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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
조나탕 베르베르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월
평점 :
심령술(心靈術, spiritualism)은 철학적 용어로는 유심론(唯心論)을 의미하기도 한다. 철학사전에 따르면 심령술은 강신술(降神術)이라고도 불리우고, 죽은 자의 영혼을 영매(靈媒, medium)로 하는 특수한 인간을 통하여, 살아 있는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고 믿는 것을 뜻한다. 나아가 보통의 감각에 의하지 않고 정신이 어떤 감응을 보인다든가, 정신이 염원하는 것에 따라 물체가 움직이는 등 정신의 불가사의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예전부터 있었던 샤머니즘과 유사한 현상이지만, 19세기 중반경부터 유럽에서 현저하게 나타났다. 또 교회용어사전에서 심령술은 죽은 사람에게서 위로와 영적 지도를 구하는 일이라고 규정하고. 물질 세계를 지배하여 비정상적이고 초능력적인 각종 심령 현상들을 일으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풀이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악한 것으로 단죄하고 엄히 금하고 있다. 영매(spiritualistic medium, 靈媒)는 악한 영혼이나 죽은 망령(亡靈)에 접신(接神)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말을 하거나 하는 일,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이 책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는 마술사, 심령술사, 탐정 등이 등장하는, 1888년 뉴욕에서 벌어진 사건을 모티프로 쓴 소설작품이다. 스물여섯 살의 가난한 마술사 제니 마턴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토끼, 비둘기와 함께 근근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유명 탐정 회사인 〈핑커턴〉의 수장 로버트 핑커턴이 제니를 찾아와 미제 사건을 맡아 달라며 거액의 보수를 제시한다. 그가 맡긴 임무는 심령술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폭스 자매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 과연 제니는 수십 년간 이어진 수수께끼를 타고난 기지만으로 밝혀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저명한 사설탐정이 무명의 마술사에게 이렇게 큰 사건을 의뢰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아침에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 제니의 위험천만한 대모험을 이 책은 차근차근 써내려 간다.
저자 조나탕 베르베르는 앞으로 쭉 눈여겨봐야 할 신인이라는 평을 들으며 대중의 찬사 속에 화려하게 데뷔한 젊은 작가다. 이 작품은 그의 첫 장편소설이다. 경쾌한 추리, 개성이 뚜렷한 등장인물들, 감동적인 깨달음이 어느 하나 모자람 없이 조화를 이루는 이 찬란한 모험담은, 심령술과 마술, 탐정 수사가 뒤얽힌 기이하고 매력적인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간다. 가난한 마술사 제니는 시장 바닥에서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친다. 대가로 돌아오는 건 코 묻은 동전 몇 개뿐이어도 그만 둘 수 없다. 홀어머니, 반려 토끼와 비둘기까지, 네 식구가 생활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입이지만 그마저도 없다면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그러던 어느 날, 사립탐정 핑커턴이 제니를 찾아와 일자리를 제안하며 거액의 보수를 약속한다. 그가 제시한 임무는 '마술사들의 공연을 보고 비법을 알아내는' 것이다. 업계 거물이 무명의 마술사에게 접근해 온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지만 당장 필요한 지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내 눈이 놓치는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그때 제니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 자신만만한 한마디로 자신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모험에 뛰어들었는지···.
