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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
김병종 지음 / 너와숲 / 2022년 10월
평점 :
독자는 이 책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의 저자 김병종을 이름만으로 알고 있다. 그의 전작을 몇 권 읽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의 선택은 그의 글의 아름다움에 반해서이다. 그는 화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미학' 전공자로 독자는 알고 있다. 서울대 미대와 동대학원에서 동양학을 전공했다. 미학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자주 사용되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이란 현상,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에 대한 학문적 탐구 영역으로 알고 있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개념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미학은 그렇게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이론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두산백과사전에 따르면 미학(Aesthetics, 美學)은 가치로서의 미, 현상으로서의 미, 미의 체험 등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굳이 학문 분야로 분류하면 철학에 가깝다. 플라톤이 미에 대한 연구를 최초로 제기했다. 이 사전에도 여러 학문의 상위에 있는 미 그 자체의 학문을 제창한 플라톤을 대표로 하는 서양의 전통적 미학은 초월적 가치로서의 미를 고찰한다고 밝히고 있다.
미학이라는 말을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라이프니츠볼프학파의 A.G.바움가르텐이다. 그는 그때까지 이성적 인식에 비해 한 단계 낮게 평가되고 있던 감성적 인식에 독자적인 의의를 부여하여 이성적 인식의 학문인 논리학과 함께 감성적 인식의 학문도 철학의 한 부문으로 수립하고, 그것에 '에스테티카(Aesthetica)'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미(美)란 곧 감성적 인식의 완전한 것을 의미하므로 감성적 인식의 학문은 동시에 미의 학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근대 미학의 방향이 개척된 것이다. 고전 미학은 어디까지나 미의 본질을 묻는 형이상학이어서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초감각적 존재로서의 미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 미학에서는 감성적 인식에 의하여 포착된 현상으로서의 미, 즉 ‘미적인 것(das Asthetische)’을 대상으로 한다. 이 ‘미적인 것’은 이념으로서 추구되는 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의식에 비쳐지는 미이다. 그러므로 미적인 것을 추구하는 근대미학은 자연히 미의식론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임마뉴엘 칸트는 감성적 현상으로서의 미의식의 기초를 선험적인 데 두었지만, 의식에 비쳐지는 단순한 현상으로서의 미적인 것을 탐구하는 방향은 당연히 경험주의와 결부된다.
오늘날에는 미적 현상의 해명에 사회학적 방법을 적용시키려는 ‘사회학적 미학’이나 분석철학의 언어분석 방법을 미학에 적용하려고 하는 ‘분석미학’ 등 다채로운 연구분야가 개척되고 있다고 한다. 같은 사전에 의하면 '추'(ugliness, 醜)를 미(美)에 대립하는 미적 범주의 한 부분이라 풀이하고 있다. 추는 미학상의 용어로서, 추와 미의 관계를 엄밀히 따지면 ① 추가 미 이전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② 반미적이라고 생각되는 경우 ③ 보조적 의미로, 미적 카테고리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경우 ④ 자립적 의미로, 미적 카테고리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경우로 나뉜다. ①에서 추는 미적 형성화 이전의 소재로서 미적 가치에 대한 중성적 성격을 띠어, 다른 일체의 소재와 평등하게 취급된다. 예를 들면, 예술을 위한 예술을 기치로 하는 입장(일종의 미적 형식주의)으로서 성모와 채소를 평등시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②에서 추가 미적 형성화를 거부하는 경우 그것은 반미적이 된다.
예를 들면, 칸트는 추 중에서도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미적 형성화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추 일반을구토적·반미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고전주의 예술에서는 숭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추는 반미적인 취급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③의 경우 미적 카테고리론의 대부분은 추를 우미·숭고·골계와 병행하는 미적 카테고리로서 인정하지만, 엄밀하게는 이 경우 추는 숭고 및 골계를 위한 보조수단으로서만 미적 카테고리로서 인정된다. 예컨대 고전주의의 숭고가 선을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진을 목표로 하는 사실주의(일종의 미적 내용주의로서)의 예술에서도, 추는 마찬가지로 보조적 의미로 인정된다. 예술을 위한 예술주의와 사실주의와는 어느 의미에서는 반대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며 전자가 추에 대하여 무기적인데 대하여, 후자는 추에 대하여 수단적 의미에 있어 호의적이다. ④의 경우 추는 근대 데카당파의 예술에 이르러 비로소 자립적·미적 카테고리의 지위를 획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포나 와일드를 선구로 하는 불쾌·악·허위·배신 등으로서의 추의 예술이 그것이다. 또한 실존주의 예술에서는 보다 깊은 의미의 추가 자립적·미적 카테고리로서 인정된다. 예컨대, 구토를 불러일으키는 것마저도 거기서는 미적 카테고리로 인정된다.
