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 20세기 제약 산업과 나치 독일의 은밀한 역사
노르만 올러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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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는 지금까지 독자가 접했던 나치 독일과는 다른 시각에서 당시 독일군의 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히틀러를 정점으로 막강 군사력으로 로마 제국 같은 제 3제국을 꿈꿨던 독일은 패전을 앞두고 상당수의 병사들이 마약의 구렁텅이로 빠져 있었다는 폭로성 내용이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미군의 참전과 구 소련의 병합에 실패함으로써 사실상 제 3제국 꿈은 사라졌다는 게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루는 전쟁사학자들의 견해만 들었다. 유대인 집단 학살로도 표현이 모자라는 인종 학살로 역사상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나치 독일에 관해서는 낱낱이 해부된 듯 여겨진다. 종전 후 8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이다. 저자 노르만 올러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 나치 독일에 관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고 더 연구할 거리를 찾는다는 것은 헛된 시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운을 뗀다.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저자인 독일 작가는 기자 출신답게 다큐를 소설적 상상력을 가미해 나치의 마약 사용 문제를 파헤친다. 소설적 상상력이라고 허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팩트를 바탕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소설적으로 풀어썼다는 의미로 보면 될 듯하다. 저자는 지금까지 알려진 나치의 실상을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서를 포착한다. '마약' 사용이다. 히틀러에 대해서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돼 약물중독설이 나돈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일선 병사들에게도 마약에 중독될 정도로 수시로 투약했다는 사실은 새삼 전쟁의 참혹한 면과 잔인한 면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해 거북하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나치 독일은 사이코패스 집단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생각될 정도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해 배워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책을 통해 나치 독일은 마약이 제2차 세계 대전과 히틀러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폭로하는 것이다. 언론인 출신 작가 노르만 올러는 직접 자료를 찾고 분석해 나치 독일 시대를 마약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했다. 19세기 모르핀, 코카인 등 마약성 약물의 개발부터 1920년대 독일에 불어닥친 독극물 광풍과 제약 산업의 성장,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의 마약 배급, 마약에 중독된 히틀러와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의 의존 관계까지, 마약으로 얼룩진 나치 독일의 음습한 역사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독일의 언론인 출신으로 소설가로도 활동해온 저자의 첫 논픽션 작품이다. 저자가 나치의 마약 사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독일은 물론 미국의 국립기록보관소의 것까지 방대한 자료를 찾아가며 쓴 결과물이다. 실감 나는 묘사와 대범한 비유법 등 여러모로 흥미롭게 읽히는 책이지만 사료에 근거한 것만 아니라 저자의 추정을 통해 연결되는 대목이 종종 눈에 띈다. 앞서 언급한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다.

사실 나치의 악행과 마약을 연결 짓는 과잉 해석은 저자 스스로도 경계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역사상 가장 어두운 그 시대가 중독성 물질을 너무 많이 복용했기 때문에 탈선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며 "마약은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이미 내재되어 있던 것을 강화했을 뿐"이라고 책말미에 적었다. 이 책은 독일에서 2015년 처음 출간돼 화제가 된 책으로 원제는 『Der totale Rausch: Drogen im Dritten Reich』, 직역하면 『완전한 도취: 제3제국의 마약』이다.

 


 

저자가 기자 출신의 현직 작가란 점은 책의 서두에 특징을 드러낸다. "다음주도 지난주처럼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기회가 되면 페르비틴을 다시 보내주세요. 보초를 설 때 아주 유용해요." "너무 지쳐서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요. 가능한 한 빨리 페르비틴을 보내 주세요."(p.71) 나중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되는 하인리히 뵐이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에서 가족에게 쓴 편지들이다. 그가 거듭 요청한 페르비틴의 주성분은 놀랍게도 메스암페타민. 현재 대부분의 국가에서 마약류로 규제하는 물질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책상에 앉아 글을 쓸 때 메스앞페타민의 '놀라운 효과'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물질에 의존하게 된 것은 전쟁의 고단함을 이겨 내고 임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입에 대기 시작한 군인 시절이었다. 뵐은 페르비틴 복용에 대해 무척 자연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런 태도에 비추어 보건대 이 물질의 효과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다만 위험성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자주 아무렇지도 않게 각성제를 언급하는 걸 보면 그의 가족도 하인리히가 약물을 자주 복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반대하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말한다. "보고 싶은 부모님과 형제자매에게! 이제는 편지를 쓸 시간이 충분합니다. 그럴 만큼 마음이 안정되었고요. 물론 온몸이 축 늘어질 만큼 무거운 건 여전해요. 어젯밤엔 두 시간밖에 못 잤고, 오늘 밤에도 세 시간 이상 못 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제 곧 생기가 돌 거예요. 페르비틴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할 테니까요. 그러면 고단함도 눈 녹듯 사라져요. 바깥은 보기 드물게 환한 달빛이 흐르고 별이 빛나고, 무척 추워요." 편지 내용으로 저자는 뵐에게 최대의 적은 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이후 편지에는 "군 생활이 너무 힘들어요. 앞으로는 2~4일에 한 번씩 편지를 써도 이해해 주세요. 오늘은 페르비틴 때문에 편지를 썼어요."

