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 인 스펙트럼 안전가옥 FIC-PICK 5
배예람 외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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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단편소설을 읽었다. 단편소설은 70~80년대가 전성시대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이다. 바쁘고 돈이 넉넉지 않아 독자들이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관심이 높았나 보다. 옛날에는 장편은 신문 연재로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장편소설은 신문사 주도로 연재돼 실었던 것 같다. 소설 한 편을 한 권에 내기에는 부담이 많은 데다 독자들도 사 읽기가 만만치 않았을 때라면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나라도 국민도 가난한 시절 책을 사보기 어려워서 신문 연재로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광수의 『무정』이나 심훈의 『상록수』도 신문 연재소설이었다가 연재가 끝난 후 인기가 높아 책으로 펴냈다고 들었었다. 196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화 시절에는 하루종일 일터에 시달리다 읽을 것을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장편소설은 여전히 사서 읽기가 부담스러웠던 같다고 생각도 해본다. 요즘 세대가 들으면 뭔 말도 안 되는 얘기냐 싶을 거다. 그때는 신문사에서도 신춘문예에 단편만 뽑았지 중·장편은 대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연재 소설이 신문에서 사라진 지 수십 년이 넘었으니(정확히는 모르지만) 요즘 세대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긴 하겠다 싶다.

80~90년대 여성 해방의 시대로 일컬어진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설이란 장르 안에서 여성 서사는 어디까지 뻗어갈 수 있을까? 지금은 여성 해방의 시대를 지나 여성 우월의 페미니즘 시대 아닌가. 실제로 사회 여러 부문에서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더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니 지금까지 우월한 위치에서 여성을 대하던 남성들이 할 말이 없긴 할 터다. 이 책 『우먼 인 스펙트럼』에서는 여성이 창작하고, 여성 인물이 주인공인 것에 더해, 우리는 소설 속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에도 주목한다. 여자의 적(敵)은 여자라는 시각도 틀렸지만, 동시에 여성이라는 존재나 여성들간의 관계가 마냥 아름답고 완전하지만도 않다는 사실을 보여줄 때가 됐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 여성들의 중론이다.

 


 

실제 여자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동경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그럼에도 지지하며 살아가는 복합적인 존재라고 이 책은 형상화해 보여 준다. 출판사 편집자의 말이지만 이는 남성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출판사 〈안전가옥〉의 옴니버스 픽션 시리즈 FIC-PICK의 다섯 번째 작품집이다. 이 소설작품들은 주체적이고 입체적인 여성 인물과 그들의 다양한 관계 맺기를 보여주며 기존 여성 서사의 스펙트럼을 넓힌다. 매력적인 작품세계로 한국 장르문학계의 든든한 축이 되고 있는 배예람, 이수현, 아밀, 김수륜, 진산 작가가 각기 다른 여성 인물의 이야기를 각자의 스타일로 깊이 있게 그려 냈다. 「수직의 사랑」, 「여우 구슬은 없어」, 「하나뿐인 춤」, 「누가 진짜 언니일까?」, 「협탐: 좁은 길의 꽃」 다섯 작품이다. 여러 장르의 토대 위에서 여성간 사랑, 우정, 연대를 탐색한다.

이 시리즈를 기획한 출판사 측에 따르면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이 고안한 ‘벡델 테스트’ 결과 ‘첫째, 이름을 가진 여성 캐릭터가 최소 두 사람이 나올 것’, ‘둘째,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눌 것’, ‘셋째, 해당 대화 소재나 주제가 남자 캐릭터에 관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세 가지 항목으로 성 평등 관점에서 영화를 평가한다. 혹시 소설에도 이런 테스트가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본 결과의 소설 작품이 이 책이다. 소설집 『우먼 인 스펙트럼』에는 SF, 무협, 고딕스릴러, 판타지, 디스토피아라는 다섯 가지 장르를 통해 다섯 가지 여성-퀴어 이야기를 묶어낸 앤솔로지 소설이 한 권에 들어 있다. 소설이란 문학 장르는 우리 삶의 모든 모습이 담겨 있다. 물론 예술이란 것 자체가 우리의 삶이 가장 기본적인 주제이다. 예술의 시작도 자연과 인간의 삶으로부터 시작됐다고 하지 않은가. 우리는 남녀를 구별하기 이전부터 인간이란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왔다.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없는 여성 서사를 읽는 재미는 언제나 남다르고 특별하다고 말하지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자아와 타인의 관계라면 자신 이외에는 타인이자 적이다. 인간 관계는 타인을 적이 아닌 내 안으로 끌어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변증법적 이론에서 보자면 우리의 삶은 자아와 비아의 투쟁의 모습이다. 이를 글로 표현하는 소설은 이런 모습을 반영하는 하나의 예술적 틀로서 존재하고 발전해 왔다. 이런 관점에서 첫 번째 작품 배예람의 단편 「수직의 사랑」은 환경오염이 극심한 가까운 미래의 세계를 배경으로, 상층민과 하층민으로 나뉜 채 혁명단과 인질로 만나게 되는 두 여성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반부를 지나며 마침내 서로를 알아보고 기억해 낸 두 여성은 기쁨과 설렘, 그리움을 뒤로하고 당면한 죽음의 위기를 함께 극복해 간다.