이 책은 저자의 '화첩기행' 중 가장 최근작이다. 전작이 여러 권 있다는 말이다. 물론 '화첩기행'은 저자의 독자적 저서명이기도 하지만, 저자가 낸 책의 상당수가 그림과 글이 함께 실려 있어 '화첩기행' 시리즈로서 발간되기도 한다. 저자는 이 책 『거기서 나는 죽어도 좋았다』를 출간하면서 "아름다운 것에 허기져 한세월 세상의 풍경을 헤집고 다녔다. 여기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 풍경 스케치의 일부를 내놓는다. 몇 쪽은 이미 발표된 글과 겹쳐지기도 하고 더러는 세월이 흘러 시간의 퍼즐이 잘 맞지 않는 곳도 있다. 풍경 자체가 바뀌었거나 혹은 그 풍경을 대했던 마음 자리 또한 달라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설렘 속에 내가 만나거나 지나왔던 곳들은 첫사랑처럼 기억 창고에 차곡히 보관되어 있다. 가끔씩 햇빛에 바래거나 희미해진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의 여행을 새로 시작해본다. 이번에는 나 역시 여행의 추억을 들려줄 그대가 필요하다. 그 기억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풍경이 풍경에 연이어 있듯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자는 저서 『화첩기행』 이후 약 7년 여 만에 돌아온 김병종 화백이 여러 나라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그의 눈에 저장된 풍광과 외국 예술가에 대해 탐구하고 사색한 내용을 담았다고 출판사 측은 책 소개글을 남겼다. 예술가들의 흔적을 비롯해 그들이 재능을 키워간 도시에도 초점을 맞춰 공간과 예술가의 유기성을 작가만의 섬세한 사유로 그리고,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평과 함께다.
왜 지극한 아름다움 앞에서는 눈물이 나는 걸까.
왜 그 아름다움의 한가운데 고여 있는 마알간 슬픔이 보이는 걸까.
왜 모든 아름다움은 곧 지고 말 것 같은 떨림을 주는 걸까.
왜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이 책에는 전작 『화첩기행 5』에 실린 여행지가 겹친 곳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밝혔듯 겹친 지역은 있지만 전작을 그대로 옮겨 심은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는 그때 쓴 느낌과 또 다른 감정을 말하고 있다. 해가 지는 서쪽이라는 뜻의 마그레브(Maghreb). 지는 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실제로 마그레브 지역은 유럽사람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다. 그렇지만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한국에서 가기는 쉽지 않다. 알려진 정보도 아시아나 유럽 그리고 북미에 비해서는 많지 않다. 이런 마그레브 지역을 찾기로 한 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고 생각하던 어떤 여름. 원래 혼자 떠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 그리고 전문 사진가 겸 가이드 이렇게 4명이 떠났다. 목적지는 알제리와 튀니지, 모로코 그리고 몰타. 책에는 몰타가 빠지고 이집트를 넣었다. 몰타를 북아프리카로 보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많았고, 북아프리카를 논하면서 이집트를 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책에는 「치유하는 사하라」에 잘 나타나 있다. 사하라의 황량한 풍경 속에는 가난하고 외롭게 죽어간 이들의 공동묘지도 있다고 말한다. 동양화가이지만 '색'을 중요시한다는 저자는 사하라의 강렬한 붉은 해에서 '더 붉은색'을 보고, 사막에서 꽃과 나무도 '더 진한색'으로 느낀다고 한다. 