 


 

당시 나치 독일은 잠을 제대로 못 잔 병사들을 전투에 내보내기 위해 각성제를 투여함으로써 전투력을 보충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될 정도로 각성제, 진통제 등에도 각종 마약류가 투여된 흔적들이 곳곳에 나타난다고 저자는 밝힌다. 책에 따르면 19세기 초 독일의 화학자 제르튀르너는 아편에서 핵심 성분인 모르핀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고통을 쾌락으로 바꿔 주는 이 '마법의 약물'은 의학적 목적뿐 아니라, 제약 회사의 큰 돈벌이 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헤로인, 코카인, 그리고 메스암페타민이 주성분인 〈페르비틴〉이 출시되었고, 독일의 제약 회사들은 크게 성장했다. 강력한 마약인 페르비틴은 만병통치약으로 둔갑해 학생, 간호사, 배우, 작가, 노동자, 소방관, 미용사, 운전자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에서 소비되었다. 심지어 메스암페타민이 함유된, 〈프랄린〉이라는 과자가 생산되고 버젓이 광고까지 낼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 독일군의 광기와 2차 대전의 비극은 예견된 것이었다.

육군을 비롯해 공군, 해군까지 독일군은 병사들에게 페르비틴을 배급했다. 마약 복용으로 각성된 독일군은 밤낮 없이 진군했고,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돌격했으며, 지나는 곳을 가차 없이 밀어 버렸다. 마약 복용은 수뇌부도 예외는 아니었다. 훗날 독일 장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에르빈 로멜과 나치 정권의 2인자 헤르만 괴링,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 항공 국장 에른스트 우데트 역시 마약을 즐겼다. 곳곳에서 병사들과 장교들에게서 의존성과, 우울, 불안, 의욕 상실 등의 부작용을 목격됐으나, 국방 생리학연구소 소장인 오토 랑케는 모든 상황에 눈을 감았다.

 


 

독일에서 페르비틴은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알약이었고, 그 사용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대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실은 페르비틴만 그랬던 건 아니다. 각종 화학물질 제조의 강국이었던 독일은 앞서 1920년대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모르핀 생산국, 헤로인 수출국이기도 했다고 한다. 제3제국, 즉 나치 독일은 겉보기에 엄격한 반(反)마약 정책을 시행했지만 이 책이 그려내는 실상은 이중적이었다. 페르비틴의 경우 민간에선 1939년부터 처방전을 의무화하고 1941년 마약류 규제에 포함시켰는데, 육군과 공군은 무려 3500만정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책에는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진격을 비롯한 독일군의 전격전에서 페르비틴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며칠씩 밤잠을 자지 않고 행군하는 병사들만 아니라 야간 공습에 나선 전투기 조종사들도 복용해 '폭격기 알약'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앞서 페르비틴의 각성효과를 주목한 국방 생리연구소 소장 오토 랑케는 임상실험을 통해 그 위험성도 알게 됐지만 이에 대한 경고는 결과적으로 시늉에 그쳤다. 독일군이 활용한 건 메스암페타민만이 아니었다. 1인용 어뢰 공격 등에는 코카인 등도 알약이나 껌으로 동원됐다고 한다.

최고 권력자는 어땠을까. 히틀러의 개인 주치의 테오도르 모렐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그려지는 인물이다. 모렐은 '환자 A' 등의 이름으로 히틀러에 대한 방대한 진료기록을 남겼는데 날짜로 885일 분량에 달한다. 그중 주사약 투여가 약 800회나 된다. 모렐의 주사는 비타민이나 포도당에서 시작해 동물에서 추출한 호르몬 제재와 스테로이드 물질까지, 나중에는 무려 80가지 넘는 약물을 뒤섞었다고 한다. 이와 별도로 오이코달도 종종 주사했다.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약 두 배에 달한다는 마약성 약물이다.

