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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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은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각인되어 있다. 그의 전작 『생각이 나서』는 74만부라는 엄청난 부수가 판매되었다. 그동안 소설과 에세이를 통해 우리에게 편안한 위로를 전해온 작가 황경신은 지난 2010년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일상의 단상을 모아 펴냈던 에세이집 『생각이 나서』가 1, 2를 연속 출간했었다. 이 에세이는 때로는 일기처럼 하루하루 스치듯 지나간 순간들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어쩌다 한 번은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에서 슬쩍 이야기를 꾸미기도 했다. 다른 이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조용한 일상 틈바구니에 어쩌면 그리도 특별한 이야기와 의미가 숨어 있었는지, 행간 사이사이 독자들은 감탄했다.

『생각이 나서』는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날짜별로 쓰인 일기 형식의 에세이다. 일기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꼭 그날의 일만 담진 않았다. 때로는 과거를 회상하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누군가가 건넨 다정한 말 한 마디에 한껏 행복해하고, 문득 떠오른 단상을 좀 더 길게 이어가보기도 한다. 우리가 보내는 하루란 사건의 총합보다 생각의 총합일 때가 더 많다는 게 작가의 생각인 듯했다. 이 책은 결국 작가 황경신의 하루하루를 가장 촘촘하고 깊이 엿볼 수 있는 통로가 됐다. 세상 모든 여리고 약한 존재에게, 나 또한 너만큼이나 약하고 불안하다고, 하지만 삶이란 때론 견뎌볼 만하지 않더냐고 솔직하게 말을 거는 작가 황경신의 글은 언제나 우리에게 묘한 위안과 행복감을 준다. 이번 출간한 책 『달 위의 낱말들』에서 작가는 어떤 말로 우리에게 다가오려는지 사뭇 기대되는 이유다.

 


 

이 책 『달 위의 낱말들』은 단어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듯이 펼쳐지는 스물여덟 편의 짧은 수상(隨想)과 작가와 얽힌 사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열 편이 수록된 에세이집이다. 황경신은 시처럼 유려한 언어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작가는 「여는 글」을 통해 이 책의 집필 의도를 드러낸다. "낱말의 숲속에서 자라는 낱말의 나무,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는 낱말의 열매를 땄다. 던져보고 굴려보고 핥아보고 깨물어보았다. 잘 익은 낱말 한 알을 당신에게 주려고 사랑을 품듯 마음에 품었다. 하지만 당신이 건네받은 낱말은 맛과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 당신은 어리둥절했고 나는 속이 상한 채로 우리 사이에는 오해가 쌓여갔다. 낱말의 열매들은 망각의 정원에 버려져 뭉그러지고 썩어갔다. (중략)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고요하고 가끔 행복했다. 낮이면 우주 같은 바닷속에서 먼지 같은 나를 겪고, 밤이면 천천히 양을 세며, 세상은 그리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중얼거리며, 나를 보호하려는 본능도 없이, 숨김도 없고 쉼도 없이 차곡차곡 숨을 쉬듯, 사랑을 했다. 마음이 내키면 또 한 번 물통에 물을 채우고, 신발끈을 조이고 길을 떠났다. 그럭저럭 내 인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 책은 순서대로 읽지 않기를, 아무 페이지나 마구 펼쳐 마구 읽기를 부디 바랍니다."고 덧붙여 썼다. 자신이 이전에 책의 순서를 날짜순에 맞춘 것들이 이젠 '망각의 정원'에 버려진 채로 잊혀져 가서 이 책을 새로 썼지만 전작처럼 순서를 굳이 붙이지 않을 생각이라고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1장 〈단어의 중력〉에서는 작가 황경신이 직접 찍은 사진이 수록되어 저자가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다양한 장소에서 찍은 다양한 경험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우리에게 전해진다. 2장 「사물의 노력」에는 일러스트레이터 전지나의 감성적인 일러스트가 실려 있어 한층 더 풍부한 느낌을 자아낸다. 항상 다채로운 사진, 일러스트와 함께 선보이는 작가의 글은 독자들에게 더 큰 울림을 안겨 준다.

작가는 「여는 글」을 통해 '망각의 정원'에서 썩어가는 열매의 씨앗들이, 바람을 타고 달로 날아가,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잎을 여는 중이라고 말한다. 터지고 쫓고 오르는 것들, 버티고 닿고 지키는 것들이 거기 있었다. 인연과 선택과 기적이 거기 있었다.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것이 되어. 이 책에서 작가는 일상에 녹은 단어와 사물들을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평범한 경험, 수수한 사물은 작가의 손길이 닿음으로써 소중한 순간, 특별한 존재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수많은 독자가 사랑하는 작가의 낱말은 우리의 마음에 날아들어 특별한 싹을 심는다.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잎을 뻗고 꽃이 피어나는 순간, ‘말랑하고 따뜻하고 착하고 예쁜’ 황경신만의 언어가 우리 마음속에 꽃잎처럼 터지기를 기대한다.

 


 

물리학에서 '중력'이란 '지구의 만유인력과 자전에 의한 원심력을 합한 힘'을 말하지만 일상적으로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작용한다. 이를 만유인력이라고 한다. 즉 공을 들고 있다 놓으면 공은 지구 중심 방향을 향해 아래로 떨어진다. 이때 이를 중력 때문이라고 하고, 그 중력은 만유인력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은 표제어 대로 '달 위의 낱말들'이다. 달도 우주에서 하나의 물체로서 당연히 중력을 가진다. 달 위에 있는 낱말들은 중력을 가지는지 저자는 각 낱말들을 대상으로 숙고를 거듭한다. 첫 장 「단어의 중력」에서 나오는 각 낱말은 중력이 있나, 없나를 따진다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다. 중력이란 물체가 가지는 것이지 추상적 개념이 중력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1장 첫 글 〈내리다〉에서 그 단초를 찾아본다.

