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
황주리 지음 / 파람북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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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바그다드 카페에서 우리가 만난다면』은 소설 작품이다. 글 쓰는 화가 황주리의 개성적인 그림이 곁들인 장편소설이다. 황주리는 일찍이 자신만의 고유한 화풍을 개척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선두주자이다. 또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 안목과 빼어난 문장으로 주목 받아온 작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SNS를 통해 교류하는 두 인물의 편지들로 구성된다. 여성인 한국인 화가와 남성인 아프가니스탄계 미국인 외과 의사가 그 주인공이며, 영화 〈바그다드 카페〉가 두 사람을 연결하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촉매 역할을 하는 매우 신선하고 독창적인 형식의 소설이다.

두 인물 사이에 연정이 싹트긴 하지만, 이 소설은 일반적인 연애소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두 인물은 끊임없이 폭력으로 물든 세상을 관조하고,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하며, 주변과 일상을 성찰한다. 그 과정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고독과 불안,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가 유려하고 심미적인 문장으로 드러난다. 소설을 지배하는 음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지적인 대화와 매혹적인 서간체가 빛을 발하는 소설이다. 낭만적 요소가 다분히 있어 읽기에는 다소 파괴적인 모습도 있지만 결코 세상을 해체하는 수준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두 주인공은 서로를 끊임없이 갈망하지만 당초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임을 알고 있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요소가 다분하다. 영화 제목이 소설의 제목에 들어왔다. '바그다드 카페는 영화 속의 미국 라스베이거스 근처의 모하비사막 한가운데 모텔과 주유소를 겸한 허름한 카페이다.

 


 

이야기는 오래전 뉴욕의 한 화랑에서 스쳐 지났던 두 사람이 SNS에서 다시 만나 대화를 이어가며 전개된다. 화가와 의사라는 이질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신뢰하고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촉매가 되었던 건 영화 〈바그다드 카페〉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게 되지만, 단 한 번도 만남도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애초에 두 사람은 만날 수 없는 존재였다. 독자는 소설 말미의 반전을 통해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순간 실체가 사라진 사람과의 사랑.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상상의 대상을 향한 끝나지 않는 편지이며, 사랑과 불안, 전쟁과 평화, 그리고 불멸의 이야기”임을 밝힌다. 몇 년 전 페이스북 친구 요청을 해온,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미국인 외과 의사라는 사람과 두 번쯤 메시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전쟁과 테러 분위기를 표현하는 어렵지 않은 그의 말들은 영어로 읽어도 실감났다. 저자는 그가 테러의 한가운데 있는 진짜 의사이고, 오래전 스치듯 본 적이 있는 누군가와 함께 뉴욕 맨해튼의 어느 극장에서 우연히 따로따로 앉아 영화 〈바그다드 카페〉를 동시에 보았다는 상상을 설정해 보았다고 설명한다.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되었다는 말이다. ‘불멸’은 실체의 ‘소멸’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구체적 대상이 사라진 사랑은 실재와 환상의 경계에 뿌연 안개로 남는다. 어쩌면 사랑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도.

 


 

오로지 SNS로 소통하는 두 주인공은 사랑의 감정을 품지만, 그 사랑에는 어떤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도, 이루고자 하는 성취의 욕망이 없다. 언젠간 두 사람이 설정해놓은 가상의 공간 ‘바그다드 카페’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그건 이생에서는 지켜질 수 없는 영혼의 약속 같은 것일 것이다.

다만 세상 곳곳에서 집단테러가 자행되고 이슬람 IS가 전 세계의 젊고 외로운 늑대들을 전쟁 속으로 유인하던 극도로 불안한 세상 속에서 두 주인공은 끝없이 자신의 내면에 고인 이야기들을 풀어내며 서로의 외로움을 위무한다. 그사이에 찾아드는 고요와 평화의 순간들, 그게 그들이 공유했던 사랑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인간성 진화의 불가능함에 대한 절규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사이사이에 일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희망과 치유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 소설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귀띔한다. "세상은 늘 휴전 중이고,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성의 진화의 불가능에 대한 절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사이사이 일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희망과 치유의 편지들을 마치 내가 주인공이듯 절실하게 써 내려갔다. 편지를 주고받은 상상의 인물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이 편지들로 인해 주인공 두 사람은 이 세상에 실제로 있었던 것만 같은 존재감을 지닌다."

 

 

작가, 특히 소설가들은 현실이 아닌 허구의 세상을 그린다. 소설 속에 일어나는 사건과 인물 또한 허구다. 그러나 단순한 거짓 세상이 아니라 작가의 머릿속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다. 그들이 갈등하고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실제 현실의 인물이 하는 것과 똑같다. 이른바 리얼리티(사실성) 확보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이 꾸면낸 인물과 사건들이 현실 속에서 실제 일어난 일처럼 독자들에게 알린다. 왜?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 살기 싫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작가의 거짓말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작가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목적은? 우리의 삶이 좀더 풍요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인간' 사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허구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실 실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다. 다만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일들이기도 하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종종 왜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 아쉬워하죠. 하지만 어떤 만남도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지 않아요. 이르면 이른 대로 늦으면 늦은 대로 그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계절이 있을 테지요.(p.50)

 

참을 수 없는 오열이 먹먹한 슬픔으로, 그 슬픔이 삭아 허망한 쓸쓸함으로 남은 떠나간 사람의 자리, 누군가 완전히 잊힌다는 건 그를 애도하는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진다는 것이겠지요.(p.199)

 


 

그 길고 지루하고 끝이 없는 우리들 인생의 불안을 묘사한 ‘불안의 책’ 속에서 나는 많은 위안을 느꼈다는 걸 고백합니다. 몸과 마음을 지닌 모든 생물은 아프고 괴로운 가운데, 드물게 작은 행복들을 누리다가 결국 이승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단 하나의 진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아니 당신을 위해 기도합니다.(p.215)

 

저자 : 황주리

 

화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32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00여 회의 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1986)과 선미술상(2000)을 수상했다.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린 그림들과 화가의 시각으로 써 내려간 독특한 문구들은 사라지는 순간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못 박아두는 ‘시간채집’이다.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며, 그림뿐 아니라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 산문들과 그림소설까지, 그의 글들 또한 읽는 이들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저서로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등이 있고, 그림소설 『그리고 사랑은』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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