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
서정욱 지음 / 온더페이지 / 2022년 11월
평점 :
독자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정식으로 배운 적도 없고, 학교 다닐 적엔 더더욱 없다. 미술 전공을 한 적도, 사회 생활하면서도 미술 공부를 위해 시간을 따로 내 배운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그림 감상하는 것은 좋아해서 그림 전시회, 특히 유명 서양화가 전시회는 자주 다녔다. 사실은 스스로 갔다기보다는 반 협박(?) 때문이다. 그래도 그림에 대해 수다를 떠는 자리에서 한두 마디는 거들 정도의 상식적 지식은 책을 통해 읽기도, 듣기도 했다. 때문에 배우자 '덕분'이라고 표현해야 맞다.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프리다 칼로에 대해서는 그동안 읽었던 미술 관련 책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화가이다. 서양미술사 책이나 그림 관련 책에서 작품 위주로 거론되기도 하고, 화가 위주로 설명하는 책에서서 적어도 한두 페이지에서, 많게는 십수 페이지가 할애되는 화가이다. 이 책 『프리다 칼로, 붓으로 전하는 위로』는 멕시코의 천재 화가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그 작품의 연관성을 통해 프리다 칼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쓰였다.
저자 서정옥은 「세상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그림」이라는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만약 '위로'가 필요해 그림을 감상한다면 이 책에 소개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소개한다. 그가 말하는 프리다 칼로는 배워서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니다. 소위 천재적인 화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겪기 힘든 시련을 겪었다고 언급한다. 그 시련이 천재성에 불을 붙이면서 칼로의 작품은 폭발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프리다 칼로에 대해 '천재'와 '당당한 여성'을 상징한다고 역설한다. 칼로는 미래를 촉망받던 예쁘고 똑똑한 학생이었지만, 한순간의 비극적 사고로 꿈꿨던 미래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자신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그려 극복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러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고된 삶에 지친 우리에게 삶의 희망을 북돋아준다. 저자가 위로를 위한 그림으로 첫 번째로 꼽는 이유이다. 저자는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자신의 심경과 순탄하지 않은 삶이 담긴 만큼 복잡하고 기괴해 언뜻 보면 다소 난해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초현실주의를 주창한 유명 작가 앙드레 브르통을 비롯해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등은 그녀를 천재적인 초현실주의 화가라고 극찬했다.
저자는 하지만 프리다 칼로는 누구보다 마주한 현실과 마음을 그대로 그려냈던 화가라고 강조한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극찬받았지만 누구보다도 현실적이었던 화가, 한순간의 비극적 사고로 평생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눈물을 흘렸고, 수없이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애증으로 관계를 끊지 못했던 화가 프리다 칼로. 미술관에서 다 전하지 못한 그녀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47점의 그림으로 전하고 있다. 이 책은 총 47점의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수록했다. 프리다 칼로의 생애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이 책은 그림과 함께 그 안에 담긴 그녀의 이야기를 소개함으로써 생생한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녀의 일생을 이야기하는 책인 만큼 대표작 외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림도 상당수 수록해, 프리다 칼로의 생애 전반과 당시 심경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이 책은 다른 미술 책과 다른 독특한 부분이 있다. 그림의 부분컷을 삽입해 그림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살펴보며, 프리다 칼로의 전시를 마치 큐레이터와 함께 관람하듯, 그녀의 작은 목소리, 생각 하나까지 꼼꼼히 전달한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출생했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기예르모 칼로)는 평범한 사진사였으며 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했다. 프리다 칼로의 집안은 가난했으며 어머니(마틸드 칼데론)의 우울증으로 유모의 도움으로 자랐다. 칼로의 어머니 마틸드는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해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으며 매우 열성적인 성격이었다. 칼로는 이런 어머니의 성격을 이어받았다.
1913년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가 쇠약해지는 장애가 생겼고, 이 때문에 내성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이 되었다. 1921년 의사가 되기 위해 국립예비학교에 다녔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러시아 혁명가에 심취하여 평생 공산주의 옹호론자가 되었다. 이때 학교의 벽면에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를 목격하고 심리적인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리베라는 유럽에서 돌아와 멕시코 문화운동을 주도하는 유명한 예술가로 알려져 있었고 칼로는 그의 작품과 인간적인 매력에 빠져 흠모하게 되었다. 리베라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1925년 18세 때 교통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을 크게 다쳐 평생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는 등 이 사고는 그의 삶 뿐만 아니라 예술 세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그가 화가가 되었을 때 작품 세계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1929년 연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결혼 이후 프리다는 리베라를 내조하느라 자신의 작품을 그릴 여유가 없었다.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이었지만 결혼 이후에는 남편 리베라와 함께 정치적 논쟁에 휘말렸으며 멕시코 공산당에서 탈퇴했다. 1930년 벽화제작을 의뢰받은 리베라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디트로이트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미국에서 프리다는 리베라의 그늘에 가려 항상 외롭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1933년 록펠러재단의 의뢰를 받고 벽화를 제작하던 중 레닌의 얼굴을 그려넣을 것을 두고 재단측과 불화로 벽화제작이 취소되었고 마침내 고향 멕시코로 돌아왔다.
