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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북하우스 / 2022년 12월
평점 :
이 책 『레이디스』의 저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독자로서는 처음 만나는 분이다. 이 책은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 ‘서스펜스의 대가’, ‘불안의 시인’, ‘매혹적인 어둠의 소설가’ 등 화려한 수식어로 불리는 그의 단편소설집이다. 그의 초기 심리소설 열여섯 편을 묶었다. 그동안 하이스미스가 쓴 수많은 단편소설들은 언어권을 불문하고 여러 차례 출간되었지만, 그가 청년 시절에 쓴 심리소설들만을 모아 선보이는 기획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작품집은 2020년 작가 탄생 100주년을 1년 앞두고 스위스에서 처음 출판되었고, 이번에 국내 초역으로 우리 독자들과 만나게 되었다고 출판사 측은 밝히고 있다.
저자가 1936년부터 1949년까지 집필한 수록 작품들은 오 헨리 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웅」이 실려 있다.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 「시드니 이야기」 등 이번에 처음 출간되는 작품들도 모두 이 책에 수록돼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소설의 경향까지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집이다. 저자는 작품들을 통해 인간의 어두운 상상력을 때로는 으스스하게, 때로는 유머를 발휘해 보여준다. 이 작품들은 하이스미스 특유의 발상과 미학인 ‘어두운 상상력의 세계’와 ‘한없이 불안한 감정’을 하나의 별자리처럼 펼쳐 보여줄 것이라는 평은 이 작품들에 대한 기대를 한껏 높여주기도 한다.
저자 하이스미스는 ‘리플리’ 시리즈, 『열차 안의 낯선 자들』, 『캐롤』 등으로 유명해지기 이전인 청년 시절부터 작가로서 인간의 어두운 내면에 대한 이해가 깊었고, 이런 재능을 바탕으로 감정의 심연을 다룬 심리소설을 다수 집필했다. 그의 심리소설을 관통하는 중요한 키워드는 불안, 두려움, 그리고 위험함을 남들보다 잘 감지하는 예민함이다. 매일의 일상 가운데 자신을 위협하는 무엇이 있다는 묘한 확신이 더해지면서 불안과 두려움은 현실이 된다. 그래서일까. 하이스미스의 작품에는 꼭 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 해도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으슥하고 불길한 분위기가 배어 있다.
맨 처음 「세인트 포더링게이 수녀원의 전설」에서는 여자아이로 키워진 남자아이가 ‘남자’라는 ‘존재’를 감지하게 되면서 느끼는 불안과 분노가 드러나고,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에서는 대도시 뉴욕으로 이주한 여자아이가 도착과 동시에 낯선 도시 생활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 빠지면서 악몽 같은 시간을 보낸다. 「미지의 보물」에서 주인 없는 평범한 분실물은 남모를 상상에 빠진 두 남자의 범죄의 전리품으로 변모하고, 「돌고 도는 세상의 고요한 지점」에서 젊은 주부는 공원에서 마주친 연인을 관음하듯 바라보면서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에 시달린다.
하이스미스의 세계에서 해결되지 못한 불안은 강박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영웅」, 「프림로즈는 분홍색이야」, 「미스 저스트와 초록색 체육복」에서 주인공들은 이런 신경 쓰이는 마음을 처리하려고 강박적인 인물이 된다. 정신질환 의혹에서 벗어나려고 행동 하나하나 조심하며 발버둥치는 가정교사가 있고, 색깔 하나를 얻기 위해 온 천지를 돌아다니며 아내를 질리게 만드는 회사원이 있으며, 자세 하나 틀리지 않는 대열을 만들기 위해 학생들을 못 살게 구는 체육 교사가 있다. 인물들은 불편함과 불안함과 세계를 대하는 무력감을 넘나들다 마침내 묵은 감정을 해소하기도 하지만 끝내 미궁에 빠지기도 한다.
불안과 강박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대하는 심리적 기제이자 행동 방식이다. 「최고로 멋진 아침」에서 뉴욕의 택시 운전사 애런은 시끄럽고 정신없는 대도시에서 휘몰아치듯 생활하다 훌쩍 일을 그만두고 한적한 마을로 긴 여행을 떠난다. 설렘과 기쁨에 잠겨 하루하루 생활하던 애런은 어린 여자아이와 친구가 되어 매일같이 만나는데, 성인 남자와 여자아이의 우정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그의 하루를 캐묻는 하숙집 주인이 있고 몰래 그의 뒤를 따르는 주민도 있으며 처음에는 환대했지만 그를 보고도 모르는 체하는 이발소 주인도 있다. 이런 시선을 느낀 애런은 한순간 사방에서 적대감에 휩싸이며 실망, 더하게는 공포를 느낀다.
「공 튕기기 세계 챔피언」에서 이주의 설렘은 얼룩 하나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손바닥 뒤집듯 바뀌며, 「엄청나게 친절한 남자」에서 이방인과 교류하게 된 샬럿은 그의 차에 올라타자마자 범죄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의 태도를 대하게 되고 반가움은 후회로 변한다. 「모빌 항구에 배들이 들어오면」에서 주인공 제럴딘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남편을 피해 멀리 도망치지만 낯선 도시에서 동창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들은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도 불길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렇듯 희망 찬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와 사람을 마주한 사람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낙심과 혼란에 사로잡힌다.
