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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이 있어 - 은모든 짧은 소설집
은모든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평점 :
소설은 서사시에서 발달한 이야기 쓰기 형태로 보이며,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작가를 소설가라 한다. 흔히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의 Novel을 소설이라고 간단히 번안하여 소설 전반을 범칭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Novel은 근대 장편소설을 지칭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소설 전반을 아우르는 범용어로 사용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한국에서 많이 쓰이는 단편소설의 경우 Novel 대신 Short Story라 한다. 중편소설은 이탈리아어인 Novella를 쓴다. Novel와 Novella는 ‘이야기’ 와 ‘소식’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소설 문학은 예부터 길이에 따라 장편, 중편, 단편, 꽁트로 분류해 왔다. 영어권 국가에서 소설은 6만~ 20만개의 단어 또는 300~1,300페이지의 길이로 장편, 중편, 단편, 콩트(掌編)로 구별된다. 예전 한국에서는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장편, 중편, 단편 모두 소설로 분류했다. 지금은 분량으로 구분하는 것 같지만 200자 원고지보다는 영어권의 분류에 따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편 근대 소설을 뜻하는 영어 Novel은 중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노벨라(이탈리아어: Novella)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로망스와 달리 노벨라는 데카메론과 같이 현실의 세태를 반영한 이야기가 특징이다. 소설은 희곡이나 운문에 비해 구성면이나 음률면에서 제한을 받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소설은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벌이는 행위를 다루게 된다. 소설의 기원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화, 서사시 등의 이야기이다. 즉, 서양의 그리스 신화나 한국의 주몽 신화 등의 신화에서부터 일리아드, 동명왕편 등의 서사시가 소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콩트는 단편소설의 길이보다 짧은 분량의 이야기를 말한다. 형식적인 분류인 소설의 길이로 나누는 것이니만큼 이야기의 구성이나 표현 등은 소설과 같다. 다만 길이가 짧은 만큼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기간의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하고 문장 또한 간결함을 생명으로 한다. 짧은 시간에 잘 읽히기 위해서는 강렬한 임팩트로 교훈이나 작가의 의도가 담겨야 하므로 훨씬 스킬이 요구되는 것처럼 느껴져서인지 어느 곳에서도 작가들의 호응도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 교훈이 담긴 옛날 이야기라는 의미의 콩트의 기원은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가 1697년 발표한 콩트집이라고 한다. 「거위 아줌마의 콩트」라는 부제로도 유명하다. 페로의 대표적인 콩트 열한 편이 담겨있다. 이 콩트 모음집의 기원은 샤를 페로의 셋째 아들 삐에르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 아들의 교육을 직접 맡았던 샤를은 아들들에게 작문 숙제를 자주 내 주었는데 특히 삐에르가 유난히 문필이 뛰어났다. 1694년 샤를은 15세가 된 삐에르가 공책에 적은 다섯 편의 콩트가 비록 서툰 면이 있지만 흥미로운 데다가 삐에르가 당시 비슷한 나이의 왕녀 엘리자스 샤를롯 도를레앙의 개인비서가 되어 출세를 할 수 있도록 글을 손보기 시작한다.
삐에르가 적은 주제를 기초로 하여 샤를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빨간 모자」, 「푸른 수염」, 「고양이 나리 또는 장화 신은 고양이」, 「요정들」 등을 지었고, 전문 서예가에게 맡겨 아름다운 글씨체로 필사하게 하였다. 여기에 샤를은 각 콩트의 주제에 맞는 그림을 직접 그려 넣기도 하였으며, 붉은 가죽 장정으로 제본을 하고 오를레엉 가문의 문장을 새겨 넣어 1694년 말 또는 1695년 초에, 아들 삐에르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보내게 된다.
이 책 『선물이 있어』에는 모두 17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단편소설집을 자주 읽는 단박에 눈치채겠지만 책 한 권이면 단편소설 7~8편이 담기는데 이 책에는 17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콩트라고 불릴 만한 소설들이다. 길이로 말이다. 그렇다고 새로운 장르의 시도는 아니다. 이 때문인지 출판사 측은 소설 『모두가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안락』, 『애주가의 결심』 등으로 독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 온 은모든 작가가 처음으로 선보이는 '짧은 소설집'이라고 소개한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연말과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짧은 소설에 최적화된 경쾌한 속도감과 산뜻한 유머 감각, 대담한 상상력으로 빚어낸 17편의 이야기가 멈출 수 없는 몰입의 시간을 선사한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문, 소설 속 열린 결말을 저지하는 조직, 수상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크리스마스이브의 바 등 매력적인 키워드로 일상과 환상을 연결한다. 또한 슬럼프에 빠진 무명 배우, 충청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60대 여성 특수 요원, 엄친딸의 비밀을 알게 된 초짜 마케터 등 개성 강한 인물들을 통해 삶의 다양한 가능성과 스펙트럼을 펼쳐 낸다. 이 책 『선물이 있어』에서는 은모든 작가 특유의 경쾌한 속도감과 산뜻한 유머 감각, 대담한 상상력이 짧은 소설이라는 장르와 만나 마법 같은 화학 작용을 일으킨다. 술술 읽히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웃다 보면 어느새 다정한 온기가 지친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데워 줄 것이다.