제니가 맡은 사건의 중심에는 심령술사 폭스 자매가 있다. 큰언니 리아, 둘째 마거릿, 막내 케이트로 이뤄진 3인조는 망자와 소통하는 능력을 내세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명성을 떨쳐 왔다. 산 사람이 혼령과 대화한다니 분명 교묘한 속임수가 있을 텐데, 폭스 자매가 심령주의 교단을 창시하고 금은보화를 쓸어 모은 40여 년간 비밀은 털끝만큼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제 제니가 나설 차례다.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진정한 마술사가 되려는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제니는 소설의 주인공이다.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어도 매일같이 갈고 닦은 마술 실력과 어떻게든 살아남는 끈질긴 생명력,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집념,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둑한 배짱이 제니의 가장 큰 무기가 되어 준다. 제니는 핑커턴 탐정 회사의 지침에 따라 위조 신분을 가면처럼 바꿔 써가며 수사 대상에게 접근한다. 먼저 떠나보낸 남편의 혼령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헤이즐 바월 부인으로 변신해 둘째 마거릿 폭스와 친분을 맺고, 런던에서 온 여행객 애덜리아 말릭으로 변신해 막내 케이트 폭스에게 다가간다. 물론 일은 무엇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는 모험을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다. 행동하는 용기를 지닌 제니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저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정면으로 맞서고, 기지를 발휘해 위기에서 벗어나고, 한참 좌절에 빠져 있다가도 끝내 다시 일어선다. 그 과정에서 제니가 보여 주는 특유의 인간적인 매력은 적조차 결국에는 친구이자 동료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특히 곳곳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사건을 알아보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재미다. 표지 그림에서 우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폭스 자매는 실제로 19세기에 심령주의의 번영을 이끌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고, 핑커턴 탐정 회사는 1850년 설립되어 수많은 비밀 요원을 거느리고 활약을 펼쳤으며 21세기 오늘날에는 보안 업체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에 활용된 '우리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는 핑커턴사의 유명한 표어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저자는 남북 전쟁, 포이즌 스프링 전투 등 같은 시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흡입력 있는 허구의 이야기로 엮어 낸다. 낯선 시공간의 풍경과 움직임, 소리와 냄새까지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재생하듯 생생히 전달하는 능력이 돋보인다. 그런 장면들이 모여 역사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더라도, 기존의 추리물 독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이룬다. 이 작품에는 큰 줄기가 되는 현재 진행형 이야기 중간중간에 책 속의 책과 문서가 삽입되어 있어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기도 하는 독창성 있는 소설이다. 돌아가신 아버지 구스타브 마턴이 집필한 『마술의 길』은 제니가 언제나 곁에 두고 읽고 또 읽는 바이블로, 진정한 마술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기술과 마음가짐을 모두 담고 있다. 핑커턴 탐정 회사의 창립자 앨런 핑커턴이 남긴 『완벽한 요원을 위한 핑커턴 지침서』는 비밀 요원으로 활동하며 주의하고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하나부터 열까지 담긴 교과서다.
독자는 제니가 각각의 책을 펼쳐 든 순간에 같은 책의 같은 대목을 제니와 함께 읽어 내려가게 되며, 이 책 속의 책들과 더불어 〈임무 지시서〉와 〈위조 신분 설명서〉 또한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배치되어 있어 몰입감을 한층 더해 준다. 제니는 "내가 추구하는 것, 그리고 늘 추구했던 것, 그건 자립이에요. 난 그저 내 마술을 할 수 있기를, 사람들이 나를 내버려 두기를, 어머니의 생활비를 대드릴 수 있기를 원해요." 처음부터 제니의 가장 큰 바람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마술을 하며 사는 것이었다. 제니는 어쩌다 휘말린 이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다시 마술을 시작할 수 있을까? 보잘것없는 개인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대해 보이는,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문제들을 풀어 낼 수 있을까?
아버지의 조언에 더는 기대지 않고도 언젠가는 진정한 마술사로 거듭날 수 있을까? 혼자 시작한 여정을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정으로 바꾸는 마술에 성공한 제니, 어떤 위기에 처해도 맨몸으로 덤빌 용기를 가진 제니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결코 짧지 않은 소설이다. 빈틈 없고 유기적인 구성 능력은 과연 이 작품의 저자가 신인인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저자 조나탕 베르베르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자」란 글에서 폭스 자매와 핑거턴 탐정 회사는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한다. 폭스 자매는 1848년에 심령들과 최초의 '대화'를 나누었다. 핑거턴 탐정 회사는 1850년에 문을 열었다고 실명을 사용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진짜 폭스 자매'는 1881년 런던에서 남편이 사망하자, 케이트는 돈 한 푼 없는 상태가 되어 술에 빠져 절망을 달랜다. 파산한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영매의 재능으로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음주벽은 심령주의 공동체 안에서 그녀에게 좋지 않은 평판을 안겨 주게 되고, 고객이 떨어져 나간다. 그녀는 막 조직된 기구인 아동 보호 연맹에 곧 어린 아들 퍼디낸드를 빼앗긴다.
마거릿은 리아가 채운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러 번 뉴욕을 떠나지만, 결국에는 늘 되돌아오고 만다. 1888년 마거릿은 케이트가 빠져든 상태를 보고 리아를 비난하면서 〈뉴욕 헤럴드〉지와의 접촉을 시작으로 행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독점 인터뷰에서, 교령회에서 심령주의라는 사기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관중에게 약속한다. 그녀는 인터뷰에 더해서 「심령주의를 내리친 최후의 타격」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기자와 공동으로 저술한다. 그 보고서는 심령주의란 리아가 꾸민 거대한 사기극으로 40년간 지속되었다고 주장한다.