공동묘지는 평생을 남의 장례식에 불려 다니며 대신 곡을 해주는 일을 하다가 죽어간 이른바 '대곡자의 묘'다. 대신 울어주는 일을 업으로 하며 살다가 죽어간 여인들의 공동묘지다. 밤이면 가끔씩 여우며 이리가 몰려다니며 묘를 파헤친다고 하여 기분 나쁜 곳이라 일컬어져 지나가는 차들조차 빨리 가려고 한다는 사하라의 어느 지점에서 저자는, 밤 비행을 하다 추락한 체험을 살려 『어린 왕자』를 쓴 생텍쥐페리를 생각해 내기도 한다. 낮에는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사막이지만 밤이 되면 기분 좋은 서늘함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러나 사막의 모래바람을 만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모로코에서 길 안내하던 한국 여인을 생각해 낸다. 모든 여행객의 발을 묶어도 이 여인은 사막으로 여행을 계속해 남들은 모르는 치유와 회복, 그리고 삶에 대한 열망을 안고 돌아오는 것을 보고 영감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죽어도 좋을' 장소는 어디일까. 독자는 꼭 기억해뒀다가 못 가본 곳이라면 버킷리스트에 올릴 참이다. 다행히 저자는 1부 1장에 책 표제어와 같은 제목으로 썼다. "작은 여객선을 타고 파트모스 섬(성경에는 '밧모'라고 번역되는, 세례 요한이 〈요한 계시록〉을 썼다고 전해지는 섬)을 찾아가던 에게해 여행을 잊을 수 없다. 옥색과 청회색과 은색, 그 위에 보석 가루를 뿌린 듯한 바다. 뱃머리로 나와 황홀한 그 바닷속을 바라보자니 불현듯 '여기서라면 죽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스친다."고 표현한다. 이어 저자의 사유가 계속된다. "내 남루한 육신마저도 저 신비한 바닷물에 씻기고 헹구어져 함께 흘러갈 수 있다면, 그렇게 흐르고 흘러 마침내 빛의 문 앞에 닿을 수 있다면 하는 생각. 왜 지상의 죽음은 늘 음침함과 상(傷)함과 애곡 속에 있어야 하는 걸까. 사는 일이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라면 죽음 또한 그러해야 할 것 아닌가. 아니, 사는 일이야 눈물겹다고 하더라도 죽음만은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 저토록 황홀한 물빛의 아름다움 속에 마지막 육신이 뉘어질 수는 없는 것일까. 물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다. 그런데 모태의 양수 속에서 나온 생명체는 왜 물이 아닌 습기 찬 땅속에 묻혀야 하는 걸까. 저 시리도록 푸른 물속으로 내려지는 죽음은 왜 없는 것일까."
저자는 에게해의 물빛을 떠올리다 보면 늘 죽음이 함께 떠오른다고 말한다. 화사한 죽음이. '거기서라면 죽어도 좋았다' 저자의 죽음에 대한 사유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지난 2월 타계한 고(故) 이어령 선생에 대해 「밤중에 온 하얀 꽃」에서 세상을 떠나기 몇 시간 전 저자의 집에 소담하고 하얀 양란을 보내왔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은 어디에서 지상의 삶을 마감하게 될까. 내게 죽음의 미학을 가르쳐주고 떠난 이어령 선생처럼 나도 창밖에 푸르고 청정한 소나무가 있는 나의 집에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이처럼 가족들이 둘러선 속에서 일상의 한 자락처럼 그렇게 죽음의 페이지로 넘어가고 싶다. 내가 퍼트린 색의 분자들이 ‘밈’이 되어 민들레 꽃씨처럼 퍼져 나가는 가운데 고요히 떠나고 싶다. 아련히 찬송가의 코러스를 들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라는 생각을 추스리기도 한다.
이 책은 다른 여러 책과 마찬가지로 '여행 산문집'이란 문학 분류상 성격을 표지에 실었다. 이는 저자가 여행을 하면서 얻은 그림과 글이 책으로 발간될 경우 많은 독자들에게 심리적 치유와 희망, 의지를 담은 메시지를 강렬하게 표현하기에 매우 적절한 방법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독자에게는 보인다.
