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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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은 저자 가랑비메이커가 2018년부터 2022년간 계절을 산책하며 마주한 사유와 서사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에세이다. 이 책에는 제목처럼 겨울의 촉감과 봄의 색, 여름의 맛, 가을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다. 저자 가랑비메이커의 섬세한 문체와 예리한 시선은 어느 계절에 펼쳐보아도 ‘그 계절’의 장면 속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계절이 있는 사람이라면, 계절 산책자 가랑비가 안내하는 길목에서 수많은 이름들과 마주하고 헤어지게 될 것이다. 페이지를 넘겨 갈수록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이 늘어갈 책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저자가 마음껏 산책하고 마주했던 사람과 장면들에 대한 것들에 대한 깊은 사유로 들어가기 전 독자로서는 그만 만난 사람과 장면이 어떤 것일까 궁금하다. 계절에 대한 것만 썼을까도 궁금하고, 그가 만난 사람이 등장한다면 어떤 사람일까도 사뭇 궁금하다. 저자의 속내를 알 수 있는 단초가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의 '프롤로그' 격의 글에 '초대장'이라고 쓰고, 「사계절이라는,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독자들을 자신의 사유 세계로 초청한다. "언 땅에 부서진 재처럼 남은 메마른 풀과 잔뿌리를 밟으며 고요한 겨울을 지나면, 마른 나뭇가지와 컴컴하던 땅에도 푸른 새순이 돋는 봄이 내려앉는다. 겨우내 발등만 보며 걷던 습관은 해가 깊숙이 드는 봄이 오면 자연히 사라진다. 푸른 잔디와 굵어진 나무, 그 위에 내려앉은 작은 새들을 올려다보며 걷는 걸음은 나른한 봄기운에 취해 왈츠처럼 우아해지곤 한다."

 


 

책의 제목과 주제가 암시하듯 이 책은 '계절 예찬'이 먼저다. 저자의 사유의 세계가 계절 속이기도 하고, 계절에 따라 변화하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초대장'에서는 겨울에 이어 봄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도 전한다. "겨울에서 봄, 움츠렸던 몸이 활처럼 펴지는 계절의 전환 앞에서 공연히 게을러진 나를 마주한다. 여전히 정리하지 못한 무채색의 겨울옷, 제때 먹지 못해 곪은 고구마와 귤, 대충 눌러쓴 모자 속 무성하게 자라난 머리······. 언제까지고 모르는 체하며 덮어둘 수 있을 줄 알았던 것들이 손기를 갈구하는 계절,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며 구석구석 나의 쓸모를 발견하는 일은 새 계절을 여는 첫 번째 스텝이다."

여름은 더위 속에서 게으른 저자에게 먹을 것을 스스로 마련해 요리하는 즐거움도 준다. "나른하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르는 여름에는 종일 무얼 먹을까 궁리한다. 먹지 못해 안달난 사람의 허기가 아닌, 도처에 널려 있는 탐스런 제철 과일과 채소를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지 고심하는 세프의 마음이다." 또 주방일보다 청소를 좋아하는, 요리보다는 설거지를 좋아하는 저자에게도 여름은 제 손으로 맛을 내고 싶어지는 계절이라고 말한다. "불을 쓰지 않고도 툭툭 썰어낸 과일과 채소로 채운 접시를 비우고 주전자에 담긴 보리차를 쪼르륵 따라 마신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소매 끝으로 훔치는 일까지 건강한 식사가 되는 계절에는 유난히 다양한 표정을 짓는다. 타는 듯한 더위에 잔뜩 찡그렸다가도, 곁을 머무는 한 줌의 바람과 한 뼘의 그늘에 옅은 웃음이 번진다."

