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 - 소외된 노동계급의 목소리에서 정치를 상상하기
제니퍼 M. 실바 지음, 성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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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라질 수 없는 사람들』은 미국 노동계급이 일상의 투쟁, 승리감, 희망, 공포를 어떻게 정치와 연결하는지를 탐색한다.(p.18) 저자 제니퍼 M. 실바는 책의 서론 「노동계급 정치의 난제」에서 이같이 밝힌다. 이에 따르면 미국에서의 안정적인 블루칼라 일자리는 지난 수십 년간 자동화되고 사라지고 해외로 이전되었다. 정치인들은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 안전망을 축소하고 단체 협상권을 약화시켰으며 노동자의 기본적인 생존 욕구보다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면서 노동계급의 권력을 점점 무력화했다. 아메리칸드림의 핵심 약속인 자식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할 기회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적 동원으로 가장 많은 득을 볼 집단들은 함께 떨쳐 일어나 정의와 기회의 정당한 몫을 위해 싸울 의지가 없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려는 의욕이 가장 적은 듯하고 말하고 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양극화와 불평등이 가속화되고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는 그 어느 때보다 커져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보일 정도다. 많은 전문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두고 온갖 제언을 쏟아낸다. 하지만 빠진 게 있다. 당사자의 목소리, 즉 가난한 노동계급의 목소리다. 저자 제니퍼 M. 실바는 그동안 노동계급의 삶과 문화, 불평등을 주제로 활발히 저술 활동을 했다. 노동계급의 소외는 가속화되고 미국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로 짚어내고자 했다. 저자가 미국 동부의 탄광촌 콜브룩으로 떠난 건 이 때문이다.

 


 

실바는 마약, 범죄, 가난, 폭력 등의 문제가 가득한 탄광촌 콜브룩에서 가난한 노동계급이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 하루하루의 힘겨운 일상에서 어떠한 감정의 구조를 구축했는지를 면밀히 살핀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삶과 영혼, 그들의 일상을 잠식한 고통에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정치적 가능성을 벼려낸다. 흐릿해지고 있으나 사라질 수 없는 존재들을 위한 정치학 말이다. 저자는 가난한 노동계급의 삶을 성실하고도 입체적으로 재현하여 지금껏 누구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 세계로 독자를 인도한다.

저자는 섬세하고 배려 깊은 인터뷰로 노동계급 구성원이 마주한 고난이 무엇인지, 그들은 그 고난을 어떻게 대처해나가는지를 조명한다. 이 책이 저자가 콜브룩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직접 듣고 보고 느낀 점을 함께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분석해낸 결과를 이 책에 세세하게 담아 냈다. 저자는 노동계급을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콜브룩의 모든 노동계급이 공통으로 마주한 엄혹한 현실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이들을 백인 남성과 여성, 흑인 및 라틴계 남성과 여성의 네 집단으로 나누어 내부의 차이에도 주목한다. 이로써 저자는 각 인구 집단이 삶, 미래, 자아를 이해하는 방식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노동계급을 위한 정치가 단순하고 평면적인 차원을 넘어서 복잡하고 정교하게 기획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이에 따라 노동계급 백인 남성은 미국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이 훼손된 상황에 고립감, 목적 상실, 억울함을 토로한다. 이들은 파편화되고 해체된 남성성의 잔해들 앞에서 길을 잃은 채 서성이는 중이다. 한편 노동계급 백인 여성들은 어떻게든 ‘어머니’, ‘아내’의 역할을 지키려 악전고투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트라우마로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낸다. 콜브룩으로 새로 이주해온 유색 인종은 힘든 상황에서도 미래를 조금 다르게 전망한다. 흑인 및 라틴계 남성은 콜브룩에서 자신의 수치스러운 과거를 걷어내고 아이들의 밝은 미래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가난뿐 아니라 인종에 대한 차별로 어려운 일들을 겪지만 이 모든 고통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과정으로 수용한다. 이는 흑인 및 라틴계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유색 인종 여성들은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홀로 설 가능성을 모색하기도 한다.