“여행을 하면 나도 잘 모르는 제3의 에너지가 발동되는 것 같아요. 신명이랄까. 그리고 독특한 성벽인데, 나는 여행을 하면서 느꼈던 것을 글로 적고 그림으로 그렸을 때 비로소 여행의 완성, 즉 마침표를 찍을 수 있어요.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여행을 떠나면 글을 끄적거리고, 평소엔 잘 그리지도 않으면서 여행을 할 땐 호들갑을 떨면서 그림을 그리죠. 숙제처럼 밤에 아무리 피곤해도 꼭 글을 쓰고 그림은 시간이 많이 걸리니까 스케치만이라도 해두죠.눈으로 보고, 소리로 듣고 그런 지각적인 체험, 망막 속에 남아 있는 사람과 사물의 풍경, 그런 것들을 체험하는 것으로 여행이 종료되는 게 아니라, 낮 동안 내 감성의 포충망 속에 잡혔던 것들을 밤이 되어 다시 끄집어내 글로 정리하고, 그림으로 그려야 해요. 내 나름대로의 문장과 그림으로 표현하지 않으면 영 찜찜한 기분입니다. 표현하지 않은 채 구경만 하고 돌아오면 어쩐지 변죽만 울린 것 같죠. 표현을 한 후에야 여행이 육화(肉化)되는 것 같아요. 제 여행의 방식은 그런 면에서 좀 독특한 것 같아요.”
여행의 방식이 독특한 저자 덕분에 여행의 제약이 따르는 요즘, 간접적으로나마 눈과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이야기를 만나게 된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은 위안을 받을 수 있다. 꼭 필요했던 이야기이기에 마음에 풍족한 힐링을 가져온다. 저자의 에세이 여행을 마치는 즈음엔 독자도 기억하고 싶은 삶의 순간들을 많이 경험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표현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삶의 에너지가 솟는 이유다.
얼마 전 작고한 이어령 선생은 화가 김병종에 대해 “날치가 물을 차고 오르듯 힘찬 붓질과 아름다운 색채로 생명의 시를 쓰는 화가”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서울대 미대 학장을 지낸 김병종 저자는 2010년대 ‘생명의 노래’에 이어 최근 2, 3년 전부터 ‘풍죽’과 ‘송화분분’ 등의 작품을 공개, 국내외 미술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런던의 사치갤러리(Saatchi Gallery)는 김병종 화백을 올가을 런던 아트페어에 초청하기도 했다고 한다. 저자 김병종의 최신 작품은 이 책에도 수록되었으며, 중국 최대의 현대미술관인 진르(今日)미술관과 독일의 구아르드니 미술관, 헝가리 기욜미술관, 프랑스 몽트니갤러리와 가나 보브르갤러리, 전북도립미술관 등에서 대규모의 초대전과 기획전을 열은 바 있는 저자는 세계 3대 아트페어로 일컬어지는 피악(FIAC), 바젤, 시카고 등의 아트페어에도 두루 작품을 출품했다.
저자 : 김병종(金炳宗)
1953년에 태어나 서울대 미대와 동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서울, 파리, 시카고, 브뤼셀, 도쿄, 바젤 등지에서 수십 차례 개인전을 가졌으며, 국제 아트페어와 광주 비엔날레, 베이징 비엔날레, 인디아 트리엔날레 등에 참여해왔다.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미술기자상, 선미술상, 대한민국 기독교미술상, 안견미술문화대상 등을 수상했고,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대영박물관과 온타리오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외 저명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도 초기작 〈바보 예수〉부터 근작인 〈풍죽〉 〈송화분분〉까지 다수의 작품이 상설전시되고 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의 국빈 방문 때는 그의 작품이 증정되기도 했다.
글 쓰는 화가 김병종은 대학 시절 동아일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함과 동시에 전국대학미전에서도 대통령상을 받는 등 일찍부터 글과 그림의 경계를 허무는 전방위적 예술가의 행보를 보여왔다. 동양철학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중국회화연구』를 통해 한국출판문화상을 받기도 했다. 서울대 미대 학장, 서울대 미술관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서울대 명예교수, 가천대 석좌교수로 있다. 대표작 『화첩기행』(전5권) 외에 『바보 예수』 『생명의 노래』 『오늘 밤, 나는 당신 안에 머물다』 『자스민, 어디로 가니?』 『나무 집 예찬』 『감히, 아름다움』(공저) 등을 썼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