 


 

여름 한낮의 대화와 한밤의 산책으로 활기 넘치는 여름이 지나면 저자의 가을이 궁금해진다. 소리 없이 드리워진 사색의 시간, 여럿보다는 홀로 보내는 시간이 긴 가을은 냄새라는 짙은 흔적을 남긴다는 저자의 독백처럼 마음도 냄새로 가을을 맞이한다. 건조한 공기를 타고 선명하게 실려오는 흙과 나무 냄새, 갓 내린 커피 냄새, 섬유 유연제 냄새. 홀로 길을 거닐어도 가을의 냄새는 지난 시절과 사람들 속으로 저자를 당겨낸다고 한다. 목소리를 내지 않아도 대화를 주고받고 맞닿지 않아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색의 계절은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고 금방 돌어서버린다고 쓸쓸한 마음을 달랜다. 어쩌면 다음 기다리는 계절에 더 마음이 쏠려 있는 것일까?

저자는 겨울을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차지하는 욕심 많은 계절로 표현한다.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를 두르고 모자를 눌러써도 코끝과 손끝으로 전해지는 촉감은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다. 여린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찬바람, 우연히 스친 손끝에 스파크처럼 이는 정전기, 따듯한 머그잔을 뭄켜쥐었을 때 지문이 녹는 듯한 느낌.

"둔한 옷차림으로 종종거리는 계절이지만, 나에게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의 감각이 민감하게 되살아나는 계절이다. 얼어붙은 핸드크림을 힘껏 짜고 문지르는 일, 밤새 한 땀 한 땀 짠 목도리를 마침내 목에 두르는 일, 차가운 귀를 감싸며 바보처럼 웃는 일, 주머니 밖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흔들며 걷는 일. 우리가 겨우내 하는 모든 일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독한 추위로부터 지지 않고 한 해의 끝부터 시작까지, 여기 생동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그리하여 겨울이 오면, 습관처럼 해오던 모든 일들이 살기 위한 것처럼 필사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고 저자는 치열한 삶의 온기를 느낀다. 느슨해졌던 일상을 조이는 차가운 생의 감각은 매일 홀로 쓰고 펴내는 저자에게는 유일한 감시자이자 동료라는 말에 독자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저자의 계절 맞이는 끝난 게 아니다. 매 해 순환하는 한 해의 느낌만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에는 다시 봄으로 가면서 더 구체적인 저자의 계절이 풍요로워진다. 나름대로 사계절이 분명한 곳에서 나고 자라며 당연하게 마주했던 변덕스러운 계절이 가난한 예술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이 된다는 저자의 진술은 큰 공감을 준다. 낮에는 산책을 하고 밤에는 문장을 쓰는 단조로운 삶에 색과 향을 가미해준 계절의 목소리와 환절기는 어떻게 저자의 마음을 끌어당기고, 또 멀어지게 했을가. 읽을수록 저자의 사유는 깊어지는 것 같아, 결국 저자의 속내를 알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인내로써 읽는다면 삶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거란 자신감에 페이지를 연속 넘기게 한다.

이 책은 장(章)의 구분을 계절로 나누었다. 「겨울」로 시작해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이 된다. 계절에 순응하며 사는 저자이지만 계절의 순환에서 뭔가가 달라짐을 느끼고, 깊은 사유를 통해 예리한 필체로 담아낸다. "내리는 눈을 가만히 바라볼 때면 눈이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해보고는 한다. 오래된 동네를 동화 속처럼 만들어버리는 로맨틱한 둔갑술에 대하여. 저 높은 하늘에서 대지 위로 안착하기 위해 지나와야 했을 긴 여정과 인내에 대하여. 미지근한 손바닥 위헤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눈의 모습에서는 겸손을 배우기도 한다.

 


 

겨울부터 또 겨울까지, 한 해 동안 저자가 마주한 계절과 만난 사람과, 계절의 사유를 각 계절에 맞춰 한 문장씩만 여기에 옮긴다. 저자의 마음과 사유를 잘 표현해놓았다고 독자가 느낀 것이니 다른 독자들과, 또 저자와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2022년 겨울의 문턱에서 지난 해 저자가 경험하고 느낀 감정의 순간들과 비슷한 문장을 골랐다.