저자는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를 섬세히 검토하는 동시에 모두를 아우르는 정치적 기획으로 나아간다. 콜브룩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공유한다. 가난한 노동계급은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 연대가 필요한 상황인데도 파편화되어 개별적으로 생존 전략을 구사하는 중이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노조, 정당, 지역 사회, 공동체, 이웃 등 전통적 준거점을 완전히 휩쓸어 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자기 계발에 탐닉하고 개별적으로 구원을 갈구한다.

 


 

또 그들은 누구도 자신을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박탈감에 선거를 포함한 모든 공적 제도를 불신한다. 공적 제도에 대한 불신이 점점 커져 각종 음모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나아가 별다른 노력 없이 정부가 제공하는 혜택으로만 생활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며 자신을 그런 사람과 구분하고자 한다. 좋은 삶은 자신의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만 가능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가난이 야기한 현실적 어려움과 문화적 수치심을 개인 탓으로 돌리며 자기 자신을 책임의 주체로 내세운다. 요컨대, 콜브룩 노동자들은 정치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태다.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고통이 있다. 저자는 자조, 경멸, 분노, 냉소, 희망이 어지러이 교차하는 콜브룩에서 ‘고통을 중심으로 구축된 친밀감’을 토대로 새로운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한다.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개인과 공동체가 고통받는 존재라는 동질감을 바탕으로 ‘우리’라는 감각을 형성해 다시금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통을 수치스러워하며 숨기는 대신 모두의 경험으로 의미화하면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사회적 유대의 가능성이 싹틀 수 있다. 저자는 “변화의 가능성은 고통 당사자들이 공동체를 꾸릴 때 찾아온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의 자원은 가난한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계급적 고통이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낡은 희망 모델이 더는 작동하지 않는 스산한 탄광촌 콜브룩. 바로 이곳에서 새로운 동맹과 미지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

 


 

독자는 미국에 가본 적도 없고 미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를 공부할 이유를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일제강점기 때 미국이 전쟁에 이김으로써 우리의 해방을 빠르게 앞당겼으며, 6·25 때 군대를 파견해 대한민국을 지켜주었다는 감사를 느낄 만한 나라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배우고 느낀 바가 없다. 그들의 문화는 경제력에 의해 독자의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고, 그들의 민주주의 역시 우리나라의 군부 독재를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독자의 신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약점인 빈부 격차를 느끼기엔 압도적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뉴스나 소식은 자주 들어왔다. 쉽게 말해서 독자는 미국을 부러워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나라였다.

여전히 인종 차별이 있긴 하지만 조금씩은 나아지고, 소수자 및 소외 계층에 대해 우리보다는 사회적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으리란 막연한 기대마저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의 시민(국민) 보호보다는 부자를 위한 나라가 아닌가? 하는 의심으로 완전 버렸다. 그토록 탄탄하고 우월한 경제력을 갖춘 나라가 어찌 자국의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는 허술하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돈이 없는 사회 하층은 감기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할 정도로 의료비가 비싼데도 또 의사나 의료 재단(큰 병원)은 왜 수입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적을까 하는 의심도 덧대어졌다. 이 책은 미국의 하부 구조라고 불리우는 사회 저소득층, 인종, 성별, 학력 등에서 빈자들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를 던져주었고, 그 삶은 우리는 그래도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계 최강국이고 최부국인 미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미국 정부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인가? 사라져야 할 사람들인가?

