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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뱀 메소드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22
정이담 지음 / 안전가옥 / 2023년 1월
평점 :
이 책 『상사뱀 메소드』는 한때 국민 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여자가 상류층 남자를 만나 결혼 생활을 하며 과거에 사랑했던 이에 대한 기억과 현재의 삶 사이를 오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로맨틱 스릴러이다. 주인공 미옥의 과거 연인에 대한 묘사들은 회상보다는 오히려 이 여인의 뒤틀린 현재의 내면이라고 생각해야 더 정확할 듯하다. 주요 모티프는 표제어에 나타난 대로 '뱀'이다. 서로 엉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다가도 틈새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뱀의 특성은 캐릭터와 구성, 장면의 묘사 등 많은 면에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엉킨 뱀처럼 저마다 조금씩 뒤틀려 있다. 만인에게 추앙받다시피 했지만 자신을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하는 현실에 질려 버린 미옥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 연인이었던 영화감독 영현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욕망을 보인다. 미옥의 남편인 철중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친모에 관한 충격적인 기억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채 살아가는 인물로서 아름다움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
이 소설의 또다른 모티프는 우리나라 대중가요 최초의 톱스타로 꼽히는 윤심덕과 그가 부른 노래 〈사의 찬미〉다. 저자 정이담은 소설 각 장(章)의 멘트로서 이 노래의 가사를 인용한다. 이 노래 〈사의 찬미〉는 한국 대중가요가 큰 사회적 담론을 일으킨 첫 사례라고 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여가수 윤심덕의 정사(情死) 사건을 이런 저런 경로로 전해듣고 잘 알고 있다. 윤심덕(尹心悳, 1897 ~ 1926)은 남다른 생애와 더불어 의문의 죽음으로 인해 당대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도쿄에서 그야말로 청춘을 구가하던 윤심덕이 김우진을 만난 것은 1921년 일본유학생들이 결성한 순례극단 동우회에서였다. 윤심덕과는 정반대로 김우진은 조용하고 차분한 지식인으로 당시 와세다 대학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다. 전라도 거부의 맏아들이었으며 이미 고향에 처자가 있는 몸이었다. 김우진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동우회에 윤심덕이 참여하면서 첫만남을 가진 이후, 한국에서 두 달여 간의 순례공연을 하면서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였다.
이들의 정사를 다룬 1926년 8월 5일 자 동아일보 사회면 「현해탄 격랑 중에 청춘남녀의 정사」 제하의 기사는 언론에 보도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지난 3일 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항해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 쓰시마섬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했으나 종적을 찾지 못했다. 승객명부에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세),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2정목 273번지 윤수선(30세)이라고 씌어 있지만 본명이 아니고, 남자는 김우진, 여자는 윤심덕으로 밝혀졌다. 관부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은 구구한 억측과 소문, 황색 언론의 이야깃거리 만들기가 뒤따랐다.
그만큼 윤심덕과 김우진이 당대 유명인들이었고 동반 자살이라는 그 죽음이 너무 자극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우진이 처자를 둔 유부남이었고 윤심덕이 노처녀였다는 것도 가십성 기사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특히 살아생전 김우진보다 더 유명했던 윤심덕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갖가지로 비화되었다. 1920년대 이제 막 사회활동의 대열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일부에서는 그녀의 삶과 죽음, 치부를 낱낱이 까발리고 싶어했다. 윤심덕이 유부남과의 사랑에 울다가 자살한 이름없는 여인이 아니라 당시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서양음악 성악가였다는 사실이 이런 현상을 더 부추겼다. 이 시절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 불리는 유명한 노래다. 삶의 허무를 말하는 듯한 가사에 애절한 목소리로 부르는 윤심덕의 노래를 듣고 녹음실의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사진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저작권 위배 없이 <인물한국사>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혔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사의 찬미〉 전문
저자 정이담은 책의 뒷 부분 「작가의 말」에서 "저는 스릴러를 싫어합니다.(수많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일을 병행하는 통에 피로감이 커, 굳이 매체 속 범죄물을 찾아보지 않는 편입니다.) 하지만 세상엔 스릴러로서만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미옥은 자신의 병증으로 주변인의 의도를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환시, 환향, 환각은 세상을 왜곡합니다. 그러나 주변인들도 미옥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작가인 저에게도, 소설 속 세상에서도 미옥은 명백한 여성 빌런입니다. 미쳐 버린 여성 악당이고, 자신의 파트너들에게 끔찍하게 군 존재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혼수상태 속에서 유일하게 빛난 한 가지 진실을 지키고자 모든 거짓말을 바친 사람이기도 합니다."(p.369~370)
소설 속 미옥은 유혹하고 만족시킨 다음 희생되는 팜 파탈로 소비되다 잊힌 배우다. 그는 안정 이상의 가정을 꾸리기 위해 자신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 의사 철중을 유혹하고, 이 과정은 그가 출연한 숱한 영화에서만큼이나 자연스럽고 수월하다. 놀랍지 않지만 그런 미옥에게 진정한 사랑은 따로 있다. 이 사랑은 미옥을 보조적인 역할이 아니라 늘 주연으로 끌어올렸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기에 아직 유효하며, 이제는 주연을 넘어서 감독으로서 자리매김하게 한다. 이 사랑은 과거의 연인 영현을 향한 것이자 박제를 거부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기에, 미옥은 숱한 위험을 무릅쓰고 이 사랑을 연출해나간다. 연기에 대한 메타포로 가득한 로맨틱 스릴러 『상사뱀 메소드』는 자아라는 윤곽을 뭉갤 수도 있는 메소드의 위험, 그러나 관객과 감독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 미끄러져 나아가는 배우의 궤적을 과감하고 섬세하게 추적한다.