멕시코에 돌아온 후 남편 디에고 리베라와 관계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리베라의 자유분방하고 문란한 여자관계는 급기야 프리다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게 되었다. 프리다 칼로는 극심한 고통 속의 나날을 보냈으며 이 당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몇 개의 작은 상처들〉(1935)이 남아 있다. 디에고 리베라에 대한 실망과 배신 그리고 분노는 프리다 칼로의 작품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939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출품하여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받았으나 프리다 칼로 자신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그해 유럽에서 멕시코로 돌아와 그해 11월 디에고 리베라와 이혼했다. 잠시 미국에 체류하면서 사진가 니콜라 머레이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녀에게 리베라는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사랑의 존재였다. 1940년 8월 프리다는 디에고와 다시 결혼을 했는데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성관계를 갖지 않는다는 조건을 요구하여 합의했다고 전해진다. 프리다의 삶은 매우 연극적이었고 항상 여사제처럼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했으나 남성에 의해 여성이 억압되는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했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에게는 20세기 여성의 우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작품으로는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남편 리베라 때문에 겪게된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고자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기 때문에 특히 자화상이 많다.
칼로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또다른 점은 세 번에 걸친 유산과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선천적인 골반기형 때문이었고 이는 고통스러운 재앙으로 받아들여져 〈헨리포드 병원〉(금속에 유채, 38×30.5㎝, 1932), 〈나의 탄생〉(금속판에 유채, 30.5×30㎝, 1932), 〈프리다와 유산〉(종이에 리소그래피, 31.7×23.5㎝, 1932) 등과 같은 작품들로 형상화되었다.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의 모습은 탯줄과 줄 혹은 뿌리 같은 오브제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상처받은 사슴〉(캔버스에 유채, 22.4×30㎝, 1946) 속의 그녀의 모습은 비록 여러 개의 화살 때문에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은 매우 투명하고 강한 빛을 발하는데 이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이 오히려 예술로 승화되었음을 나타낸다.
이후 프리다 칼로는 회저병으로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고 골수이식 수술 중 세균에 감염되어 여러 차례 재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극심한 고통속에서도 1953년 프리다 기념전이 열렸으며, 1954년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한 마르크스와 스탈린을 추앙하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해 7월 2일 디에고와 함께 미국의 간섭을 반대하는 과테말라 집회에도 참가했다가 7월 13일 폐렴이 재발, 사망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는 글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연결시켜 해석한다. 비극적 사고로 평생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던 프리다 칼로지만 그녀는 절대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죽기 8일 전까지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를 그리며 자신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녀는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가 아니었기에 독학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던 파격적인 방식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내며 각종 스캔들을 몰고 다닌 ‘마돈나’는 프리다 칼로의 열광적인 팬으로 알려져 있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았기 때문일까?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강인한 의지는 영국의 록 밴드 ‘콜드플레이(Coldplay)’에게도 영감을 주어 〈Viva La Vida〉라는 명곡이 만들어졌다.
프리다 칼로에게 화가의 길은 가혹한 운명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은 감상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고된 삶이 버거워 지쳤다면 이 책에서 위로를 받고 이겨낼 힘을 얻길 바란다고 저자는 권유한다.
오른쪽에는 커다란 달팽이가 빨간 줄에 묶여 둥둥 떠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이것은 유산의 느린 진행을 상징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즐거운 일은 빨리 지나가고 고통스러운 일은 정말 늦게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날은 몸의 고통뿐 아니라 마음의 아픔도 같이 겪었습니다. 괴롭고 아픈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을까요? 그 감정의 기억을 느린 달팽이로 표현한 것입니다.(p.232)
이 작품에는 프리다 칼로의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에 대한 기대가 동시에 그려져 있습니다. 사슴이 몸에 맞은 화살은 9개입니다. 사슴을 가두어놓고 있는 왼편 나무도 9그루입니다. 사슴 머리 위로 솟아 있는 뿔 끝도 세어보면 아홉입니다. 아홉은 완벽한 숫자로도, 불길한 의미로도 해석됩니다. 프리다 칼로는 작은 무언가에도 기원을 담아 정성을 다하는 중인 것입니다.(p.280)
저자 : 서정욱
2008년 서정욱갤러리를 시작하여 다양한 기획 전시를 진행했고, 다수의 잡지와 신문에 미술 칼럼을 기고했다.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이 미술을 어렵고 멀게 생각한다고 느껴 2009년 〈서정욱 미술토크〉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서울시 인터넷 방송, 애플리케이션, 팟캐스트를 거쳐 지금은 YouTube와 Naver TV에서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미술이 많은 사람의 삶에 함께하길 바라며, 미술을 쉽게 알리는 일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림 읽어주는 시간〉 (한국어판, 중국어판), 〈그림이 위로가 되는 순간〉, 〈1일 1미술 1교양 1, 2〉, 〈나만의 도슨트, 루브르 박물관〉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