오염된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독가스로 인해 땅이 더는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지금 우리 지구의 환경이 보여주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이다. 위기감을 조성하기 위해 설정한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환경 오염 상태로 언제 지구 생활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를 추정해 들어가면 인간은 물론 생물이 살기 어려운 지구가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상상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환경에에 사람들은 땅을 떠나 건물 안으로 도망친다. 많은 부를 가진 사람들이 오염된 대지를 피해 건물 위층에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부에 따라 사는 층이 구분된다. 최하층 시민인 ‘하영’은 유일한 이동 수단인 계단을 오르내리며 배달 일로 먹고 산다. 성인이 된 하영은 ‘혁명단’에 들어가게 되고, 전복을 꿈꾸며 최상층에 사는 국회의원의 딸을 납치하는 일을 맡게 된다. 그런데, 인질인 ‘상미’와 꼭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것만 같다.

 


 

이수현의 단편 「여우 구슬은 없어」는 요괴 사냥꾼 ‘이선’과 요괴 ‘은화’의 기이한 인연을 보여준다. 세 여자의 아름답지만은 않은 사랑, 집착, 배신! 이 삼각관계는 과연 어떻게 끝날지? 관심을 끈다. 요괴 사냥꾼과 연인인 ‘옌’과 함께 카멜레온 요괴를 처치하느라 지하에서 꼬박 일주일을 보내고 올라온 날, “요괴도 생명입니다”라는 카피와 함께 대형 전광판에 떠 있는 첫사랑 ‘여은화’의 모습을 보게 된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은화를 보러 간 ‘이선’은 광신도 테리리스트로부터 ‘은화’를 구해내고, 그 일을 계기로 경호 일까지 맡게 된다. 연인을 배신한 죄책감에 시달리던 ‘이선’에게 ‘옌’은 ‘여은화’가 요괴라는 소문이 있다고 말한다.

 

“인간처럼 생긴 요괴가 왜 있을까 생각해 본 적 있느냐?”

은화가 휘적휘적 내젓는 손이 언뜻 반투명해 보였다.

“전설에는 요괴가 도를 닦으면 인간으로 변한다거나, 인간이 되고 싶어서 별짓을 다한다는 이야기들이 있지. 뭐라더라, 구미호였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람 간을 빼 먹는다고? 하늘과 땅의 이치를 깨달아 놓고 그 능력으로 인간이 되려 한다고?”

소리 내어 웃지 않아도, 은화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세상 다시없이 얼빠진 소리라는 경멸이 전해졌다.

“인간이 모든 생물 중에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야 그런 이야기를 당연히 받아들였을지 모르지. 하지만 너희는 현대인이니 한번 생각해 보렴. 왜 굳이 다른 존재가 인간이 되고 싶어 할까.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면.”(p.121)

 


 

아밀의 단편 「하나뿐인 춤」은 졸업 무도회를 앞두고 남자 춤을 추는 걸 거부하는 카릴을 통해 성정체성의 혼란을 다룬다. 지구인이 아닌 다른 종족의 성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성적 고정관념을 뒤집어 보는 이 퀴어소설은 여성성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질문한다. 모든 라뮈스 성인 아이들은 무성(無性)의 일란성 쌍둥이로 태어나, 함께 사고하고, 행동하고, 성장하며 자란다. 그러다 청소년기에 접어들면 유전 형질이 달라지면서 여성과 남성으로 나뉜다. 열다섯 살부터 이미 감관이 퇴화하며 여성기가 생겨난 쌍둥이 동기 릴카와 다르게,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카릴은 남자로 분화하지 못했다. 남자 파트 춤이 서툴러서 성인식이나 마찬가지인 졸업 무도회에서 함께 춤을 출 파트너를 찾지 못한 카릴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국 여자 파트 춤을 연습하는데…… 카릴은 졸업 무도회를 잘 치를 수 있을까?

 

"남성용 정장을 입고 여자 춤을 추자. 처음 떠올렸던 아이디어는 그것이었다. 의상과 춤의 성별을 일부러 정반대로 해서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흩트리려는 의도였다. 원래는 드레스를 입고 남자 춤을 춰 줄 파트너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졸업 무도회 무대에서 그런 과감한 시도를 해 줄 파트너를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고민하던 카릴은 ‘그렇다면 파트너 없이 하지 뭐’라고 결정했고, 그러자 모든 것이 오히려 더 명쾌해졌다. 왜냐하면 노랫말 속에서 화자의 연인은 곁에 없었으니까. 그러니 카릴의 곁에 파트너가 없는 것은 노래의 의미에 고스란히 부합했다. 카릴은 드레스를 부여잡고 춤을 추며 연인의 빈자리를 그리워하고, 동시에 음악으로 말미암아 마치 연인과 함께 있는 것처럼 춤을 췄다. 그 역설을 춤으로 구현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연인과의 춤."(p.188)