 


 

저자는 모렐이 진료기록에 손글씨로 '오이코달'이라고 적은 것뿐 아니라 'x'라고 쓴 항목 역시 오이코달로 추정한다. 책에는 히틀러가 주사 전후로 급변하는 모습, 독일에 불리해지는 전쟁의 흐름과 함께 신체적으로도 몰락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그려진다. 모렐은 히틀러의 후광을 통해 사업적 확장도 꾀했지만 결국 미군에 체포됐고 1948년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는 다른 누구보다도 손쉽게, 그리고 원하는 때에 마약을 투약받았다. 처음에 그는 만성 소화 불량을 치료하기 위해 의사 테오도르 모렐을 만났으나, 이후 모렐은 히틀러의 주치의로서 각종 마약을 처방했다. 평소 기력 유지를 위해 비타민, 포도당 주사를 맞았던 히틀러는, 전쟁 초기 동물성 호르몬 제제와 스테로이드를 투여받았고, 1944년 후반에는 코카인과 오이코달을 맞았다. 오이코달은 합성 마약으로, 진통 효과가 모르핀의 두 배에 달했고, 투여 방법에 따라 헤로인보다 강력한 쾌락을 주는 것으로 유명한 약물이다.

전쟁 중 벙커 생활을 하며 마약에 깊숙이 빠져든 히틀러는 모렐에게 더욱 의존했다. 마약을 맞지 않고는 작전 회의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한편 모렐은 히틀러를 뒷배경으로 삼아 철저히 개인적인 이득을 취했다. 〈비타물틴〉이라는 복합 제제를 출시해 큰돈을 벌어들였고, 점령지에서 나치군이 몰수한 기업을 싼값에 인수해 각종 약물을 생산했다. 우크라이나의 도축장에서는 고가의 도핑제와 스테로이드 생산의 원료인 동물의 갑상선, 부신, 고환, 전립선, 난소, 쿠퍼 샘, 담낭, 심장, 폐 등을 싹쓸이하는 광기를 보이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모렐은 악의 화신 같다. 독일은 한때 순수 아리아인의 피를 강조하며 대외적으로 마약 퇴치 운동을 펼쳤으나 내부에서는 온갖 마약성 물질을 취한 나치 독일의 위선을 보여 준다. 나치 독일군은 마약을 작전 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고, 마약은 히틀러와 군 수뇌부의 머릿속에 내재된 잔인함을 강화했다. 수많은 연구에도 온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히틀러는 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자이자 독재자가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저자 : 노르만 올러(Norman Ohler)

 

소설과 논픽션을 아우르는 독일 작가. 1970년 서독 츠바이브뤼켄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 언론인 학교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한 후 『슈테른』, 『슈피겔』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1995년 『할당 기계DieQuotenmaschine』로 데뷔했는데, 세계 최초의 인터넷 소설이었다. 이어 2001년 발표한 『중심Mitte』은 『슈피겔』로부터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으며, 2002년 발표한 『폰테 시티Ponte City』 역시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들은 각각 뉴욕, 베를린, 요하네스버그를 배경으로 하여 〈도시 3부작〉으로 불린다. 2004년 괴테 인스티튜트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에 체류하면서 현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글을 썼고 텔아비브와 예루살렘에도 머물렀다. 2008년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팔레르모 슈팅Palermo Shooting」에 각본가 중 한 명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친하게 지내던 DJ로부터 나치들이 약물에 절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를 느껴 조사를 시작했다. 5년 동안 독일과 미국 기록물 보관소를 샅샅이 뒤졌고, 기존 연구에서 빠진 수많은 원본 자료를 찾아내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2015년 첫 번째 논픽션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를 썼다. 이 책은 다음 해 영어로 출간되어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현재까지 30개 이상의 언어로 출간되었으며 파라마운트와 영화화 계약도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올러는 우리가 오늘날 마약으로 분류하는 약물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석하고 나치 독일의 고위층 특히 아돌프 히틀러 본인도 약물에 중독되어 있었음을 자세히 다룬다. 독일의 저명한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이 책이 역사의 전체 그림을 바꿔 주었다고 찬사를 보냈으며, 히틀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이언 커쇼와 군사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 등도 호평했다. 이후 2017년 역사 범죄 소설 『삶의 방정식Die Gleichung des Lebens』, 2019년 두 번째 논픽션 『하로와 리베르타스Harro und Libertas』를 출간했다. 현재 베를린에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역자 : 박종대

 

성균관대학교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독일 쾰른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사람이건 사건이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이면에 관심이 많고, 환경을 위해 어디까지 현실적인 욕망을 포기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는 제대로 된 이기주의자가 꿈이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의 『세상을 알라』, 『너 자신을 알라』, 『사냥꾼, 목동, 비평가』를 포함하여 『콘트라바스』, 『승부』, 『어느 독일인의 삶』, 『9990개의 치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 1백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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