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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 - 쉼이 있는 삶을 위하여
이승원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평점 :
지금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 세계인은 위기의 시대를 살고 있다. 위기 상황의 추이를 볼 때 '절멸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 비상사태, 에너지·식량·경제 위기, 사회경제적 불평등, 약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후퇴한 민주주의가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다. 거기에 3년 전 시작한 코로나 팬데믹도 끝간 데 모를 정도로 일시 주춤을 거듭하며 더 큰 기세로 확산되고 있다. 지구 인류 대부분이 체감을 넘어 고통을 느끼고 있다. 이제 행동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 절멸로 치달을 수 있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 설상가상 우크라이나 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점치고 있는 사람도 늘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더 힘찬 행동은커녕 하루하루 일상에 찌들어버린 우리에게 당장 걸터앉아 쉴 수 있는 곳조차 없는 형국이다. 전 지구가 이들 위기 요인으로부터 어디 하나 안락한 쉼을 제공하도록 안전한 지대도 없는 데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감염병,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활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위기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반복되는 일상의 탈진으로부터 벗어나는 데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느 한 곳 휴식을 취하고 재충전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없는 형편이다. 이에 이 책 『우리는 왜 쉬지 못하는가』는 무엇이 우리의 쉼을 빼앗고 어떻게 쉼을 되찾을지를 사유하는, 우리 시대의 비판적 인문학이자 성찰적 에세이다. 이 책은 경쟁적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불안이 어떻게 개인과 사회를 잠식하는지,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와 쉼을 어떻게 장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소비가 삶의 주요한 리듬인 사회에서 ‘쉼’이 사라지게 되는 근본적 이유를 살피고, 쉼의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상상력을 제시한다.
저자 이승원은 우리의 현실을 먼저 짚어본다. 교육 수준이나 학벌, 재산 규모, 인종, 종교, 성적 정체성, 문화적 취향, 정치적 견해, 하다못해 사는 동네나 부모의 직업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연히 마주쳐 함께 앉아 잠시 서먹하다가도 서로 안부를 묻고, 위로와 힘을 건네며 건네던 시절을 추억한다. 또 덕담을 나누고,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 있는, 혹은 같은 방향을 향해 걷기 위해 잠시 쉴 수 있는 그런 의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물리적 실체를 갖는 의자가 아니라 쉼과 삶의 의지를 회복의 기폭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에너지 재충전의 의미이다. 다른 많은 나라가 그렇듯이 대한민국 사회도 쉽지 않은 위치로 흘러온 느낌이 든다.
저자는 단순할지 모를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불안이 희망을 압도하는, 그래서 생명을 돌보지 못하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우울한 단면을 '자살'이라는 현상을 통해 먼저 살펴본다. '쉼'과 정반대편에 있는 자살에서 시작해, 자살이 늘어가는 이 사회에 가득 찬 불안의 내부를 들여보겠다는 말이다. 불안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때, 공포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 원인과 마주해도 더 이상 뒤로 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삶에서 '의자'가 왜 필요한지, 어디에 있는지 답을 구하기 위해 '존엄한 쉼'의 의미를 찾아 나서고자 이 책을 썼다. 이 과정에서 존엄한 쉼이 우리의 존재를 지속시킨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 '레퀴에스코 에르고 숨(Requiesco ergo sum, 나는 쉰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을 끌어냈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차용했음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이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공공재, 커먼즈, 자기결정권, 자원접근성 등의 개념을 발전시킨다고 밝힌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쉼이란 단지 개인의 행위나 결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는 함께 '의자'를 만들어야 하고, 함께 쉼을 상상해야 한다. 이 의자는 힘 있는 자가 독점하거나 힘이 없다고 해서 밀려나는 자리가 아닐 것이다. 의자에 앉으려면 잠시 멈춰야 한다. 잠시 멈춘다는 것은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시간이 되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 '정지 운동'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정지, 즉 멈춘다는 것은 그냥 힘을 빼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멈추기 위해서는 관성에 대한 반작용만큼의 힘, 습관처럼 나아갔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정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닐 뿐더러, 새로운 힘을 모으는 운동이기도 하다. 멈추는 힘은 새로운 방향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멈추는 힘은 특정 집단이나 계층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지금 자신을 어디론가 밀고 가는 어떤 힘의 속도와 방향에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 사람 모두에게서 비롯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자 하는 이들은 함께 길을 걷던 서로에게 기대서야 발걸음을 붙잡을 수 있다. 관성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의, 내가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의자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서로의 협력이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처럼 이해된다.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경쟁의식과 의심보다 연민과 공감을 느끼는 순간, 정지 운동은 시작될 수 있다. 그리고 정지 운동과 함께, 우리는 그동안 왜 제대로 쉴 수 없었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정해진 방향으로 가속화되면서 밀려가기만 했는지 반성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란 저자의 주장에 공감한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에는 기꺼이 자리를 내주는 빈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를 저자와 독자는 믿는다.