 


 

김수륜의 단편 「누가 진짜 언니일까?」는 엄마의 재혼으로 새아버지의 집에서 살게 되면서 기이한 사건에 휘말리 '나' 의 이야기다. 새로운 가족인 의붓언니를 기대하며 집에 들어간 ‘나’는 서로 상대를 공격하는 언니들 사이에서 무서운 진실에 근접해간다. 진산의 단편 「협탐: 좁은 길의 꽃」은 여성의 연대가 무엇보다 빛나는 소설이다. 사건을 의뢰받은 탐정 ‘나’와 사건을 의뢰한 ‘무림천후’의 엇갈린 인연을 통해, 우정 그 이상의 감정을 유쾌하면서도 진정성 있게 그려 낸다.

다시 출판사 측의 이야기를 인용한다. "모두에게 완벽한 이야기는 없듯이 『우먼 인 스펙트럼』 속 다섯 편의 소설도 누군가에겐 다소 아쉬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이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 퀴어들이 남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성을 선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 책은 당당히 하고 있다. 당장은 부족할지 몰라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걸음으로서 이 이야기들은 특별하고 가치 있다. 누군가는 소설을 쓰는 행위로써, 또 누군가는 소설을 읽는 행위로써, 우리에게 필요한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걸 『우먼 인 스펙트럼』이 보여준다고 믿는다."

안전가옥 이은진 스토리 PD는 책의 가장 뒷 부분에 「프로듀서의 말」에서 작가들의 개성과 출판사의 기획 의도가 잘 조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있었다고 고백한다. 혹시 모를 부조화로 인해 출판이 무산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조바심에서 작가들과의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주인공이 소수자를 상징하는 은유로서만 존재하지는 않도록 하자는 원칙을 세웠다고 한다. 또 홀로 고민하는 주인공이 아닌, 행동하는 주인공이길 바랐다고도 밝힌다. 퀴어성을 꼭 진지하고 무거운 현실 속에서만 다뤄야 할가? 이 한 가지 의문에 답할 수 있기 위해 이 작품집은 기획됐고, 또 짧은 분량 안에서 작가들이 퀴어성을 주제로 하는 주제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이 작품집이 출판돼 나오면서 기우였다는 점을 털어놓는다.

 


 

저자 : 배예람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즐겨 쓴다. 밤마다 침대에 누워 내일 무엇을 쓸지 상상만 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지독한 게으름뱅이. 게으름을 이겨 내고 한 줄이라도 쓰는 것이 매일매일의 목표. 2019년 안전가옥 앤솔로지 『대스타』에 수록된 「스타 이즈 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안온북스 ‘내러티브온’ 소설 편 『왜가리 클럽』에 수록된 「인어의 시간」을,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엔조이 시티전(傳)」을 썼다. 오래오래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

 

저자 : 이수현

작가이자 번역가. 인류학을 공부했고, 주로 SF와 판타지 등의 상상 문학을 영어에서 한국어로 옮기는 일을 많이 했다. 소설가로서는 《환상 문학 단편선》, 《이웃집 슈퍼히어로》,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 등의 앤솔로지에 참여했다. 최근에는 무속과 코스믹호러를 결합한 《외계 신장》, 민속 판타지 《서울에 수호신이 있었을 때》를 출간했다.

 

저자 : 김지현(아밀)

소설가이자 번역가, 에세이스트.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고, ‘김지현’이라는 본명으로 영미문학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단편 소설 「반드시 만화가만을 원해라」로 대산청소년문학상 동상을 수상했으며, 단편 소설 「로드킬」로 2018 SF 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중편 소설 「라비」로 2020 SF 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로드킬』, 산문집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등을 썼으며, 『그날 저녁의 불편함』, 『끝내주는 괴물들』, 『조반니의 방』, 『흉가』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저자 : 김수륜

슈퍼히어로 앤솔로지 《이웃집 슈퍼히어로》, 중단편선 《누나 노릇》, 환상문학총서 《거울 아니었던들》, 호러 앤솔로지 《괴이한 거울》에 작품을 수록했다. 경기도 시골에서 고양이들과 살며 낮에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 일하고 밤에는 소설을 쓴다.

 

저자 : 진산

아득한 옛적 1994년 하이텔 무림동 공모전 단편 무협 〈청산녹수〉로 무협소설 쓰기 시작. 이후 장편 무협과 로맨스, 판타지 및 게임과 생활 관련 에세이 등등을 써 왔다. 통신 연재, 대여점, 인터넷 소설, 웹소설 등의 시대를 여러 장르의 전업 작가로 쭉 살아온 것이 유일한 자랑거리. 다양한 장르를 써 왔기 때문에 정체가 모호할 수도 있으나 장르를 벗어난 글을 쓰는 것이 목적은 아니며 장르 규범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찾는 걸 좋아한다. 이번 앤솔로지 역시 그런 마음으로 참여한 작업.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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