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너였던 나
유정아 지음 / 마음의숲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언젠가 너였던 나』는 에세이다. 신변잡기를 적은 에세이가 아니라, 페미니즘과 인간의 삶, 삶의 진리에 대해 썼다. 주제가 무겁다. '언젠가 너였던 나'란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주제다. 저자 유정아는 「프롤로그」를 통해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진다. "지금 여기의 나는 과거의 '나'들의 총합인가?" 그렇다면 미래의 나는 지금 여기의 나까지를 포함한 나일 것인가? 미래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이른 우리가 어떤 태도로 나아갈 때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시작부터 강렬한 느낌의 가설을 내세운다. 어쩌면 우리 사회 문제, 혹은 인류 삶의 문제에 대한 사유를 시작할 때 필요할 듯한 명제들이다. "작금의 이성주의적 시선들은 역사가 축적해 길어 올린 것이지 뜬금없이 외부로부터 침입한 것이 아니다. 한 평범한 인간의 궤적 안에서도 그 시선들은 자라왔다. 여성인 나만이 아니라 남성이나 그 시각에 반대하는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 안에 상처 받은 약자가, 소수자가 들어 있다." 저자의 전제는 매우 단호하다. 반대할 수 없는 명확한 전제나 명제를 글의 서두에 내놓는 것은 자신의 사유가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할 때 주로 사용한다. 여성주의자들은 누구든지 상처 안에 소수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전제 말이다. 저자는 다시 설명을 붙인다. '여성'이 들어가 있을 뿐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하자는 것이 아니다. 강자와 승리자만의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함을 역사는 말해준다는 저자의 주장이 예사롭지 않다.

 


 

저자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신(神)이 있다고, 대문자(God)가 아니라 소문자(god)로 자신을 낮추는 신이 있다고” 말한다. 그 신은 남과 여를 갈라서 사랑하지 않고 수염이 없는 자와 수염이 있는 자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인간은 인간이라서 지닐 수 있는 마음과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 있다. 신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도 신을 본떠 그 다정함을 닮을 수는 있다. 나 아닌 ‘너’에게서 내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그 기억으로 너를 공감하며 너의 옆에 같이 설 수 있다. 저자는 다시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에게는 성령이나 천사가 아니라 사람을 보낼 것 같았거든요.” 사람이 사람의 옆에 서는 기적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이 같은 저자의 인식은 아마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주장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인류학이나 생물학, 문화인류학 등 과학 부문에서는 가능성을 말하더라도.

저자의 남녀 구별이 없는 원시(태초)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진다. 1부 1장 「부치지 않은 편지-아욱」에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전설 같은 주장도 이어진다. 사실상 이 책의 첫 부분에서 전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 남녀 구별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생각된다. 이 장에서 저자는 독일의 수도원에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살았던 12세기 중반. 장소는 아직 칭기즈칸(1162~1227)이 세계를 제패하기 위해 이 지역을 휩쓸기 전의 중앙아시아다. "어느 날 황양의 한쪽 목초지에 차려진 흉노의 천막에서 붉고 찬 기운의 남자아이와 검고 울지 않는 여자아이가 한꺼번에 태어났어요. 물론 세상으로의 완벽한 동시 입장은 아니어서 여자아이가 먼저 엄마 뱃속에서 나왔고 조금 시차를 두고 남자아이가 떨어져 나왔지요."(p.13)

 

 

아이들이 자라며 자신들이 좋아하는 야채죽의 야채 이름이 무엇인지 어미에게 물었다. 검은 고요는 자신의 이름을 못 전하더라도 그 야채의 이름만큼은 아이들에게 일러주고 싶었다. 형제와 함께 좋아하던 그 야채. 검은 고요는 온 힘을 다해 입을 벌려 발음해 보았다. "아-흑-." 애정과 그리움과 사무침이 그의 입에서 터져 만든 말이었다. 아흑. 그렇게 중앙아시아의 동규 혹은 파루초는 이 땅으로 와서 '아흑'이 되고 '아옥'이 되었다가 오늘날 '아욱'이라고 부르는 채소로 남았다는 인류 창조 신화를 이야기한다. 검은 고요는 어떻게 됐을까?

