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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게 빛나는 ㅣ 안전가옥 쇼-트 15
김혜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0월
평점 :
이 책 『푸르게 빛나는』은 소설을 담은 책이지만 시집보다 예쁘고 아름답다. 예전 '문고판'처럼 작은 크기다. 손 안에 몇 권이라도 한꺼번에 놓을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한' 크기다. 소설을 담는 그릇이 달항아리처럼 아름답다면 '시집은 어떻게 내야 할까'란 숙제를 내줄 정도로 크기나 편집, 표지그림 등이 모두 "예쁘다"는 표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단편소설 3편이 다소곳이 독자를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연애 나 로맨스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분류상 '호러' 소설이다. 이 책은 신예작가이지만 호러물에 특화된 작가로 봐도 무방하다. 저자 김혜영은 "괴물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밝힌다. 전작들 역시 호러물이라고 한다. 독자가 독서가 짧아 못 본 새 이미 '호러작가'로 출판계에선 소문이 나 있는 모양이다. 출판사 〈안전가옥〉 스토리 PD 윤성훈은 「프로듀서의 말」에서 기획부터 원고청탁에 관한 이야기 등을 짧게나마 책 뒷 부분에서 밝히고 있다.
"2021년 봄, 안전가옥은 '호러'를 키워드로 스토리 공모전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 공모전에 선정된 이야기들을 엮어 『호러』라는 작품집을 선보였지요. 다채로운 공포의 풍경을 담은 이 작품집 첫머리에는 김혜영 작가님의 「습습 하」가 실려 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던 때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납니다. '몰래 엿본 옆집'이라는 소재, 낯익은 낯선 곳으로 만들어 알 수 없는 불길함이 바로 앞에 와 있음을 느끼게 하는 생생한 묘사 등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기에 작년 가을, 『호러』가 만들어지는 동안 작가님께 더 으스스하고 더 전율이 흐르는 이야기, 무서움을 넘어 매혹을 선사하는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보자고 요청했고, 작가님께서는 흔쾌히 수락해 주셨습니다."(p.189)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작가님께서 보여 주신 상상력은 단순히 '호러(horror)'라고 분류되기보닩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라고 불릴 만한 이야기였습니다. 코지믹 호러는 흔히 인간이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어떤 미지의 존재로 인한 공포, 인간이 지닌 어떠한 가치도 아무 의미가 없음을 말하는 절망적인 공포 정도로 정리되곤 합니다."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란 용어를 독자는 처음 들었지만 프로듀서는 더 친절한 말을 들려준다. 이에 따르면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란 장르를 본격적으로 분류하고 정의했으며 연구한, 19세기의 작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 P. Lovecraft)는 기묘한 미지의 존재들과의 조우, 그로 인한 파멸을 통해 인간이 영위하고 있는 일상적인 세계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허위로 가득 찬 세계인지 직접 창작해 보여 주기도 했다. 문자 그대로 ‘우주적인 공포’를 이야기한다. 이 장르에 등장하는 공포의 대상은 상식 밖의 무언가이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왜 나타났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미지의 존재가 너무나 압도적이기에 대항은커녕 사태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 아득한 장르는 뜻밖에도 평범한 감정을 정확히 파고든다. 삶 전체에 낮은 배경음처럼 깔려 있는, 완전히 해소할 수 없는 불안을 짚어 내는 것이다.
기이한 미지의 존재는 물론 중요하지만 결국 이것에 다가가게 하는 요소는 '매혹'이라는 점도 알려 주었다. '더 무서운 이야기를 보고 싶다'란 자신의 단순한 요구를 뛰어넘는 결과물인 『푸르게 빛나는』으로 김혜영 작가의 작품에서 공포와 매혹의 뒤섞임, 두려움과 아름다움의 공존,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무엇과의 만남을 잘 보여주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열린 문」, 「우물」, 「푸르게 빛나는」이란 세 개의 작품과 연결되어 독자들을 더욱 거대한 파경과 붕괴, 더욱 깊은 매혹과 현혹의 세계로 안내할 다음 작품들을 바로 이어서 소개해 드리고자 준비하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인다.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의 열다섯 번째 작품집 『푸르게 빛나는』은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서 시작되어 지구 밖의 존재를 암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가족, 친구와 멀어질지 모른다는 평범한 불안은 어느새 무자비한 상대에 의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공포로 바뀐다. 폭이 큰 감정 변화에 자연스럽게 동참하고 있노라면 우리가 청년 세대의 슬픔과 두려움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또 한 명의 근사한 신예 작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외로운 아이들의 밤에 찾아온 불청객을 그린 「열린 문」, 땀과 체취 때문에 외롭게 살아 온 여성이 정체 모를 이로부터 기묘한 물을 받으면서 겪게 된 인생 역전을 담은 「우물」, 신축 아파트에 생겨난 신종 벌레의 정체를 파헤칠수록 파국에 가까워지는 부부를 다룬 「푸르게 빛나는」 등의 세 작품이 실려 있다. 각 작품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완결성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들로서의 연결성을 함께 지닌다. 앞서 언급한 대로 기묘하게 낯설어 매혹적이기까지 한 작품 속 세계는 쇼-트 시리즈의 다음 작품집 『그분이 오신다』에서 더욱 확장된다고 한다.
