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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
이동연 지음 / 창해 / 2023년 1월
평점 :
세계적 화가 중 큰 자리를 차지하는 거장들의 면모를 짚어낼 때 고흐(Vincent van Gogh)를 빼놓을 수 없다. 어쩌면 그의 작품보다 더 잘 알려진 불행한 일생 때문이지 모르지만, 그는 서양미술사나 예술사, 또 예술가들의 목록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독자도 관련 책을 볼 때마다 고흐는 거의 거기에 있었다. 독특한 붓터치로 놀라운 작품 세계를 그려낸 이유이겠지만 그때마다 거론되는 그의 정신병력과 젊은 나이에 자살을 택할 정도로 불행한 삶이 덧대어져 그는 드라마틱한 예술인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특히 생전에는 단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더 평자들의 의식 속으로 파고 들어가 강렬한 이미지로 인식돼 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다. 고흐는 짧은 화가 인생 10년 동안 유화 900여 점과 드로잉 1,100여 점을 완성했다고 한다.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그렸다고 독자는 판단하고 있다. 과연 그 모든 작품이 지금까지 어디서인가 보존돼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이 책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흐라는 화가 한 사람의 작품과 그와 교류했던 화가나 예술가 등, 그의 일생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낸 작품론이자 작가론으로 쓰여졌다. 그동안 독자는 고흐의 생애 겪었던 수많은 일들과 말이 어떻게 남아 있을까에도 의문을 품었다. 짧고 비사교적 인생을 살았다고 봐야 하는데도 어떻게 고흐의 행적이 그토록 자세하게 남겨질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 책과 함께 말끔히 씻겼다. 그의 평생 후원자와 보호자의 역할을 했던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고흐는 다른 예술인들과의 교류를 특별히 하지 않았기에 그가 남긴 말들은 오롯이 편지에 남긴 말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편지 내용을 토대로 고흐의 일생을 서사 형식으로 써내린 독창적인 고흐 일대기이다.
이 책의 저자 이동연은 KBS 해피FM 〈그곳에 사랑이 있었네〉에 다년간 출연하며 ‘예술가와 뮤즈’를 다루었고, 그때 고흐를 방송한 인연으로 이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저자는 “그래 자연에 폭풍의 드라마가 있듯 인생에 역경의 드라마가 있지. 그래도 약간의 여유와 약간의 행복이 있어. 그 형태를 실루엣으로 느끼게 하고 싶어”라는 고흐의 말이 고흐에 대한 책을 쓰는 동기가 됐음을 밝히기도 했다. 릴케가 쓴 ‘큰 슬픔이 우리를 자신에 얼마나 더 가깝게 하는가’라는 글을 읽고 고흐가 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책은 모두 7개 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 「해바라기가 피었습니다」, 2장 「둥지」, 3장 「노란 집을 빌리다」, 4장 「고흐와 고갱, 가까이하기엔···」, 5장 「스스로 택한 고독의 길」, 6장 「별이 빛나는 밤에」, 7장 「들판과 밀밭과 까마귀와 뿌리」 등이다. 독자들이 고흐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도판 자료 170여 점과 함께 소설을 읽듯 흥미진진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편집했다. 고흐는 멋진 풍광보다는 그 내면을 끄집어낸 그림을 그리고, 미화된 삶보다는 인생 그 자체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길지 않는 고흐의 삶은 인간이 경험할 만한 사연이 모두 담겨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희로애락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흔적이 그림에 담기면서 역사상 최고의 공감을 일으키는 명작이 탄생한 것이다.
책은 고흐의 평범한 출생으로 시작한다. 1853년 네덜란드의 시골 준데르트에서 태어나 네 살 아래 동생 테오와 벌판을 뛰놀며 자랐다. 일찍이 학교를 그만두고 16세에 구필 화랑의 헤이그 지점에 취직해 그림 판매상이 되었는데, 영업 솜씨가 좋아 19세에 영국 런던 지점으로 승진 발령을 받았다. 여기서 하숙집의 딸 외제니 로이어와 달콤한 관계를 맺는데, 나중에 그녀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져 자청해서 파리 본점으로 떠났다.
이후 고흐는 실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화랑을 그만둔 그는 어려운 사람을 돌보며 살겠다고 신학교로 간다. 광산촌으로 가서 전도사로 활동하던 중 성직자들의 위선에 실망해 신앙을 버리고는 깊은 번민 끝에 결심한다. ‘그래, 내 그림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지자. 힘겨운 실상을 그림으로 그리자. 한 장의 그림이 천 마디의 설교보다 더 감동이지. 그림을 본 사람들이 고흐는 마음이 참 따뜻하다고 말하게 하자.’고 결심한 것으로 저자는 전한다. 물론 테오에게 한 편지 속이었을 것이다.