책에 따르면 늘 말 달리던 검은 고요는 말에서 내린 삶을 받아들였다. 한곳에 머무르며 아흑을 기르고 거두고 끓여먹으며 사는 삶. "탈출하는 길을 발견한다면 그 누구도 마다치 않는다"라고 한 이븐 할둔(1332~1406)의 『역사서설』 속의 글처럼, 정주의 삶이 초원의 삶보다 좀 더 편안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달라진 삶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또한 용기와 담대함일 수 있다. 하지만 늘 가슴 한편에서는 말 위에서 보던 풍경이 그리웠고, 그 속도를 잊지 못했고, 빨리 살고 빨리 죽는 황야의 삶,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이 익숙하다 여겼다. 검은 고요는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을 깊이 사랑했지만 검은 고요가 더욱 깊이 사랑하는 건 그와 함께 세상에 나온 형제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형제이자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소년. 말 못하는 자신의 몫까지 수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채 굳게 다문 입술. 자신이 따스하게 잡아주던 붉게 찬 손. 검은 고요가 진정으로 그리워한 건 나였던 너, 남성과 여성을 넘어선 자신, 말하는 자이자 말 안하는 자, 붉고 찬 자이자 검거나 따스한 자, 말과 함께 살아가던 저 너른 들의 존재들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아욱은 형제의 굳게 다문 입술 같은 단어이라는 것. 그 입술 너머의 접촉이자 침묵이다.

 


 

독자로서는 난감하다. 저자의 글이 너무 수준이 높은 데다가 인용되는 부분 역시 처음 듣는 이름의 연속이고, 또 내용조차 쉽게 수긍이 안 되어서 더욱 당황스럽긴 하다. 그러나 정준희(언론학자, KBS 열린토론, MBC 100분 토론 진행자)의 추천평을 읽고서 내용의 이해에 좀더 다가갈 수 있다. "유정아라는 인물 안에, 우아함과 소년스러움이라는, 성별과 나이를 가로지르는 복합적 품성이 병존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마침내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한다. '성(城)안에 살면서 성(性)에 갇혀 있지 않은 만능 마녀'와 그런 '사람(을) 볼 줄 아는 소년'에게 내지른 만세는 아마도 작가 자신의 네 가지 자아상 모두를 향한 환호성이었을 테다. 그/녀의 성(城/性/聲) 안에 가꿔온 도서관과 화실, 정원과 호수를 구경하러 온 여러분 앞에서, 이 소년/마녀는 “손님이 오실 줄 몰라 머리 손질을 못 했다”라며 머쓱하게 그러나 주저 없이 투구를 벗을 참이다."

추천평과 다음 저자의 페미니즘적인 주장을 읽어보니 비로서 말뜻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같이 힘과 권력을 가지자는 것이 아니다. 과도기적으로 권력을 가져야만 바꿀 수 있다면 수단으로서는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에는 다 같이 힘을 빼자는 것이다. 힘과 권력의 개념 정의를 다시 하자는 것,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않아도, 못해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 뺌으로써 더할 수 있는 다른 셈법을 가져보자는 것, 돌고 돌아 다시 남성의 세상이 올 것이라는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구분 없이 다른 차원의 세상을 향해 가자는 것, 좀 더 공상해 보면 남녀 구분 없이 ‘헤아리는 더듬이’를 가진 새로운 종의 출현을 기다려보자는 것이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의 깊이이다."(p.30)

 


 

어떤 작가의 문장은 과거의 문장이 현재에도 시사성을 가진다. 과거에 이미 현재의 지점을 앞서 고민하고 문장으로 적어내는 것, 이를 진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유정아 작가는 과거의 삶에서도 페미니즘으로 사유하고 깊이 있게 현상을 바라봤다. 페미니즘이 가시화되기 이전부터 삶으로써 이를 직감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작가의 문장은 현재에도 그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에 날카롭게 회귀하여 우리의 지금을 다시 고민하게 만든다.

“헤아리는 더듬이”는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며 연대로 나아갈 것이다. 무지개 빛깔로 거리를 채우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공유하기도 할 것이고, 환경을 위해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운동을 실천하기도 할 것이고, 바로 옆의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도 할 것이다. 혼자서 부르짖던 작가는 연대의 움직임을 미리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그 예견이 미래(지금의 현재)에는 당연한 문장이 되길 소망했을지도 모른다.