 

그리운 적 없던 그를 떠올린 것은 틀림없이 눈 때문이었을 거다. 해묵은 기억들이 하얀 눈에 둘러싸여 둥글둥글 뭉툭해져서 마음 속으로 굴러들어왔을 거다. 지난 시절을 떠올려 보다 가만히 속으로 안부를 묻는다. 눈이 오는 날이면 여전히 그 노래와 그 영화를 보는지. - 「눈이 오면」 중에서

이방인과 주변인 사이를 오다가 보면 언젠가는 이름을 새기지 않아도 내 것인 것들이 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낙관적인 마음은, 오늘 아침 산책에서 입은 것이다. 목적 없는 아침 산책은 작고 나약한 고민의 터널을 지나며 몇 줄의 선명한 문장이 된다. 삐뚤빼뚤하게 쓰인 문장을 조용히 웅얼거리고 나서야 나의 긴 산책은 끝이 난다. - 「깨끗한 마음으로 쓰는 산책」 중에서

함께 웃고 울고 떠들던 여덟 번의 여름은 선명한데 마지막 메일과 문자를 나누었던 아홉 번째 여름은 희미하다. 마치 누군가 필름을 뚝 자른 것처럼 맺음 없이 남겨진 마지막 여름 끝에는 옅은 감정만이 잔부스러기처럼 남겨져 있다. 소란하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네 번째 여름을 맞았다. H는 지금 어떤 여름을 지나고 있을까. - 「소란하던 여름이 지나고」 중에서

하나의 책을 함께 읽는 일이, 어릴 적 교실 안에서 하나의 교과서를 짝과 나누어 보면 순간에만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낡은 책들과 함께하는 계절에서 배웠다. (중략) 새 책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사적인 흔적을 읽는 일의 기쁨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나로 하여금 더 많은 문장을 쓰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다. - 「흔적을 읽는 계절」 중에서

 


 

사계절의 순환이 없었더라면, 작업과 삶에는 긴장과 이완이라는 밀고 당기기도 없었을 것이란 저자의 말에 수긍한다. 무한정 늘어진 삶을 살거나 매초 스스로를 다그치기만 하며 현재의 기쁨과 슬픔의 맛을 알지 못했으리라고 혼잣말하는 이유도 알아챌 것 같다. 그리하여, 저자는 날마다 새로운 배움을 전해준 계절들을 지나며 문장들을 엮었다. 계절의 테두리가 아닌 계절의 한가운데를 거닐며 느꼈던 민낯의 감정과 감각을, 새로운 계절 속에 서있는 독자들에게 전한다. 가난한 애정도, 짙은 질투도 겨우 한 뼘의 계절에서 왔다. 못난 모습도, 가끔은 모두 계절의 몫으로 두어도 좋다. 조금 모자란 듯한 계절이 지나고 다시 새 계절이 오면 지금의 휘청이는 걸음은 단단한 지도가 될 것이다. 그제야 지난 계절을 돌아보며 헤아릴 수 있을 거다.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들을.

 

저자 : 가랑비메이커

 

프리라이터(2015-)이자 출판사 문장과장면들 디렉터(2019-). 그럴듯한 이야기보다 삶으로 읽히기를 바란다. 모두가 사랑할 만한 것들을 사랑한다면, 나 하나쯤은 그렇지 않은 것들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낮고 고요한 공간과 평범한 사람들에 이끌린다. 작은 연못에서도 커다란 파도에 부딪히는 사람, 그리하여 세밀하고도 격정적인 내면과 시대적 흐름을 쓰고야 마는 사람이다.

단상집 시리즈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2015.독립출판),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2018.독립출판), 장면집 『언젠가 머물렀고 어느 틈에 놓쳐버린』(2019 개정), 고백집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2019.독립출판)를 기획, 집필했다. 가족 에세이 『거울 같은 당신께 겨울 같던 우리가』(2020)를 기획, 공동집필 했다. 책장과 극장사이를 머물기를 좋아하며 이따금 사진을 찍는다. 다양한 사람들과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프라이빗한 모임을 진행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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