"마침내 나는 잊어버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믿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도." 일곱 살의 너는 두레박을 내렸다. 둥글고 깊은 우물 속에 하얀 달이 떠 있었다. 딱히 물이나 달 같은 걸 길어 올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며칠 전의 '사건'으로 인해 알아버린 '상실'을 음미하는 중이었다. 그 사건은 환한 대낮에 일어났다. 그때도 너는 외갓집 마당에 있는 우물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물 안에는 달이 아니라 외할머니가 넣어둔 수박이 둥둥 떠 있었다. 네가 우물 안쪽으로 몸을 기울이자, 네 목에 매달려 있던 지갑이 흔들렸다. 빨간 사과 모양에 끈이 달려 있어, 목걸이처럼 목에 걸 수 있는 지갑이었다. 지갑 속에는 백 원짜리 동전 세 개와 외할아버지에게 받은 천 원짜리 지폐 한장, 그리고 유리구슬 세 개가 들어 있었다. 구슬치기는 하지 않지만 알록달록한 색깔이 예뻐 사촌오빠에게 얻은 것이었다. 그리고 가지고 놀던 목걸이 지갑을 놓치면서 우물 안 물에 닿아 천천히 젖어가며 가라앉을 때까지 10분 동안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알게 됐다. 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도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을.(p11~12)

 


 

「찾다」는 작가에게 절망을 가르쳐 주었다. 서른 번째 생일에, 너는 프랑스 북서부 해안의 블루 카비아에 도착했다. 딱히 작정한 것이 아니라 흐르는 대로 흘러가다 닿은 곳이었다. 마릉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11월의 바람으로 스산했고 축제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운명이나 인연을 기대했던 네 마음에도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네 마음속 텅 빈 구멍을 휘돌며 네게 속삭였다. 나는 영원히 나의 반쪽을 찾지 못할 거라고, 평생을 외롭게 살다가 외롭게 죽을 거라고. 길 위에서 보낸 10년의 세월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휘날리는 낙엽을 밟으며, 너는 인적 없는 거리를 오래 걸었다. 너를 따라오는 것은 저물어가는 해가 드리운 긴 그림자뿐이었다. 광장에 있는 작은 카페 앞에서 너는 걸음을 멈추고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밤처럼 검은 커피를 앞에 놓고 생각에 잠겨 있던 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옆 테이블의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멜빵바지를 입고 헤어밴드를 한 은발의 노인이었다. 턱을 괴고 있는 손등에는 늙은 나무껍질 같은 버짐이 피어 있었다. 들고 나는 소리나 기색도 없이 어느 새 거기 앉았을까, 네가 갸웃거리자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중략) "알고 있으면서도 용납하지 못하는 마음이 깊은 곳에 있는 거겠지. 이생이 아니라 전생에서라도, 전생의 전생에서라도, 어쩌면 태초에는, 인간은 완전하고 완벽했을 거라는. 그런데 어쩌다 둘로 갈라져 온갖 쓸쓸함을 견디면서 외톨이로 살아가게 된 거라는." (중략) "불완전함을 채워줄 반쪽 같은 게 있을 리 있나. 세상은 그렇게 잘 만들어지지 않았어." 그는 휘청휘청 멀어졌다. 지금까지 외로웠고 이제부터 영원히 외로울 너와 불완전한 세계 위로, 완벽한 노을이 내려앉고 있다.

 


 

우리의 아픈 것들은 시간이 흘러 바람을 타고 달로 올라간다. 지구라는 환경에서 싹을 트지 못한 썩은 열매들은 환한 달까지 날아가 언젠가는 싹을 트고 말 것이다. 어느 어둡고 깊은 밤, 우리는 고개를 들어 우리가 떠나보낸 아픈 것들이 꽃잎이 되어 밤하늘을 빛내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도서의 제목이 『달 위의 낱말들』인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찾을 길도 잃어버릴 길도 없는 곳, 희망의 빛이 가물가물 희미해지는 그곳에서 산마르코 광장의 어느 저녁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네 혀끝을 감도는 순간의 맛을 느끼고 싶다고 생각한다. 낯선 이의 길고 고난한 삶이 너에게로 흘러 들어오던 그때, 세계는 아름다웠으나 너는 외로웠다. 너는 외로웠으나 세계는 아름다웠다.(p.96) - 「막장」 중에서

소원이 이루어지길 소원했던 그는 소원이 없는 삶을 소원했다. 너는 그날 소원 대신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썼다. 종이를 나무에 매달며 너는 생각했다. 어쩌면 소원의 나무는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지금 너의 소원이 무엇인지 묻는, 그래서 네가 지켜가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나무일 거라고.(p.159~160) - 「소원」 중에서

 

저자 : 황경신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그림 같은 세상》, 《모두에게 해피엔딩》, 《초콜릿 우체국》, 《세븐틴》, 《그림 같은신화》, 《생각이 나서》, 《위로의 레시피》, 《눈을 감으면》, 《밤 열한 시》, 《반짝반짝 변주곡》, 《한입 코끼리》,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국경의 도서관》, 《아마도 아스파라거스》,《생각이 나서2》,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등의 책을 펴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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