공포는 무엇보다 (가깝거나 먼) 미래에 대한 불길한 예감에서 오지만 그 미래는 불행했던 과거에 저당 잡혀 있다. 감정이 바뀌는 순간마다 과거에 겪었던 일을 돌이켜보는 주인공들, 이들은 누구보다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기 위해 미래를 꿈꾸지만 경험의 조각들은 이들을 나쁜 과거로부터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미래가 과거의 반복일 수 있다는 예감은 공간을 이동하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어도 계속된다. 하이스미스가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로 불렸다는 사실은 그가 인간의 공포를 다루는 데 이른 시절부터 얼마나 능숙하고 탁월했는가를 짐작하게 하는데, 여기 실린 작품들은 이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증명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온갖 어두운 감정을 자아내는 소설의 문장들은 한없이 건조하며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이다. 선량한 비서의 예상치 못한 하루를 그리든(「루이자를 위한 초인종」),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찾아간 중년 부인의 속 끓이는 고백을 서술하든(「애프턴 부인, 그대의 푸르른 산비탈에 둘러싸여」),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남자의 애타는 심정을 묘사하든(「하늘로 막 비상하려는 새들」), 하이스미스는 인물들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고 마치 영화를 보듯 써 나간다. 이런 하이스미스의 하드보일드한 온도는 열여섯 편의 단편에서 일정하게 유지되고, 묘하게도 이 거리감이 그 자체로 스타일이자 개성이 되어 독자들을 강하게 매혹한다. 이를테면 미국의 한 서평에서는 하이스미스가 그저 스릴러 작가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유려한 문체로 독자들을 홀리는 탁월한 작가라고 했다([뉴요커]). 또 다른 서평에서는 감정을 섞지 않은 문장을 두고 “마약 같은 문체”라고 표현했는데([타임 아웃]), 이는 아마도 힘을 주지 않은 문장들을 모아 독자들을 광기의 공간으로 서서히 끌어들어 중독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많은 작가들이 오래전부터 변함없이 하이스미스를 동경하고 사랑해왔다. 그를 추천해 마지않았던 트루먼 카포티와 그레이엄 그린 이외에도,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나를 찾아줘』의 작가 질리언 플린, 『목요일 살인 클럽』의 작가 리처드 오스먼, 『이제 나를 알게 될 거야』의 작가 메건 애벗 등이 그에게 열렬한 애정의 말을 바쳤다. 작가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많은 보통의 독자들도 여전히 현대적이고 불온한 하이스미스의 작품들을 찾아 읽고 있으며, 이 책은 하이스미스 그런 독자들의 애정이 낳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레이디스』는 그의 매혹적인 문학 세계의 시작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빠져 있던 중요한 조각들이다.
저자 : 퍼트리샤 하이스미스(Patricia Highsmith)
1921년 1월 19일 미국 텍사스 주 포트워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뉴욕으로 이주한 뒤 바너드 대학에서 영문학과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1950년에 데뷔작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발표하였으며,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며 서스펜스의 거장 히치콕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옮겨졌다. 1955년 발표한 『재능 있는 리플리』는 하이스미스의 이름을 가장 널리 알린 작품으로,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사이코패스 ‘톰 리플리’를 탄생시켰다. ‘리플리 5부작’은 하이스미스를 20세기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로 널리 알렸으며, [태양은 가득히], [리플리] 등의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재능 있는 리플리』를 시작으로 36년에 걸쳐 네 권을 더 발표해 완성한 연작 소설 ‘리플리 5부작’은 하이스미스를 20세기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로 널리 알렸다. 클레어 모건이라는 필명으로 『소금의 맛』(후에 『캐롤』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을 써내기도 했다. 1995년 2월 4일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프레드 히치콕, 르네 클레망, 앤서니 밍겔라, 클로드 샤브롤, 토드 헤인즈와 같은 거장들이 그의 작품을 영화화했으며, 에드거 앨런 포 상, 오 헨리 기념상, 프랑스 탐정소설 그랑프리, 미국 추리작가 협회 특별상, 영국 추리작가 협회상 등을 수상하였다. 중년에는 자신을 카프카, 지드, 카뮈 같은 훌륭한 심리소설가로 인정해준 유럽으로 건너가 집필에 매진하다가 최후의 장편소설 『소문자 g(Small g)』를 마치고 1995년 2월 4일 스위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문학적 기록물은 현재 스위스 바젤에 보존되어 있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작품들 중 스무 편 이상이 영화의 원작 소설로 쓰였는데, 알프레드 히치콕, 르네 클레망, 앤서니 밍겔라, 클로드 샤브롤, 토드 헤인즈와 같은 거장들이 그녀의 작품을 영화화했다. 또한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평가를 받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에드거 앨런 포 상, 오 헨리 기념상, 프랑스 탐정소설 그랑프리, 미국 추리작가 협회 특별상, 영국 추리작가 협회상 등을 받았으며 『타임스』 선정 역대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 50인 중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리플리 5부작’을 포함하여 『열차 안의 낯선 자들』,『올빼미의 울음』, 『심연』, 『아내를 죽였습니까』, 『이토록 달콤한 고통』,『캐롤』, 『대실책』, 『이디스의 일기』, 『동물 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 『완벽주의자』 그리고 『어쩌면 다음 생에』 등이 있다.
역자 : 김선형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르네상스 영시 연구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세종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옮긴 책으로 『다시 태어나다』, 『시녀 이야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 『캐주얼 베이컨시』, 『바보들의 결탁』, 『곤충극장』, 『프랑켄슈타인』, 『셀린』, 『가재가 노래하는 곳』,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살만 루슈디의 『수치』, 카렐 차페크의 『도롱뇽과의 전쟁』,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등이 있고, 2010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