고흐는 이 결심을 파리 구필 화랑에서 그림을 판매하던 테오에게 알렸고, 테오도 기뻐하며 형이 좋은 화가가 되도록 최대한 후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고흐가 천직을 찾은 과정이다. 그 뒤 37세까지 10년 동안 고흐는 파란만장한 화가의 삶을 살았다. 이 기간에 유화 900여 점과 드로잉 1,100여 점을 완성했다. 그중 팔린 작품은 딱 한 작품이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고흐의 작품이 훗날 역사상 최고가(지금은 바뀌었다)를 형성할 줄을……. 반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이 1990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 달러에 낙찰돼 미술계는 물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뉴스로 한동안 인구에 회자된 작품이다. 이 책 259쪽에 실려 있다. 이 작품은 고흐가 그린 3점의 가셰(당시 고흐의 정신과 의사) 초상 중의 하나로, 초상 작품의 걸작이다. 의사는 우리들 시대의 침울한 표정'을 가졌다고 고흐는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90년 5월 15일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의 제지사업자 료에이 사이토에게 낙찰되었다고 당시 뉴스는 전하고 있다.
책에 따르면 고흐가 화가로 첫발을 내디디면서 세웠던 모델이 시엔(Sien)이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돕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랑으로 발전했지만, 양가의 반대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뒤 고흐는 시엔과 그녀의 두 자녀를 버렸다는 후회로 괴로워한다. 사실 고흐 탓이 아닌데도 이 자책감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심적 부담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가 그리려는 대상은 영웅, 위인, 미인, 화려함 등이 아니었다. 황량한 대자연과 거기서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런 리얼리즘적 특징이 〈감자 먹는 사람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그림은 고흐의 염문설과도 관련이 있다. 물론 염문설은 한 성직자가 고흐의 모델이 되지 말라며 선동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이었다.
당시 고흐는 옆집에 살던 마르호트 베헤만과 열애 중이었다. 그녀는 고흐보다 열두 살 연상으로 직물공장 사장이었는데, 그녀의 가족이 혹시 경영권이 고흐에게 넘어갈까 봐 둘 사이를 반대했다. 이 사랑도 이루지 못하자 고흐는 파리로 떠나 테오의 집에서 기거한다. 그 시대 아방가르드였던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이 자주 모였던 곳이 몽마르트르의 카페 탕브랭이었다. 이 카페의 여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가 고흐에게 호감을 가져 둘은 연인관계로 발전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이 시기 고흐의 무겁고 진지했던 화풍이 인상파의 영향으로 한껏 밝아졌으며, 고흐는 세가토리에게 결혼하자고 졸라댔다. 하지만 세가토리는 수입이 한 푼도 없는 고흐의 미래를 불안하게 보고 안녕이란 말도 없이 고향 이탈리아로 떠나고 말았다. 마침 테오가 결혼할 때가 되어 고흐도 테오의 집에서 나와야만 했다.
딱히 파리에서 오갈 곳이 없어진 고흐는 테오의 도움으로 남프랑스 아를로 내려가 노란 집을 얻었다. 그는 이곳에 아틀리에를 꾸미고 파리의 화가들을 불러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꿈을 꾼다. 그 일환으로 여러 화가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고갱만이 이에 호응했다. 아를에서 고흐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지누 부인과 우체부 룰랭을 만났다. 그리고 유럽 최고 재벌가의 아들인 외젠과는 친구가 되었다. 이곳에서 고흐의 최고 명작으로 꼽히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 〈병에 담긴 15송이의 해바라기〉 등이 탄생했다.
하지만 고갱과 고흐가 그림 스타일에 대해 논쟁을 벌이다 급기야 고갱이 머나먼 타히티로 가기 위해 노란 집을 떠나게 된다. 그때까지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팔리지 않는 데다가 고갱까지 떠나자 고흐는 주체할 수 없는 실망 속에 빠져든다. 무엇보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이상 그림도 그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물감조차 사기 어려웠던 것이다. 절망의 나락 속에서 고흐의 눈에 고갱의 펜싱 검이 보였다, 그는 부지불식간에 그 검으로 자기 귀를 잘랐다. 급기야 헌병이 달려오고, 이때부터 고흐가 미쳤다는 소문이 아를 지역 전체에 퍼졌다. 그래도 작업에 열중했지만 헌병대에서 수시로 고흐를 불러 조사했다. 그럴 때마다 지누 부인과 룰랭 가족 달려와 고흐를 감싸주었다, 이런 정황이 고흐를 또다시 자책의 구렁텅이로 밀어넣었다.
