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인생 수업 -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당신에게
성지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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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세 시대'란 말이 이젠 자연스럽다. 이 말이 나온 지 불과 10년도 안 된 말인데도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함께 긍정적 방향으로 장수와 건강의 문제에 접근하려는 사람들 덕에 유행어처럼 확산된 때문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사실 100세라는 인간의 수명으로 치자면 '꿈의 나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간혹 100세 이상의 수명을 누린 이들이 적잖은 탓이리라. 인간의 수명이 크게 늘어난 것은 의학의 힘이 크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명학자들은 의학의 힘에 덧대어 '생명' 운동의 역학적 기능으로 이를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100세는 누구나(?) 원하지만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따른다. 바로 건강이다. 이 건강은 육체 건강과 정신 건강 모두를 이르는 말이다. 이 책 『어른의 인생 수업』은 100세 시대(‘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에 인생의 절반을 통과한 저자 성지연이 지금까지의 삶을 반추하며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인문 에세이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고전, 역사, 철학, 소설, 시, 에세이, 예술, 경제,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넘나들며 인생에 관한 통찰을 전한다. 셰익스피어의『리어왕』을 통해 리어의 오만함을 꼬집으며 노년의 부모와 자식 간의 건강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읽으며 시대와 국경을 초월한 삶의 보편성을 말한다. 또한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를 통해서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풀어내고,『초고령사회 일본에서 길을 찾다』를 이야기하면서 나 자신만의 행복한 노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내 나이쯤 되면 삶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선명해지고, 더는 흔들릴 일이 없는,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될 줄 알았다. 젊은 사람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런 건 없다. 외려 반쯤 남은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만 더 급해진다.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건지, 앞으로 남은 삶에선 어떤 의미를 찾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를 지금 생각해놓아야만 한다.” 저자가 남긴 출간의 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자도 이미 공자의 '오십 지천명'과 링컨의 '사람의 나이 40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들은 들은 바 있다. 나이 50이면 중년의 나이로 사회적 인식이 돼 있다. 굳이 100세 시대가 아니어도 훨씬 이전부터 50엔 중년에 접어든 나이라고 생각해 왔다. 중년이 되면 이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았다는 비관적 시선보다는 아직 살아갈 날이 지나온 날 만큼 남아 있다는 낙관적 해석이 훨씬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서의 이야기이지 실제 현장에서는 50이면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부터, 자신의 활동 범위가 그만큼 좁아지고, 사회에서의 대우도 점점 줄어드는 것은 느끼게 된다. 즉 앞으로 남은 최소한의 삶을 위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되는 나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인생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다’라고 하기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인생에 관한 깨달음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이 때문에 독자들도 자신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게 만든다. 저자가 살뜰하게 골라낸 인생의 말들 덕분에, 이 책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힘든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고 행운을 빌어주는 저자의 응원의 목소리에 유대감도 생긴다. 이 책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나이 50이 되면 이제 절반이다라는 인식보다는 이후 생계 문제부터 시작한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에서 지금 중년의 나이 50에 들어선다면 1970년대 생이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가난을 면하려는 부모의 피땀어린 노력을 보고 자랐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대학까지 보낸 경우라면 더 절실하게 느꼈을 것이다. 열심히 일한 이유가 생계 해결과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는 데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식하고 보고 느낀 세대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녀를 키울 때는 수입도 크게 늘어 생계 유지뿐만 아니라 레저 등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놀이문화도 어느 정도 익숙해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런 사이에 끼어 있다는 인식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 인식은 주위로부터 온다. 똑같이 열심히 일했는데도 어떤 사람은 자녀 유학을 보낼 수 있는데 다른 어떤 사람은 유학은커녕 대학까지 가르치면 다행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삶을 절실히 느끼는 것이다. 소득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아직은 노후가 함께 마련될 정도로 수입은 아니었다는 벽에 부딪치는 세대다.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세대의 아픔을 겪을지라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인식이다.

노후 대책에 대한 수많은 책을 통해 얻은 것이라고는 최소한의 경제적 문제, 새로운 취미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방법 등에 관한 책은 많다. 그러나 돈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노후 문제이다. 국가의 복지에만 의존할 수도 없는 상태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씀씀이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씀씀이를 줄여서 책들이 제시하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해가기에는 역부족이다. 예전에는 자식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도움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라도 지금 중년은 그것도 기대할 수 없다. 스스로 많이 낳는 것보다는 적게 나아 많이 가르치는 방법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는 것이 두렵고 후회와 불안으로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주변 사람들과 자꾸 비교하게 되면서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 다른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버겁냐고 사회 현실의 탓을 하는 수도 있다. 경제적 현실의 벽에 부딪쳐 하고 싶었던 일을 시도조차 하지 못할 때,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참고 다녀야 한다. 이런 일은 익숙해서 어렵지 않다. 사실은 익숙해서 일한다기보다 다른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음악을 듣거나 공연을 보면서 위로를 받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친구들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달랠 것이다.