이 책은 호러물이고 '불안'과 '공포'는 키워드이다. 불안과 공포는 우리 모두에게 내재한 감정이다. 다만 똑같은 상황을 다른 사람들은 공포로 느끼지 않는 것은 정상이다는 의학계는 불안과 공포는 고층건물에 설치된 화재경보기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발간한 『정신이 건강해야 삶이 행복합니다』에 따르면 화재경보기는 화재를 감지할 경우 신경이 곤두서는 소리와 불빛으로 건물 내의 모든 사람들에게 위협을 알리고 반응하도록 한다.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장치인 것이다. 그러나 화재경보기의 센서를 지나치게 예민하게 설정할 경우, 우리는 별일이 아닌데도 매번 울리는 경고음을 듣고 대피해야 하는 등 건물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게 된다.
불안과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위험한 상황에서 이 감정들은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너무 과하면 항상 불안에 휩싸이고 공포감에 시달려 행복한 일상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다. 스트레스로 작용되어 자칫 정서적, 육체적인 부작용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경우도 있다. 불안과 공포는 우리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센서의 민감도는 적당하게 조절해야 한다. 불안이나 공포가 밀려올 때는 이성적으로 본인을 설득을 시켜보자. 불안은 이성에 영향을 주는 감정이므로 이성적인 상황분석이 도움이 된다. 본인이 어려울 경우 나를 대신해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친구나 동료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다. 불안감이나 공포감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경우에는 전문 치료 기관을 찾아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정신의학자들은 불안과 공포를 적당한 수준으로 조절하는 수많은 약물과 치료방법을 연구해 왔다.
독자가 신경정신학회에서 발간한 책까지 동원한 것은 다음처럼 출판사와 이 책에 대해 불안과 공포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은 '불안의 이유'와 해결책을 책 소개글에서 밝히고 있다. 이에 따르면 불안의 이유는 첫째 가까이하고픈 대상과 멀어질 때이다. 우리는 언제 불안을 느낄까? 『푸르게 빛나는』 속 주인공들은 모두 가까이하고픈 대상과 본의 아니게 멀어진다. 「열린 문」의 주인공 남매는 초등학생임에도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아빠는 집을 나가 버렸고 바쁘게 일하는 엄마는 늘 피곤해한다. 심각한 액취증 환자인 「열린 문」의 주영은 만성 축농증 환자인 친구의 코 수술을 말린다. 후각을 되찾은 친구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서다. 「푸르게 빛나는」에 등장하는 신혼부부 여진과 규환은 배 속의 아이가 잘못될까 봐,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이 따돌릴까 봐, 경기도에서 서울로 영영 이사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한다. 걱정이 깊어지는 동안 두 사람 간 감정의 골도 점차 깊어진다.
그렇게 10대, 20대, 30대를 지나는 동안 모두가 알게 된다. 가족과 친구에게 사랑받는 것이 썩 당연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호감을 얻으려는 노력이 언제나 보답받지는 못한다는 것을. 지금 애정을 주고받는 사이라 해서 미래에도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계속 불안에 떨며 발버둥쳐야 한다. 어째서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지 의문을 품어 볼 수는 있다 해도 ‘인간에게는 사랑이 필요하다’라는 대전제에 대항하기란 불가능하다.