이 책 『선물이 있어』는 4부로 구성된다. 1부 〈스파이와 눈사람〉은 타인의 온기에 기대 인생의 혹한기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눈 내리는 도로에 갇힌 「싱글 대디」, 빠듯한 한 해를 버텨 낸 신혼부부 등이 타인을 보듬는 풍경에서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조직의 위기 상황을 타개할 구원자로 나선 충청도 출신의 중년 여성 특수 요원의 등장은 색다른 웃음과 함께 기존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새로운 유형의 캐릭터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2부 〈시간을 열면〉에서는 은모든 작가가 고택에서 묵을 때 구상하게 되었다는 조선 시대 마님 허 씨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안채에 갇혀 살았던 마님들이 우울증에 시달렸으리라는 짐작에서 출발한 이 인물은 스스로 시간의 문을 열고 나와 정신과 진료실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개성 강한 인물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의 문을 열게 된다.
3부 〈12월의 마지막 토요일〉에서는 이야기의 범주가 좀 더 확장된다. 태국, 대만, 홍콩 등지에서 펼쳐진 민주주의 운동인 「밀크티 동맹」과 동명의 제목이 붙은 작품이라든가, 작가들을 대상으로 열린 결말을 닫도록 압박하는 조직이 등장하는 「결말 닫는 사람들」, 퀴어 커뮤니티의 맛깔난 연애담에 귀 기울이게 되는 「584마리의 양」 등이 재미의 외연을 안팎으로 확장한다. 4부 〈블랙 크리스마스〉는 혐오를 기반으로 한 유머가 더는 이해와 공감을 얻지 못하는 시대의 풍속도를 보여 준다. 시작하는 연인들과 첫사랑의 복수를 다짐하는 바텐더, 승진은 밀렸어도 인간의 소망에 복무한다는 강령에 충실한 천사가 서로 교차하는 크리스마스이브 바의 풍경이 다채로운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그해 내내 모니터로 바라보며 증오해 온 악당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던 순간, 그들이 쓰러지던 시점에 퍼져 나간 매캐한 화약 냄새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날이 생애 최고의 날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인생에서 가장 자주 되짚어 보며 음미한 날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는가. 변함없는 일상에서 에이미는 때로 용납하기 힘든 불친절이나 무례한 상대를 만나면 속으로 나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있어, 하는 생각을 했다.(p.29)
- 「인재를 찾습니다」 중에서
어머니는 누구도 엿듣지 못하도록 허 씨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중에는 반드시 남다른 문이 하나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문이 될지 모르므로 안채뿐만 아니라 집 안의 모든 문을 샅샅이 확인해야 한다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 문을 열면 아무도 모르게 특별한 마실을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도, 그 어머니도 그 덕에 견딜 수 있었다고 힘주어 말했다.(p.67)
- 「오프 더 레코드」 중에서
실상 누구나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지만, 때로 은우는 그런 관점에 대해서도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남들이 호소하는 외로움과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결은 다른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은우는 아직 그 차이를 명확하게 짚어 낼 말을 찾지 못했다. 뭐든 쉽고 상세하게 설명하는 일이 직업이자 특기인데도 그랬다.(p.174)
- 「584마리의 양」중에서
저자 은모든은 책 뒷 부분의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책에 실린 소설들은 팬데믹이라는 긴 터널을 거치며 탄생했다고 밝힌다. 유독 길고 어둡던 시간을 통과하며 어느 때보다 타인의 무탈과 무사를 기원하게 된 마음들이 17편의 소설에 알알이 박혀 있다는 것. 그 친밀과 유대의 이야기는 지난한 매일매일이 우리를 할퀴고 가는 이 시대에 섣부르지 않은 위로, 그리고 나란히 걷는 보폭이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기에는 "이 세상에서 해가 저무는 모습과 가장 닮은 풍경이 있다면, 다름 아닌 해가 떠오르는 모습"(「결말 닫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시대는 쌀쌀맞고 우리 행성은 병들었으며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화가 나 있지만"(박서련 추천사) 다행이다. 여기에, 또 한 해를 살았다고 위로하고 다시 한 해를 살아갈 수 있으리라 격려해 주는 선물이 있으니까.
"표제작 「선물이 있어」에서 성지는 무릎까지 쌓인 눈에 발이 푹푹 빠져 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사람처럼 겹겹이 닥친 불운에 발이 묶인 상태지만, 소박한 계기를 통해 마음을 다잡고 언젠가 현재의 지난한 매일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을 날을 그려 봅니다. 모쪼록 이 책의 짧은 이야기를 읽거나 들으신 분들도 기나긴 겨울처럼 웅크려 지내야 했던 시간 동안 쌓인 회한이 어느새 아득히 물러나는 순간을 맞이하시기를 빌겠습니다.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며 바로 그런 선물을 받으실 수 있기를, 무엇보다 다가올 새해에 무탈하시기를요."(p.214)
저자 : 은모든
2018년 [한국경제] 신춘문예 장편소설 부문에 『애주가의 결심』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꿈은, 미니멀리즘』 『안락』 『마냥, 슬슬』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오프닝 건너뛰기』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