이 책은 저자의 집필 취지에 따라 모두 4개의 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왜 잘살려고 할수록 불안해지는가?」, 2장 「일과 소비에 대하여 착각하는 사람들」, 3장 「우리는 언제 편안함에 이를 수 있을까?」, 4장 「빼앗긴 쉼을 되찾기 위하여」로 돼 있다. 1장은 잘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더 노력하기 위해 경쟁하고, 자유를 위해 돈을 버는(일하는) 것부터 재점검한다. 이 장에는 낯설기도 하고, 익숙하지만 전혀 다른 뜻으로 변주되는 용어도 등장한다. 또 지금까지 했던 최선이나 경쟁이 시작부터 잘못 꿴 단추 같다는 생각도 하게 한다. 저자는 누구에게 책임을 씌우고 누구는 피해를 당하고는 별로 문제 삼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인식에서는 어떻게 공존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함이다. 즉 닥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협력하고, 위기를 벗어난 후 위기를 맞게 한 용의자 집단을 처벌할 수도 없고 처벌한다면 당초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문제 해결에 필요한 일이니 만큼 생략할 수는 없을 터, 앞으로 "어떻게 존엄성을 지키며 살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풀어나간다.
저자의 이 같은 주장은 공감을 이끌어낸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비 능력’ 을 갖춰야 하고, 그러려면 끊임없이, 더 많이 일을 해야 한다. 과로와 일 중독을 잊기 위해 또 다른 소비에 열중하는데, 오늘의 소비는 내일의 노동을 담보로 하기에 이 삶의 패턴은 계속 악순환된다. 직장인, 자영업자 등 대부분의 서민들은 하루하루 빠듯하게 돌아가는 ‘노동’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일상이라도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의 쳇바퀴를 이탈하게 되면 어김없이 낭떠러지로 추락하기 때문이다. 삶을 영위할 또 다른 대안이 없는 곳에 ‘쉼’은 있을 수 없다."
2장에서 저자는 다소 생경한 용어들 등장시킨다. '착각 노동'과 '환타지' '소비를 쉼으로 착각하는 현실' 등을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다. 자살뿐만 아니라 혐오를 앞세운 범죄,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구조적 살인과 사회적 재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생존을 위한 가계 대출 규모는 이미 치명적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한 예감에는 기대감과 비관이 공존하다. 불안에서 벗어난 어떤 평안을 위해, 사람들은 최신 캠핑 도구와 등산 장비를 SUV 차량에 싣고 천연의 삶을 즐기러 산으로 들로, 강과 바다로 떠나곤 한다. 웰빙, 행복, 건강의 뜻을 모두 담은 단어 '웰니스'는 21세기 신종 산업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철학이자 생활양식이 되었다. 노후 연금, 양육에서 벗어난 중년의 목가적 삶, 가족과 이웃이 함께하는 품격 있는 주택, 고가의 빈티지와 최첨단 디지털 제품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21세기형 답을 주는 듯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일하려 한다.
웰니스 열풍의 반대편,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자살이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자살률은 이후 18년 이상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삶은 언제나 그렇게 우울한 것일까? 대한민국도 한때(2002년부터) 주5일 근무제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했던 바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서구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지나면서 주 40시간 노동이 규범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오랫동안 실시해온 서구와는 달리 노동을 멈추고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만낄해야 할 이틀의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사람들은 일하는 5일 동안 오히려 초과 근무까지 악착같이 해야만 했다. 더 큰 문제는 일주일 중 이틀 동안 쓴 카드 비용 때문에 나머지 닷새를 점점 더 노예처럼 일해야 한다는 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를 저자는 '저당 잡힌 미래'라고 표현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피로사회, 성과사회, 일 중독, 자기계발, 취업 걱정 등은 바로 고도로 정교화된 칸트식 노동 예찬의 다른 이름들이라고 비판한다. 금수저와 흙수저가 노동 예찬의 대상일 수 없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이렇게 현실을 뒤로한 채 외치는 노동 예찬은 주어진 노동의 욕망를 실현하고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하고 최종적인 방법이라는 '착각 노동'의 판타지를 퍼뜨린다는 주장이다. 일을 자아실현과 동일시하는 사회는 직업 또는 일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방법으로 여기지만, 이는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 판타지가 진실에 가깝다면, 우리는 일을 많이 할수록 행복해져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반대논리가 현실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도 꼬집는다. 이 때문에 저자는 현대인들로 하여금 일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믿게 하는 메커니즘을 ‘착각 노동’ 판타지라고 한다. 그리고 소비 문화가 우리의 여가 시간마저 장악하여, 신용카드를 긁어야 잘 쉬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현실을 포착한다. 물론 이것 역시 착각이라는 것이다.
저자 : 이승원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나,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까지 경기도 안양과 영국의 몇몇 작은 도시에서 살았던 시절을 빼고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도 여전히 멋진 사회복지사 아내, 동물병원에서 일하며 음악을 공부하는 딸, 권투할 때가 가장 맘이 편하다는 아들, 치매 속에서도 늘 웃으시는 어머니, 큰 병을 이겨내고 있는 강한 누나와 함께 살고 있다. 청소년 시절 육상, 야구, 농구, 중창단, 교회 학생회 활동에 빠져 지냈으며, 이후 대학에서 철학, 종교학, 국제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책보다는 다양한 사람들과 더불어 현장 경험을 하며 더 많은 삶의 지혜를 얻었다. 한동안 생업으로 국회, 중간지원조직, 공공연구기관 등에서 일하기도 했다. 주로 민주주의, 포퓰리즘, 도시 정치, 사회혁신, 세계 시민교육 등을 연구하고 관련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민주주의』(2014), 『커먼즈의 도전』(공저, 2021)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에르네스토 라클라우·샹탈 무페, 2012),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샹탈 무페, 2019)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커먼즈 네트워크, 시시한 연구소, 지식공유 연구자의 집,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등에서 동료들과 함께 배우고 활동한다.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면, 불광천에서 달리기와 자전거 타기, 북한산과 봉산 오르기, 드라마 보기, 동네 목욕탕 가기를 즐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