내세운 요구 조건은 나라와 백성 전체를 자신들에게 내놓으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어쩌면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실록에는 언급돼 있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하층 백성들의 의견이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의 예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정조·동지·천추·경조 등의 사절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과 혼연을 맺어 화호를 굳게 할 것, ⑧ 성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1639)부터 일정한 세폐를 보낼 것 등이다.
저자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기록은 없다. 그럼에도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며느리 강빈을 사사하고 손자들을 제주도로 귀양보내어 죽게 내버려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포로였지만, 명의 멸망을 직접 경험했고 청 제국의 복잡한 정세와 아담 샬을 통해 발전한 서양의 과학 문명을 학습했다. 그는 혼군의 시선으로 정권 안위에 급급했던 아버지 인조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일 수 있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과 사실은 그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그 죽음이 안타까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현세자가 아버지 인조의 냉대 속에서 귀국 2달 만에 세상을 떠난 이유가 그의 건강에 있든, 소현세자가 친청파로 돌아섰다는 오해와 청나라에서 자신을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저지른 독살이든 소현세자의 죽음은 조선이 서양 문물을 수입해 발전할 기회를 잃어버린 안타까운 일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삼전도에 설치된 수항단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무려 260년 간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의 이혼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생활 끝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갈등으로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저자의 병자호란에 대한 관점이 「자신들만의 권력을 지키고 대국을 섬기기만 하면 백성은 어떻게 되는가?」란 제목의 이 책 '서문' 첫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병자호란은 갑자기 닥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에 앞서 40여 년 전에는 임진왜란을 겪었고, 불과 10여 년 전에도 정묘호란을 겪었다. 정묘호란 이후, 청나라는 각종 경제적 요구는 물론, 명나라를 치는 데 협조하라며 수시로 조선을 압박했다. 이런 와중에도 인조 정권은 시종일관 국방이나 백성들의 곤궁한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들의 권력 팽창에만 열을 올렸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원군을 보내 재조지은(再造之恩)을 행한 명나라의 은공을 갚아야 한다며 대명의리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 했다.”
정묘호란 후, 조선은 대명의리에 빠져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도,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군사력 증강 등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10년 후 홍타이지가 즉위하고 명나라 정복이 본격화하면서 또다시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야 했다. 병자호란은 유례없는 굴욕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과연 인조는 삼전도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비겁한 왕으로만 역사의 시간에 멈춰 있어야 하는가? 인조는 반정에 성공한 조선의 전제군주였다. 그리고 반정의 실질적인 책임자이기도 하다. 광해군이 무리한 궁궐공사로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렸다며 반정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나 그는 전쟁이 발발할 때마다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로,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숨어들었다. 백성을 버리고 자기 살길만 찾는 군주를 백성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청나라가 기마병을 앞세우고 순식간에 서울 인근에 당도하자 인조는 강화로의 피난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반란이 무서워 군사훈련을 금지했던 인조 정권의 정책으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조선군은 홍타이지와 백전노장 장수들이 이끄는 청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저자 : 유근표
20여 년간 성곽과 병자호란을 연구했다. 2000년 초 수풀 속에 방치된 서울성곽에 충격을 받고 6년에 걸쳐 답사한 끝에 ‘서울성곽 탐방안내도’를 완성하여 언론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 후 10여 년간 문화재 관련 단체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서울성곽 안내와 역사를 강의했다. 남한산성 답사 중, 병자호란 때 임시수도로서 45일간 항전한 남한산성의 역사성에 주목하여, 병자호란에 관한 책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후 10여 년 넘게, 『인조실록』 『승정원일기』 『만문노당(滿文老?)』 등 1차 사료와 인조와 병자호란과 관련된 수많은 저작을 연구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인조와 병자호란을 다룬 이 책을 집필했다. 현재는 역사를 주제로 한 저술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강산 이조국』 『성곽답사와 국토기행』 『서울성곽 육백년』 『이야기 수동사』 등이 있다. 이밖에 논저로는 「조선왕조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 「고려와 조선왕들의 수명」 「이회영 일가」 「독립군 최고의 무장 홍범도」 「의사 강우규」 「임시정부와 김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김원봉과 의열단」 「석주 이상룡」 「남한산성과 병자호란」 「북한산성」 「서울성곽의 어제와 오늘」 「고개 이야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