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
김종해 지음 / 북레시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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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로써 등단한 뒤 60년 동안 시만 써온 시인 김종해가 산문집을 냈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그는 '서문' 「불 켜진 시인의 주마등(走馬燈)을 바라보며」에서 소감을 밝힌다. "작은 산문집 하나 세상에 내놓습니다. 저의 첫 산문집이자 마지막 산문집이 될 『시가 있으므로 세상은 따스하다』가 그것입니다. 이 책 한 권을 엮는 동안 내내 부끄러웠습니다. 지난날의 주마등을 그림으로 보는 듯 그 안에 담긴 한 시인의 삶의 흔적과 행로가 한 컷, 한 컷 모두 덧없고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 원고들 모두 불태워버리지 못한 것 또한 이미 늦었습니다. 이 한 권의 산문집을 펴냄으로써 시인으로서 지녀야 할 언어의 엄격한 통제와 자정 능력을 잃고 말았기 때문입니다."(p.5)

시인이나 소설가 등 중 일부 문인들은 수필 쓰는 것을 유난히 부끄러워하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책의 저자 김종해 시인이 그런 것 같다. 그는 심지어 산문집을 내는 것을, 시인으로서의 엄격한 언어 통제와 자정 능력을 잃었다고 자책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시인이 시 이외의 장르인 산문 쓰는 일을 외도라고 생각했던 '시의 연결성'은 아직도 시인은 갖고 있다고 항변하듯 말한다. 소설가 황순원도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 소설가로 불리워지길 원했고, 단 한 편의 수필도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 들은 바 있다. 이 때문에 김종해 시인이 산문집 내며 변명처럼 '서문'에 썼던 글은 '마지막' 작품을 쓰는 적절한 장르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어떤 것이기에 평생 써온 시보다 산문을 택했을까? 이 책에 해답이 있다. 60년 여를 시와 함께 살았지만 언제나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들이 문우들이고, 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어머니와 가족들은 실제로 세상을 떠나 곁에 없어도 시인은 떠나보내지 못했다고 생각이 든다. 이를 시로써 녹여내지 않고, 평생 안 쓰던 산문을 썼을까? 하는 질문에 하나의 '연결성'을 이유로 내세우게 된 것이란 생각도 독자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시인의 마음과 아련한 그리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 등 시로써 다 담아내지 못한 부분이 남아 마지막엔 산문으로 정리하는 것이 낫다고, 혹은 옳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시처럼 축약과 상징, 은유를 사용하는 언어보다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단어들로 이루어진 산문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지... 아무튼 그의 마음을 읽어보려면 이 책은 읽어야 한다. 독자도 사실 그의 시를 많이 읽어본 기억은 없다. 어떤 시를 써왔는지도 잘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남긴 산문을 통해 그의 시와 시 세계, 시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함께 기대한다.

"제가 쓴 모든 산문은 시와 시인을 이야기하고,

시와 시인이 그 구심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날까지 저는

누구보다 시를 사랑했던 한 사람의 시인의 이름을 갖고 싶습니다.”(p.6)

 


 

1963년 문단 데뷔 이래 처음으로 펴내는 산문집인 이 책에는 시인 김종해의 젊은 시절부터 오랜 세월 시인으로 살아온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와 접목된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1부 〈시인이여, 시를 떠나라!〉에서는 시를 향한 시인의 구도자적 마음가짐을 엿보게 하고, 2부 〈나의 문학 요람을 흔들어주었던 이들〉에서는 시인이 60년간 문단 활동을 해오며 인연을 맺었던 문인들의 면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시인과 시 세계를 함께 걸어온 우리 문단의 지성들이 빚은 에피소드를 통하여 낭만과 서정의 감상에 빠져들게 한다. 특히 산업화 시대의 한중심에서 나오는 감성, 아날로그 감성에 흠뻑 취할 수 있다. 3부 〈시가 된 유년 삽화〉에는 시인으로서 삶의 바탕이 된 저자의 어린 시절과 가족 이야기가 실려 있고, 4부 〈그 약을 다 먹으면 나는 잠들리라〉에는 시 작품의 배경과 단상이 담겨 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를 돕기 위해 시인은 야간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점원 생활을 했다. 그것마저 여의치 못해 야간 고등학교를 휴학하고 부산에서 속초를 운항하는 500톤짜리 알마크호 여객화물선을 타게 되었다. 이때의 선상생활 체험은 시인이 된 이후 시인에게 중요한 시의 소재를 제공했는데, 연작시 「항해일지」가 바로 그것이다. 「항해일지」는 바다를 항해하는 수부의 기록이 아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 도시에서 노를 젓고, 삶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화되어 있다.(p. 157)

"나는 아직 『항해일지』를 나의 대표시집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연작시 「항해일지」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는 것은 내가 살아온 누더기 같은 밑바닥 삶의 싸움과 사랑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연작시 형태로 재현해가고 있다는 재미 때문이다."(p.225)

 


 

시인은 서정주와 박목월, 황순원, 김춘수 등 학교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문인들과의 교류도 굉장히 열심히 한 것으로 보인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문학 등대의 빛으로 삼았던 시인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어릴 때(17세) 김종해는 파랗게 불꽃을 내뿜는 철공소 용접기를 들었고 500톤 여객화물선을 탔다. 그러나 가슴속 이글거리는 10대의 열정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절실한 삶의 기록을 끊임없이 시화(詩化)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실함은 이후 「항해일지」 연작시로 이어진다. 더 거슬러 올라가 김종해 시인의 문학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부산 서구 소재의 천마산에서 출발함을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내 시 의식의 원천이며 모태인 초장동은 언제나 꿈속에서 시공을 뛰어넘어 나타난다.”(p.136)