‘왜 나는 늘 이렇게 끝나지? 가족과도 연인과도 이제는 이웃까지도……. 무엇 때문에 매사가 내 본래 뜻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걸까? 결국 테오와도 사이가 나빠지는 것은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몸서리칠 일이야. 테오가 나 때문에 쓴 돈이 도대체 얼마야? 꼭 갚아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돈을 벌 방법은 그림밖에 없다. 그런데 팔리지 않으니 어쩌면 좋은가. 언젠가 팔리긴 하겠지만, 그때까지 테오에게 의지해야 하다니…….’
이런 외로운 상황 속에서 고흐는 어릴 적 듣던 자장가나 바그너의 음악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으며, 수시로 찾아오는 룰랭을 의지하며 견뎌내려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고흐를 ‘빨간 머리 미치광이’라 부르고 아이들이 무서워 외출하지 못한다며 헌병대에 고흐를 격리시켜 달라는 탄원서를 계속 넣었다. 이 모든 것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는 일방적인 악평이었지만, 민원제기에 시달린 헌병대장은 고흐를 입원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때 룰랭이 이렇게 탄식했다.
“세상에, 고흐처럼 정 많고 여린 사람을 우리가 품어주지 않으면 어떡하는가!” 그 뒤에도 고흐의 창작 열정은 지속되었다. 〈올리브나무의 숲〉,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첫걸음〉, 〈황혼의 산책〉, 〈비탄에 잠긴 노인〉 등등 희대의 명작을 계속 쏟아냈다.
고흐는 라부 부부의 여인숙 3층에서 5월 20일부터 7월 29일까지 약 70일 동안 기거하며 80여 작품을 남겼다. 매일 한 작품 이상을 그린 셈이다. 고흐는 이 시기에 비록 파이프를 물고 담배는 피웠지만 압생트도 끊고 독서와 편지, 예술 활동에만 전념했다. 고흐가 얼마나 정확히 움직였던지 동네 사람들은 고흐를 칸트처럼 ‘움직이는 시계’라 불렀다. 그런 고흐가 아낌없이 시간을 보낼 때는 천진난만한 아이들과 더불어 장난을 칠 때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웃들은 고흐를 세상 어느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이라 생각했다.(p.236)
보들레르도 춤을 ‘팔다리로 부르는 시’라 했던가. 바람이 분다. 밀밭이 황금색 물결로 출렁이는데, 고흐는 물랭루주에서 보았던 춤을 기억하며 그대로 춰본다. 어디선가 총소리 한 방이 들렸다. 밀 이삭을 파 먹으려는 까마귀 떼를 쫓기 위해서 그러는 모양이다. 평소 추지 않던 춤을 추니 세상이, 밀밭이 돌고 돌고 또 돈다. 하늘도 태양도 돈다. 고흐는 새하얘진 얼굴로 가슴을 부여잡고 하숙집 계단을 올라갔다. 주인 부부와 딸이 놀라서 물었다. “왜 얼굴이 그렇게 창백해요? 가슴에 있는 그 빨간 자국은 뭐고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페인트 자국일 뿐…….”(p.269~270)
저자 : 이동연
이동연 작가는 KBS 해피FM <그곳에 사랑이 있었네>에 다년간 출연하며 ‘예술가와 뮤즈’를 다루었고, 그때 고흐를 방송한 인연으로 이 책을 내놓게 되었다. 주요 저서로 《명작 뒤에 숨겨진 사랑》《명작에게 사랑을 묻다》《예술, 사랑에 미치다》《심리학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심리학으로 읽는 삼국지》《심리학으로 들여다본 그리스 로마 신화》《심리학으로 읽는 손자병법》《있는 그대로 나를 바라보기》《대화의 연금술》(삼성생명 콘텐츠 제공) 《그래, 한 박자 느리면 어때》《명작으로 읽는 통섭의 한국사》《365일 니체》《이기는 리더십 10》《CEO형 인재》《행복한 꿀잠》등이 있다. 소설 작품으로는 《삼별초》가 있으며, 《소설 손자병법》을 곧 발간할 예정이다.
온라인 기업 콘텐츠(E-Learning)에 베스트셀러 《조선왕조실록 500년 리더십》과 《조선 야사로 본 비즈니스 전략》《김진명의 고구려 한민족 최강의 리더십》등이 출시 중이다. 삼성SDS, 우리은행, 한국산업단지공단 등 주요 경영잡지에 기고했고, YTN, SBS, MBN, BBS, WBS, EBS 등의 방송 매체와 KIRD(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EMC, 대학교, 공무원 핵심 리더 과정 등에서 강의를 해왔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