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담 싸부 - Chinese Restaurant From 1984
김자령 지음 / 시월이일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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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담(健啖)은 '잘 먹는다', '먹성이 좋다'는 뜻의 한자어라고 한다. 이 책 『건담 싸부』를 읽으면서 처음 알았다. 우리 일상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용어라서 중국 혹은 일본의 말을 한자로 표현한 걸까?라고도 생각해 봤지만, 이 책의 저자 김자령이나 소설의 주인공 두위광의 이름으로 미루어 중국 한자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건(健)' 자는 '건강'이라는 단어를 많이 쓰기 때문에 쉽게 알았는데 역시 '담(啖)'는 생소하다. 어쩔 수 없이 자전을 찾아보는 수밖에. 입 '구(口' 변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먹는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찾아보니 '먹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고 '건담'은 '잘 먹는다', '많이 먹는다'는 뜻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주방장 두위광이다.

이 책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등장인물과 중국집 주방의 업무별 직급과 화교 용어를 따로 페이지를 마련해 풀어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주인공 두위광은 70대 중반의 산둥 출신의 화교 요리사다. 40년 가까이 중국집 '건담'의 주방을 지켜왔다. '펑즈(미친 사람)'라 불릴 정도로 고집스럽고 괴팍하지만 평생 수도승처럼 요리에 정진하며 살아온 중식계의 전설이라고 한다. 서양의 유명한 요리사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만의 요리 비법을 간직해 요리에서의 고집은 이해할 만하다. 특이한 점은 '중국식 냉면'이란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한다.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누구도 이유를 묻지는 못한다. 어릴 때부터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건담 두위광은 몸으로, 어깨너머로 중식을 배운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배웠던 방법으로 가르쳤다. 그런데 이유가 그 방법 밖에는 알지 못했으니까라니 조금은 터무니없다.

 


 

이 소설에서는 세대 간의 갈등과 실패자의 도전과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으려 노력하는 사람과 노력 없이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의 모습들이 우스꽝스럽게, 적나라하게, 짠하게 그려진다. 책을 읽는 동안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 날 정도다. 이런 집이 우리 동네에 하나 있으면 자주 시켜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건담 식구'들의 이미지가 좁은 주방에서 웍을 돌리고, 화력 좋은 불앞에서 땀을 흘리고, 담벼락에서 담뱃불을 피우며, 좁은 홀안을 우아하게 돌아다닌다. 흔히 동네 중국집에서 보았던 광경이라 큰 거부감은 없다. 두위광 만큼이나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때론 독자를 반성케 하고, 독자를 응원하게 하고, 독자를 위로하기도 해서 책을 놓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건담 식구는 건담의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말한다. 도본경도 그중 한 명이다. 20대 후반으로서 건담 입사 6개월 차의 신입 직원이다. 책에 소개된 대로 읽으면서 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인물이다. 거대한 체격에 잘 웃고, 긍정적이며 매사 심각할 거 하나 없는 단발머리의 청년이다. 설거지를 비롯해 온갖 잡일을 맡아 하는 '싸완(설거지와 잡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이러저러한 기술적 문제들을 담당하는 해결사이다. 드라마로 표현하는 조연인 셈이다. 중식 만드는 실력으로 봐서는 요리가 처음인 듯한데 가끔 꺼내 드는 요리 핀셋이나 서양 조리용어가 정체를 의심하게 한다.

 


 

이밖에 20대 중반의 건담의 튀김과 후식 담당 강나희. 그녀는 입사 1년을 훌쩍 넘어가지만 다들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다기 세트를 챙겨 다니며 항상 차를 마시고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냉정한 말투와 표정 때문에 '차차'라는 별명이 있다. 흰 피부에 깡말랐고, 머리카락 한 올 빠짐없이 당겨 묶은 말총머리가 트레이드마크다. 고장모는 50대 중반의 지성과 교양을 갖춘 관악대 출신의 매니저이다. 젊어서부터 손님으로 건담을 오가다가 어느 날 이력서를 내밀고 일하기 시작한 지가 20년이 넘었다. 말이 매니저지 홀 담당부터 바쁠 땐 설거지까지,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불평불만 한 번 없다. 관악대, 대기업 출신인 그가 왜 건담에 머무르는지 누구나 궁금해한다.

