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삼문의 약속 - 조선의 충신들
성해석 지음 / 북새바람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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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국가의 주인이다'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전 시대 즉,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했듯 왕정이었다. 왕이 나라의 주인이고, 왕이 직접 다스렸다는 의미다. 우리의 마지막 왕정은 조선이다. 조선시대에도 나름의 민주적 요소가 나라 정책에 반영되었지만 왕정은 어디까지나 나라의 권력은 왕으로부터 나온다. 조선은 불교 국가인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군사 쿠데타를 통해 태조 이성계가 정권을 잡고 수립된 왕정 국가다. 또 나라의 기본이념이 된 유교의 성리학자들로 대표되는 신하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충절의 지키는 유학자 출신이 대부분이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이른바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한 성삼문은 뛰어난 유학자이며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대표적 충신이다. 흔히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을 통해 알게 된 사육신 중의 한 명으로 성삼문을 이해했다면 소설 『성삼문의 약속』은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낸다. 『성삼문의 약속』은 주인공 성삼문이 뛰어난 학자로서 백성과 임금에 대한 충심을 고뇌하는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진다. 시대의 지식인으로 성장하면서 ‘학문’에 대한 진지한 의미를 탐구하고 멸시받던 백성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던 성삼문은, 집현전 학자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공을 세운다. 그는 조선시대 선배들의 탁상공론에만 머물지 않고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기존의 관념을 통렬하게 깨치는 개혁적 인물로 그려져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소설은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우리 선조들의 충(忠) 사상을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주요 사건에 따른 인물 간의 갈등과 대립을 긴장감 있게 전개해가면서 글의 재미를 더해, 전 연령층이 부담 없이 읽으며 공감을 나누고 인물을 통해 역사를 읽는 안목도 더불어 키우게 된다. 태조부터 이어온 왕위는 적장자 원칙에도 불구하고 3대 태종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도 사실상 '왕자의 난'이라는 왕위 찬탈에 가까웠다. 이는 물론 적자들이 있음에도 서자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태조의 판단으로 태종이 반기를 듦으로써 왕위 찬탈로 전해져 오지만 많은 논란이 지금까지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적자는 아니지만 3남 세종이 정식으로 세자를 통해 왕위에 올랐다.

세종은 특유의 애민 정신을 바탕으로 적지 않은 기간(1418~1450, 32년) 많은 업적을 쌓아 조선의 기틀을 바로잡았던 왕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어 적장자인 문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2년 4개월 만에(재위 1450∼1452) 병사하고 어린 단종(재위 1452~1455)은 조선시대뿐 아니라 한국사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운명의 국왕이었다고 말할 만하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첨예한 권력 투쟁은 대부분 건국 초기에 빈발한다. 조선이 개국한 지 꼭 60년 만에 11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한 왕은 권력의 공백이 빚어낸 투쟁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지 독자는 직접 확인한 바 없으나 수양대군이 왕(세조)이 된 후 그의 사후에 쓰인 세조실록은 세조 위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소설 작품의 제목에 쓰인 '약속'은 문종과 성삼문, 집현전 학사들과의 약속이다. 자신이 병약해 오래 왕위에 있지 못할 것을 우려해 이들에게 어린 아들(단종)을 지키고 보좌해줄 것을 한 약속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단종 즉위 후부터 세조가 왕이 된 직후까지의 과정을 저자 성해석의 상상력을 이용해 극화한 내용이다. 물론 성삼문이라는 조선 초기 충절의 선비정신을 지켜낸 사육신(死六臣)으로 그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생애를 조명한다. 성삼문은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역적죄에 해당하기에 그의 가문은 어쩌면 거의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았나 싶다. 그는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조선 선비의 대표적 충신이다.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고 후세에 평가를 받는 이유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했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했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의 딸이다. 그가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갖춰지는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이 설화를 소설은 그의 탄생에서 다루고 있다. 성삼문은 1435년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됐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 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직집현전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성삼문은 세종 때에 신숙주 등 집현전 학사들과 함께 왕명으로 〈훈민정음〉을 편찬했다. 〈훈민정음〉은 1448년 간행한 『동국정운』과 함께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 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2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했다. 이 부분 역시 이 소설에서 역사의 한 장면으로 다루고 있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간의 교류 또한 유명하다.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했다. 그러나 1453년(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했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 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했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 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 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했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 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당시 그에게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인물한국사』에 「죽음으로 매화의 지조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충신」으로 기록된 성삼문은 형장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시를 낭낭하게 읊었다.(p.335~336)

 

목숨을 재촉하는 북소리 둥둥 울리는데(擊鼓催人命)

고개 돌려 바라보니 해는 지려는구나.(回頭日欲斜)

저승에는 주막집 하나 없다 하니(黃泉無一店)

오늘밤은 뉘 집에서 묵으려나.(今夜宿誰家)

 

저자 : 성해석

 

전남 여수 출생. 성균관대학교졸업, 한려대학교 사회복지경영학 박사를 졸업했다. 현대문예동부작가회 회장이었고 2010년 현대문예 시, 2011년 현대문예 수필로 등단했다. 2011년 ‘나의 꿈 우리들의 꿈’, 2017년 ‘새벽녘’ 수필집을 발간했다. 대통령 개인표창 2회, 단체표창 1회, 향군대휘장, 풀뿌리혁신의원상, 국제라이온스국제봉사상외 다수를 수상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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