특히 박목월 시인과의 만남과 인연으로 박목월 시인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한다. 물론 시 쓰는 것을 가르쳐준 스승은 아니지만, 열심히 찾아뵌 덕에 저자의 시와 시 세계의 확장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도 느낌을 줄 만하다. 그와의 일화도 소개한다. 상을 쾅 치고 나서 나는, “목월 선생, 할 말 있소!” 하였다. 좌중은 경악했다. “와 그라노? 할 말 있거든 해봐라.” 목월 선생의 부드러운 말이었다. 다음 순간 나의 주먹이 음식상을 또 내리쳤다. 음식 그릇들과 술잔들이 또 튀었다. “남수 선생, 할 말 있소!” 또다시 그릇들과 술잔들이 튀어올랐다. “한모 선생, 할 말 있소!” (중략) 전날 일어났던 그 무례함과 추태는 나 자신으로서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다. 심한 위축감과 죄책감과 숙취로 찌든 채, 아침에 원효로의 목월 선생께 전화를 드렸더니 선생은 화들짝 웃어댔다. 그 웃음은 부끄러움 속에 꽉꽉 밀폐해놓은 나의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그래, 닌 술을 고거밖에 못 마시나, 우째 그래 주량이 작노? 하하하…….”(p.50~51)

 


 

박목월 시인과의 인연은 시인의 결혼식 주례를 설 정도로 진하게 이어졌다. 다동 '호수그릴'에서 박목월 선생 주례로 〈현대시〉 동인의 축하를 받으며 치른 부인 박영자 여사와의 결혼식(1971년). 3살 연상의 여대생에게 무작정 대시한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사랑 고백은 드라마틱한 과정을 겪으며 결혼에 이르게 되었고 두 사람은 당시에는 드물게 1964년 동거를 먼저 시작하고 7년이 지나 결혼식을 올렸다. 미당 서정주와 목월은 스승의 예로써 숭배하였고, 스승의 댁이 있는 공덕동과 원효로는 가난한 젊은 시인들의 성지였다. 무엇보다 공덕동의 미당 선생 댁은 명절날이 아닌데도 항시 북적대었다. 미당 선생이 목탁을 두드리면 그 소리를 듣고 방옥숙 사모님이 술과 안주를 끊임없이 내오셨다. 미당 선생은 아들 또래의 우리를 술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해주셨다. 문단에 갓 등단한 60년대 중반부터 이미 우리는 미당의 아호 앞에 ‘시성’이라는 호칭을 각자 마음속에 새겨놓고 있었는데, 미당만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고 되새겼다.

두 분을 정성으로 모시고 예도 갖췄지만 저자는 서정주의 시를 극찬한다. "러시아에 푸시킨이 있고, 인도에 타고르가 있다면 한국에는 미당이 있다. 시의 깊은 맛과 오묘함, 시정신의 넓이와 높이를 서로 재고 견줄 수는 없지만, 미당에겐 시인 최고의 호칭 '시성'이란 호칭을 붙여준다 해도 과하지 않다. 한국 현대시사 100년을 통틀어 한 사람의 시인을 호명하라고 한다면, 나는 내 시 읽기의 식성대로 서슴지 않고 미당을 뽑겠다. 릴케와 엘리엇, 칼릴 지브란, 미당과 목월, 김춘수, 김수영, 고은, 이어령은 나의 문청 시절 어둠 속의 등불이었고, 밑줄 친 문학 교과서의 한 문맥이었다."(p.118)

 


 

종로 3가에 있던 문학세계사 사무실은 한국시인협회 사무실도 겸하고 있어서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또 각 일간지의 문학 담당 기자들도 무시로 드나들면서 어김없이 바둑판과 고스톱판의 장이 서곤 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원로시인 박남수 선생도 귀국하면 들러 후배 시인들과 회포를 풀던 곳, 최하림 시인과 김원호 시인의 출판사도 잠시 둥지를 틀었던 곳, 1980년대 문학세계사 흑백 사진에 찍힌 추억의 한 풍광이다. 바둑과 고스톱과 술판은 그칠 날이 없었고, 만나면 즐거웠다. 고스톱을 막 배우기 시작한 정한모 선생에게 박현태 시인이 옆에서 훈수를 두었다. “선생님, 똥 잡수이소, 똥!” 좌중은 웃음판이 되었다. (p. 79)

 

저자 : 김종해

부산에서 태어났다. 1963년 《자유문학》지와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문학세계사(1979년)를 창업, 지금까지 3천여 종의 문학 관련 도서를 발행하였고, 시 전문 계간지 《시인세계》를 간행하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발기위원, 대한출판문화협회 이사, 제34대 한국시인협회 회장을 지냈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한국시협상, 구상문학상 본상, 공초문학상, PEN문학상 등을 수상했고, 그밖에 한국출판문화상, 대한민국문화훈장 보관을 수훈했다. 시집으로 『인간의 악기』 『신의 열쇠』 『왜 아니 오시나요』 『천노, 일어서다』(장편서사시) 『항해일지』 『바람 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 『별똥별』 『풀』 『봄꿈을 꾸며』 『눈송이는 나의 각을 지운다』 『모두 허공이야』 『늦저녁의 버스킹』이 있고, 시선집 『누구에게나 봄날은 온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무인도를 위하여』 『우리들의 우산』 『어머니, 우리 어머니』(김종해·김종철 형제 시집)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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