우리 독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고민을 안고 있는 저자는 인생의 고비를 맞닥뜨릴 때마다 마음의 방에 자신을 가둔 채 우울해하면서 주변 사람을, 상황을, 세상을 탓하기보다 수많은 책을 읽으며 책 속의 또 다른 어른들이 들려주는 말들을 통해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한다. 사실은 그것도 저자 자신이 해오던 일이어서 계속했을 뿐일 수도 있다. 다만 저자가 해온 일이 당시엔 인기 없는 인문학적 분야의 일이어서 선택 당시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고전으로 불리우는 책은 많이 읽었다.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고전을 통해 노후까지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마지막 방법일지도 모른다. 저자보다 앞서 인생을 살다 간 어른들부터 저자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어른들의 말들은 저자가 삶을 사유하는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무채색에 가까웠던 저자의 일상을 무지갯빛으로 바꾸어놓았다는 생각이라니 말이다.

 


 

저자는 밤하늘을 밝혀주는 수많은 별처럼, 자신이 걷고 있는 인생길의 불을 밝혀준 많은 책들 중에서 50권을 가려 뽑아 그곳에서 길어 올린 삶의 깨달음을 전한다. 이를테면 『노인과 바다』를 “삶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 건, 이만한 나이를 먹고 보니 삶은 성공도 실패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나온 삶에는 여러 성공과 실패가 섞여 있다. 내 낚싯줄에 어떤 물고기가 걸릴지 알 수 없듯, 성공도 실패도 내 뜻대로만 되지 않았다. 언제 물고기가 튀어 올라 상처를 낼지 알 수 없듯, 삶의 모든 일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또한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고서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상기해본다. “연극으로 보지 못하고 대본으로만 『밤으로의 긴 여로』를 읽는 데는 시간이 적잖이 들었다고 털어놓는다.

작품 속 가족 이야기를 마주하기가 힘들었고, 또 자꾸 내 가족 이야기를 떠오르게 했다. 이 희곡을 쓰기 시작했던 쉰한 살의 오닐처럼 우리나라 대다수 오십 대에게 가족은 두 겹으로 이루어진 삶의 울타리다. 태어나면서 운명으로 주어진 가족이 한 겹이라면, 내가 선택한 가족이 다른 한 겹이다.” “나는 어릴 적 엄마에게 많이 야단맞으며 컸다. 엄마는 예민하고 엄격했다. 거리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결혼한 후 엄마와 다시 사귀게 되었다. 저자의 책 읽기는 삶의 수단이기도 했지만 삶의 지향점이 된 것으로 독자들이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책에는 저자가 아이를 낳고서야 엄마가 셋이나 되는 아이를 친정에서 먼 타지인 부산에서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처음에는 가까운 친구들조차 없었으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엄마의 어려움과 외로움을 생각해봤다고 해서 우리 모녀간의 거리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엄마라는 존재를 이해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심리적 거리감은 한 뼘 정도 가까워진 셈이다는 말을 쓴 것으로 보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자의 고백적인 서술은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제 남은 내 삶에서 나는 엄마의 삶을 얼마나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삶이 오닐의 말처럼 여로(旅路)라면, 나의 이 여행 끝에선 엄마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서 있길 소망한다.” 이 같은 서술들은 책 속에서 수없이 발견된다. 이것이 그동안 그의 삶을 지탱해줬음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아울러 이 책을 내게 된 것도 그때에 쌓아두었던 인문학적 소양이 밑거름이 되었다. 저자는 ‘죽음’과 가까워지는 나이에 이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을지’를 고민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누구나 나이 듦을 피할 수 없으며 종국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인생은 덧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은 결국에는 그 유한함에 있기 때문은 아닐까?

저자는 남은 인생의 후반전을 잘 살아가고픈 마음에서 『파우스트』(1831)에서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까지, 고전, 역사, 철학, 소설, 시, 에세이, 예술, 경제, 자기계발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섭렵하며 이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선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인생에 대한 통찰이 녹아 있는 인문 에세이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독서 에세이로도 읽힌다. 더군다나 저자의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독서력 덕분에 우리의 세계는 한층 더 깊고 넓어진다. 인문학적 소양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갖는 것이며, 때때로 주변 사람들에게 안부를 건네고 주위를 돌아보고 챙길 줄 아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진 삶이다. 얼핏 진부해 보일 수 있는 결론이지만, 인생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평범하면서도 우리들 가까이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수많은 어른의 인생들을 통해 저자가 깨달은 ‘좋은 삶’이란 자기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가지고 있으며 원하는 것을 마음껏 살 수 있을 만큼 경제적으로 풍족한 삶이, 사회적으로 누구나 우러러볼 만큼 성공한 삶이 아니다. 저자가 남은 인생에서 지향하는 바이자 그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무엇일까. 나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고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다른 사람이 잘되었을 때는 진심으로 축하해줄 줄 아는 것이다. 타인과 비교하느라 후회와 불안으로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않는 것이다. 성공의 유무와 상관없이, 설령 나이가 많다고 하더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도전해보는 용기를 내는 것이다.

 

너무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이 오히려 행복을 해칠 수 있다. 남들은 다 행복한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럴까, 자책과 우울감이 깊어진다. 나이를 먹는 건 결국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좋지 않은 날도 있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다. 좋은 일은 좋은 일대로 즐기고, 좋지 않은 일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로 넘기는 것이 낫다.(p.318)

 

저자 : 성지연

 

197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부산으로 이사 간 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가 인간과 사회를 배웠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김수영의 시 연구로 석사학위를, 최인훈의 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잠시 일했다. 2019년 여름부터 2021년 겨울까지 『주간경향』에 ‘오십, 길을 묻다’를 연재했다. 2022년 봄부터 『여성동아』에 ‘성지연의 다시 만난 그녀들’을 쓰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정체성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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