유정아 작가의 과거를 들여다보면 현재의 삶은 어떨지 저절로 궁금해진다. 과거에 지녔던 가치관이 현재에는 어떻게 변모하고 예리하게 다져졌을지 호기심과 기대가 싹튼다. 궁금증은 과거를 진보적으로 살아왔던 작가이기에 현재를 누구보다도 적확하게 살아가지 않을까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또한 이 궁금증은 2000년대 이전의 ‘진정성’으로부터 경험한 희망에서 비롯된다.

 


 

"수염 없는 삶을 택하겠다는 작은 의지 하나 수용할 수 없는 사회는 엄청난 바람이 불어 버림받아 보아야 한다. 세상에서 버려져야 할 것은 그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바로 그 사회 자체이다."(p.181)

위의 문장을 보며 어떤 이는 성별 구분에 맞서는 여러 인물이 떠오를 것이고 또 어떤 이는 현 사회의 세태를 가늠해 볼 것이다. 세상에 버려져야 할 것은 의지를 가진 존재가 아닌 사회 자체라고 말하는 작가의 문장은 비장함과 의지를 가진 존재에 대한 슬픔이 공존한다. 의지를 가진 존재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조금씩 진보했다. 그 진보의 자리에 서 있는 자들은 슬픔을 함께 통념해야 한다. 진보는 과거를 올바르게 애도하는 데서 시작된다.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을 잘 애도하고 그 힘으로 다음을 도모하는 것. 거기서 미래라는 창구가 열릴 것이다. 저자의 과거의 문장이 지금의 현재를 예감했듯이 현재의 문장은 미래의 어느 날을 예감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역사적 데이터와 현재의 트렌드를 잘 읽어나갈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주목한 미래의 창구는 김초엽 작가에게서 시작된다.

"김초엽의 작품 속 존재들은 성이 지워진 채 유기체로서 삶을 살아간다. 두 가지 성(性과 姓) 모두 여간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약자와 소수자가 존재하고 차별과 배제가 남아있고 약탈과 희생이 따르고 장애와 고통이 선명하지만, 전 우주로 공간이 확장되고 미래로 시간이 확장된 김초엽의 세계에서 두 성이 지워진 존재들은 한결 숭고한 차원의 고민을 한다. 숭고한 고민의 세계로의 초대가 김초엽의 미덕이다. 그 묵직한 초대가 고맙기 그지없다.(p.295-296)

 


 

이 책은 모두 4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아욱-생활 속의 존재〉, 2부 〈성당-존재 속의 사색〉, 3부 〈사색 속의 진리〉, 4부 〈표절-진리 속의 공감〉이다. 각 부에는 모두 60의 장이 마련돼 독자들을 기다린다. 아직 완전히 저자의 글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각 부의 제목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활 속의 존재-존재 속의 사색-사색 속의 진리-진리 속의 공감'은 집중해 살펴볼 작정이다. 책의 내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저자의 의도적 제목 배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을 독자가 이해하는 수준에서 표현한다면 미래에는 우리들이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아닌 좀 더 고차원적인 문제를 직면하게 되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화 속 인간의 태초의 모습이 남성과 여성으로 구별되지 않았듯이, 우리의 내면에는 그 진실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남성과 여성이라서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우리 자신에게 담겨 있는 것이다. 이는 역사적 순간들이 보장하고 현재의 문장들이 꿈꾸게 만든다. 미래의 우리가 성별의 구분과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인간 옆에 서는 일을, 우리는 상상하고 실현하게 될 것라는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저자 : 유정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와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을 졸업했다. 1989~1996년 동안 KBS 아나운서로 일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말하기 강의와 프리랜서로 방송, 음악회 진행 등을 했고 연극 <죽음에 이르는 병>, <그와 그녀의 목요일>과 영화 <재회>에 출연했다. 영화 <재회>는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저서로 《언제나 지금이 아름다운 여자》, 《클래식 에세이 마주침》, 《유정아의 서울대 말하기 강의》, 《클래식의 사생활》, 《당신의 말이 당신을 말한다》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