 


 

저자는 이 책의 뒷 부분에 별도로 '결론' 「죽은 공동체에 생명을 불어넣기」라는 장(章)을 마련하고 "펜실베니아의 무연탄 탄광촌에서 노동계급의 정치적 태도와 정책 선호를 탐구하는 데서 출발했다"며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고 거침없이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을 찾기는 어려운 대신 내가 만난 사람들은 한때 사적인 자아를 정치 영역과 연결해주던 각종 제도와 분리되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지금 아주 미미하고 느린 변화는, 이들의 미래를 가로막는 위협과 이들의 역사에서 패턴화되어 나타나는 적대와 고립에 맞서는 매일의 국지적인 도전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꾸준한 전개 과정과 그 우발성 속에서 희망은 보글보글 피어오른다고 다소 희망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사실 이런 미국의 현실에 대해 독자가 큰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 다만 우리나라가 잘못된 사회 시스템을 따라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이 책을 읽는다. 생각보다 매우 자세하게 탐구했다는 데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의외로 쉽지 않은 문장으로 계속돼 다소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문장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갖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독자의 미국에 대한 무지 때문이리라 생각해 본다. 정수남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의 '해제' 「빗장 걸린 세계의 묵시록,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독자의 무지와 우려를 훨씬 큰 울림으로 해소해 주었으며 독자의 생각을 대변해주는 말이 담겨 있어 눈길이 간다. "실바는 콜브룩에 거주하는 노동계급을 인종 그리고 젠더별로 구분하여 각각의 특징을 드러내지만 노동계급의 삶 전반을 관통하는 사회구조적 논리를 우회적인 방식으로 드러내 보인다. 나는 실바가 빈곤한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비판하고자 한 계급 불평등을 '투견장'과 '빗장 걸기'라는 다소 도발적인 개념으로 표현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중략) 실바의 논의는 우리 사회에도 함의하는 바가 매우 크다."(p.357~360)

 


 

"이 책에 등장하는 노동계급 인간 군상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외국인 혐오로 분열되어 있으면서도 하루 9달러로는 가족을 부양할 수 없다는 데, 극도의 불평등이 민주주의를 훼손한다는 데, 우리가 타자와 반드시 맺고 살아가야 하는 관계를 유실했다는 데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중략) 이들의 증언으로 판단컨대, 노동계급 가정에 우호적인 경제 정의를 정강의 중심에 놓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유리한 성장의 기회를 독려하고, 금융 엘리트와 정치 엘리트의 결탁을 서슴지 않고 비판하는 정치인이 이들의 지지를 얻을 것으로 보인다."(pp.333~335)

 

저자 : 제니퍼 M. 실바(Jennifer M. Silva)

인디애나 대학교의 ‘폴 오닐 공공 및 환경 업무 대학’ 조교수(2019~)로 정치 문화, 사회 계급, 불평등, 성인기로의 이행 등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2004년 웰즐리 칼리지를 졸업하고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사회학으로 석사 학위를, 2010년에는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버크넬 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로 있으면서 문화와 불평등을 연구하는 사회학자로 이름을 알렸다. 또한 하버드 대학교 박사 후 과정 중 경제 불안이 사회적 유대감과 시민적 참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2013년에는 첫 저작인 『커밍 업 쇼트』를 출간했으며, 대중적 글쓰기도 활발히 병행해 연구 내용을 『뉴욕 타임스』, 『뉴요커』, 『보스턴 글로브』, 『디 애틀랜틱』, 『보스턴 리뷰』, 『살롱 닷컴』 등에 실었다. 2019년에는 쇠퇴 중인 한 탄광 도시 거주민들을 인터뷰해 이들이 미국 정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분석한 『우린 여전히 여기에: 미국 심장에 놓인 고통과 정치』를 출간했다.

 

역자 : 황성원

학부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지리학을 공부했다. 환경, 여성, 노동, 도시 등을 주제로 한 여러 학술서와 대중서를 번역해왔다. 책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배우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이 어느덧 업이 되었다. 책을 통한 사색만큼 물질성이 있는 노동을 사랑한다. 물론 균형 잡기는 항상 어려운 문제다. 옮긴 책으로 『자본의 17가지 모순』, 『백래시』, 『캘리번과 마녀』, 『혼자 살아가기』, 『저항주식회사』, 『쫓겨난 사람들』, 『칼을 든 여자』, 『염소가 된 인간』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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