1888년 10월 21일 뉴욕의 시립 음악원 무대에 오른 그녀는 2,000명의 관객 앞에서, 두 자매의 이름으로 발언을 한다. 그 자리에서 그녀는 딱딱 소리를 내는 심령들은 사실은 발가락을 튕기는 소리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그때부터 심령주의 운동은 수많은 신자를 잃고 분열을 겪는다. 한편에는 마거릿이 자기 자신의 재능을 깎아내리도록 돈에 매수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리아 곁에 남은 충성스러운 사람들과, 다른 한편에는 결속이 깨지자 이번 기회가 폭스 자매에게서 스타의 자리를 빼앗아 올 기회라고 본 영매들이 있었다. 어쨌든 심령주의는 너무 널리 퍼져 있는 데다가 이미 수많은 분파로 나뉘었던 만큼, 결국 그러한 폭로로도 심령주의 운동은 기세가 꺾이지도 않고 영향력을 상실하지도 않는다. 1889년 마거릿은 고백을 뒤엎고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 버린 터라, 관중은 더 이상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집세를 내지 못하여 집에서 쫒겨난 그녀는 친구인 어떤 영매의 집에 기거하다가, 그곳에서 1893년 사망한다. 리아는 1890년 호사를 누리다가 사망했다. 저자는 케이트가 알코올 의존증에서 빠져나와 다시 아들과 만날 수 있게 했다. 나는 자매에게, 자매가 소원했지만 삶이 그들에게 결코 부여한 적이 없던, 심령주의로부터의 결정적 탈줄을 선사하고 싶었다고 털어놓는다.
이 책에는 또 〈핑커턴 탐정 회사〉에도 언급한다. 앨런 핑커턴은 1819년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그는 1842년에 미국의 일리노이주 던디로 이주하여 통 제조업에 종사한다. 그는 통 제조에 필요한 원자재를 찾아 던디 근처의 숲을 탐사하다가 이상한 남자들과 맞닥뜨리고, 범죄를 의심하게 된다. 그가 지역 보안관에게 알리지만, 보안관은 일개 시민의 의심을 받아들여 섬 전체를 감시하는 것 말고도 다른 할 일이 있다고 대꾸한다. 그리하여 앨런은 직접 나서서 그 장소를 밤낮으로 감시하는 일에 뛰어든다. 그는 암시장을 발견하자,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지원자들을 모은 뒤 보안관을 데리고 범죄자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덕분에 화폐 위조범들은 일망타진된다. 이 사건 덕분에 그는 1849년 시카고 경찰과 공조하는 최초의 탐정이 된다. 한 해 뒤인 1850년 그는 핑거턴 전국 탐정회사를 설립한다. 핑거턴 사는 보안회사로 바꾸어 오늘날에도 존재한다. 1999년 5만 요원을 거느린 핑커턴사는 34억 유로 상당의 평가 금액으로 시큐리타스 AB보안회사에 인수되었다.
"진정한 마술사는 공연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거나 살아가는 시간 동안, 사람들이 가능한 것에 대해 갖는 인식을 바꿔 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관객이 깜짝 놀라서 쳐다보는 가운데 현실 세계의 규칙들을 비트는 데 성공하고, 관객이 믿어 왔던 그 모든 것을 넘어서서 관객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계를 그들에게 제공한다."(pp.605~606)
저자 : 조나탕 베르베르(Jonathan Werber)
1994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하다가 방향을 틀어 시청각 연출 전문 학교 ESRA에서 시나리오 창작을 공부했다.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몇몇 단편 영화를 연출했고, 현재는 깃펜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고양이 <플륌>과 함께 살며 소설 집필에 매진 중이다. 2020년 첫 장편소설 『심령들이 잠들지 않는 그곳에서』로 대중의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역자 : 정혜용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파리3대학 통번역 대학원(ESIT)에서 번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번역 출판 기획 네트워크 <사이에>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으로 『번역 논쟁』이 있고, 옮긴 책으로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집착』, 『카사노바 호텔』, 『그들의 말 혹은 침묵』, 마일리스 드 케랑갈의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식탁의 길』, 레몽 크노의 『연푸른 꽃』, 『지하철 소녀 쟈지』, 마리즈 콩데의 『세구: 흙의 장벽』 전 2권, 『나, 티투바, 세일럼의 검은 마녀』, 『울고 웃는 마음』, 바네사 스프링고라의 『동의』, 발레리 라르보의 『성 히에로니무스의 가호 아래』, 앙드레 고르스의 『에콜로지카』,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 쥘리 마로의 『파란색은 따뜻하다』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