점점 인기를 잃어가던 배우 미옥과 재벌가 의사 철중의 결혼은 필연성을 띤다. 미옥은 자신 앞에서 순진한 20대처럼 몸을 떠는 철중에게 살짝 미끼를 던진다. 그가 싫은 것보다 철중의 백그라운드가 가히 욕심날 만하기 때문이다. 미옥보다 10살 이상 많은 철중은 자신의 욕망 대상이었던 존재가 유혹하자 덥석 받아들인다. 캐릭터로 보면 필연적이다. 이 캐릭터는 저자에게는 소설 구상 단계에서부터 예정된 것이었으리라. 소설의 유기적 구성을 위해 필수적 요소일 테니까. 그러나 철중은 세 번의 결혼 실패 이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브 그룹의 아들이다. 재벌가의 아들이니만큼 누구나 욕심 낼 결혼 상대자로서 이혼 세 번은 문제되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재벌집 며느리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옥은 세상이 인정하는 톱배우다. 외모는 물론 연기도 뒷받침되지 않으면 올라가지 못할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연기 능력ㅇ을 인정받았다. 연기자의 오랜 경력으로 시부모의 마음을 쉽게 얻는다. 그래도 전 가족의 동의를 얻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미옥이 결혼해서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상속의 큰 경쟁자가 된다. 온 가족이 좋아할 수는 없는 구조인 셈이다. 이로써 사랑 뒤에 숨겨진 욕망들이 충돌한다.
재벌가에 안착하듯이 미옥은 삶까지 쉬울까? 치열한 견제와 남편의 질투심을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미옥은 이제 결혼 생활 자체를 연기한다. 남자 정원사를 통해 남편 철중이 절대 가지 말라고 경고한 공간, 비밀의 창소인 창고다. 이곳은 철중을 유명하게 만든 피부 미용 앰플 제작 보관소다. 뱀에게서 추출하고 배합한 앰플을 아내 미옥에게 먼저 실험한다. 그 앰플은 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원하고, 화장품 회사를 운영하는 여동생은 대량 생산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눈가에 주름이 하나둘 늘자 날 버리려 했다. 그들에게 뱀이란 매끈하고 유연하며 언제나 번들거리는 모습으로 상대에게 감겨들어야 하니까. 미끈거리는 살갗으로 그들의 육체를 만족시켜야 하니까. 멍청이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진짜 뱀들은 그렇게 태어나지 않는다. 뱀은 자신을 찢고 나온다. 매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언제든 독니를 드러내어 상대를 통째로 삼킨다. (……) 나라는 여자는 섹스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존재임에도 사람들은 내 육체만을 보았고 육체로만 소비했다. 〈상사뱀〉. 그 작품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영화였다. 철중에게 그 사실은 알리지 않았다. 늙은 남자의 환상을 깨는 짓은 가혹하니까."
가엾은, 정말로 가엾은 영현. 너는 온몸이 마르도록 날 원했다. 그는 안경 너머 움푹하고 깊은 눈으로, 얇은 뺨으로,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과 뱀이 그려진 목덜미로, 둥글게 굽은 어깨와 목으로 종이 앞에 앉아 글자마다 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와 뭘 어쩌겠는가. 이미 너무 많은 시간과 기회가 지 났다. 나는 결혼했고 남편이 생겼다. 영현은 날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자꾸 극본에서 풍기는 비린 흙냄새가 떠올랐다. 그건 나를 갓 태어난 뱀처럼 느끼도록 만들었다. 난 향수가 느껴 질 때마다 표지를 손톱으로 쓰다듬었다. 외국어로 적힌 활자들은 구불거리는 뱀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금방이라도 달려오려는 것처럼. 영현이 다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종이 안에 넘쳤다.(p.105) - 「맥거핀」 중에서
저자 : 정이담
심리학 학사 및 석사 졸. 상담전문기관에 근무하며 소설을 쓴다. 판섹슈얼. 장르의 구획을 넘나들며 심리적이고 환상적인 요소를 통해 가려진 목소리들의 세계를 드러낸다. 제1회 로맨스릴러 공모전에서 『괴물 장미』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괴물 장미』 『불온한 파랑』 등을 펴냈으며 퀴어 아포칼립스 소설집 『무너진 세계의 우리는』에 「신인류 바이러스」를 실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