두 번째 멀리하고픈 대상이 다가올 때이다. 사람들은 멀리하고픈 대상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때도 불안해한다. 『푸르게 빛나는』 수록작 주인공들의 일상은 코즈믹 호러의 장르 특성에 충실한 미지의 존재들을 만나면서부터 무너진다. 지구상의 생명체와는 다른 외양을 지닌 존재는 호기심에 이어 일종의 매혹마저 일으키지만, 인간을 무심하게 해치는 모습이 드러남과 동시에 바로 공포의 대상이 된다. 언제 어디에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고 일단 마주쳤다면 피할 수 없다.
살아남아도 문제다. 다른 사람에게 경험을 공유하고 위험을 알리려던 인물들은 난관에 봉착한다.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이야기인 탓에 아무리 설명해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푸르게 빛나는」의 여진은 자신의 경험담을 듣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라고 대꾸하는 남편 규환을 향해 절규한다. “내가 있다는데! 내가 봤다는데! 내가 경험했다는데, 내가 무섭다는데!” 여진은 공포에 이어 고독까지 감당해야 하는 처지에 이른다. 작중의 상황이 조금 더 극적일 뿐 비슷한 일은 일상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나를 온전히 수용해 달라는 부탁의 끝에는 절망이 있다. 이 절망은 사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불안을 해소할 방법은 없을까? 코즈믹 호러는 명쾌한 해결을 말하는 장르가 아니다. 그리고 사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모른다. 가장 현실에서 먼 장르 중 하나로 보이는 코즈믹 호러는 이러한 접근법으로 현실을 ‘쿨하게’ 반영한다. 이를테면 ‘만들어 낸 이야기’라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아찔한 번지점프대인 셈이다. 불안을 맛보고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호러 독자들은 기꺼이 이 번지점프대에 서서 뛰어내릴 준비를 할 터다.
『푸르게 빛나는』이 그저 허황된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정교한 재현이다. 세 작품의 주인공들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공통점이 많지 않다. 연령대와 사회적 위치가 각각 다른 인물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어조와 상황을 채택해 몰입도를 높이는 솜씨를 보면 다음번에는 작가가 어떤 세계를 펼칠지 절로 궁금해진다. 뒤이어 출간될 단편집 『그분이 오신다』가 이 작품집과 세계관을 공유하니, 머잖아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열린 문」
초등학생 세나의 집은 건물 바깥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5층에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심심해하던 세나의 오빠는 도둑 잡는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야구방망이를 들고 현관문을 연다. 열린 문 사이로 도둑이 들어오면 때려잡겠다는 것이었다. 두 아이는 잠들기 전 가볍게 시간을 때울 만한 일을 원했을 뿐이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머릿속에 소용돌이치는 의문 중 단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우물」
주영은 외롭게 살아왔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리고 체취가 너무 심한 체질을 타고난 탓이다. 친구라고는 냄새를 거의 맡지 못하고 수시로 재채기를 하는 만성 축농증 환자 한 명뿐이다. 친구가 수술을 받은 뒤 둘 사이는 멀어지고, 주영은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난다. 여자는 주영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검은 물을 마시라고 권한다. 속는 셈 치고 그 물을 마셨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그 물을 구하는 데 왜 우비와 장화와 삽이 필요한지를.
「푸르게 빛나는」
여진과 규환은 신혼부부다. 경기도의 한 신도시에 새로 지어진 아파트로 이제 막 이사했다. 임신 중인 여진은 밤중에 깨어났다가 주먹만 한 푸른 구체를 보고 태몽을 꾸었다고 규환에게 알린다. 그로부터 몇 달 뒤 여진은 집 안 곳곳에서 새파란 점 같은 벌레들을 발견한다. 반면 규환의 눈에는 여진이 말하는 벌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규환이 보기엔 여진의 불안이 지나치고 여진이 보기엔 규환이 너무나 무심하다. 둘 사이가 조용히 멀어지는 사이 아파트 주민들은 세입자가 배제된 단톡방에서 아파트 내 각종 사건 사고를 비밀스레 공유한다.
저자 : 김혜영
괴물을 사랑한다. 이 말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매체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 영상과 글을 넘나들며 작업을 하고 있다. 단편영화 〈BJ PINK〉 와 〈소년의 자리〉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단편 수상 작품집 2021》에 수록된 단편 〈토막〉과 안전가옥 앤솔로지 《호러》에 수록된 단편 〈습습 하〉를 집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