주원신이라는 40대 중반의 건담 만년 실장도 있다. 입사 4년차다. 중국집 실장보다는 배우가 더 어울리는 외모지만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호텔 부주방장을 거치는 등 요리계에서 잔뼈가 굵은 실력파 요리사다. 내리 3번의 폐업을 겪으며 만신창이가 되 채로 떠돌다 두위광의 요리에 반해 일을 시작했다. 초심으로 돌아가 뭐든 배워보겠다는 각오로 입사했지만 제대로 가르쳐주는 법이 없는 데다 괴팍하기까지 한 두위광과 사사건건 부딪친다. 구레나룻이 있고 맵거나 화가 나면 왼쪽 눈썹이 올라간다.

건담에는 긍정적 이미지의 인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곡미소, 그는 50대 후반의 남자로서 건담의 명동 시절, 주방에 불을 지르고 홀연히 사라졌던 옛 직원이다. 2년 전 연희동에 나타나 곡씨반점을 열고 화교 행세를 하는 중이다. 중국식 냉면(그의 식으로 중화냉면)을 개발했다고 떠들고 다니는데 어느덧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두위광이 '원숭이'라고 부르며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라고 노래를 부른다. 이밖에도 건담 주방의 칼판(장만옹), 주방의 면판 겸 홀 담당(이정판), 홀 직원(오선주)과 잠깐 얼굴을 비치는 유명 음식평론가 하장식, 대기업 식음료부 총괄 부사장 차금정이 있다.

 


 

마치 드라마 시작할 때 '나오는 사람들'을 보는 기분이다. 중국 화교 음식점에는 나름대로의 담당 업무별 직급이 있는 듯하다. 이 책에는 주방장을 정점으로 아래 업무를 담당하는 직급도 소개하고 있다. 소설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해하기 쉽게)이니 소개했을 터, 신중하게 읽는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전체 요리를 책임지고 주방과 직원을 관리하는 사람을 '주방장'이라 한다. 업소에 따라 조리장, 실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화교가 운영하는 중식당 주방에서는 '싸부(師傅)'라 불렀다. 다음이 '칼판'이다. 칼질로 재료를 다듬고 준비하는 사람을 이른다. 과거에는 재료 구입까지 도맡은 주방의 최고 서열자였다. 그 대장을 칼판장이라고 한다. 뚠얼(燉兒). '燉'은 '이글거릴 돈'이다.

'불판'이 그 다음 서열에 있다. 불과 웍으로 조리하는 사람으로 음식의 간을 담당하는 자리다. 현재는 칼판보다 우위에 있다. 그 대장을 불판장이라고 한다. 훠얼(火兒). 기름으로 튀기는 일을 전담하는 사람을 튀김장 '짜훠얼'이라 하고, 면을 관리하는 면장, 면장 보조, 손님의 주문을 표에 적는 사람을 '점표(깐딴얼)'이라고 한다. 중식당의 규모는 적어 놓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흔히 말하는 '청요리집' 규모일 것으로 추측되고 종사하는 사람의 수도 늘리거나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용어가 중국말이어서 바로 외우기는 힘들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소설을 읽는 동안 수시로 들춰보면 소설을 다 읽을 무렵이면 익숙해질 것 같다. 지나치게 큰 비중을 두거나 중국어를 배운다고 하다가는 소설의 흥미를 놓쳐버릴 수 있으니 독자들의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책에 나오는 두위광은 수십 년 간 중화요리를 만들어 온 사람으로 화교이다. 그는 괴팍하고 고집스럽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비길 데가 없는, 걸출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중반부까지 자신의 요리 철학을 답답하리만큼 고수하는 모습이 오히려 보기 좋다. 요리사의 자부심이랄까? 그런 느낌이다. 그런 요리사가 해준 음식은 맛도 훨씬 좋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그도 생물체다. 모든 생물체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어려운 유전학의 정설을 비켜갈 수 없는 인물이다. 결국은 변화를 결심하지만 그 고집스러움은 옛것을 지키려는 장인의 외고집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어서 비범한 사람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두위광은 변화를 모색한다. 아들, 손자뻘인 제자에게 요리를 배우기도 한다. 이전에 고수했던 정통 중화요리를 벗어나 다른 요리와의 접목을 시도도 해본다. 중요한 가치는 고수하되 변화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이다. 예전에는 자신의 신념이나 철학이 무너지더라도 결코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선비의 정신, 정의로운 사람의 행동을 높이 샀다. 지금도 결코 꺾이지 않은 선비 정신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그 반대로 변화를 거듭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오롯이 빛난다. 주위의 여건 때문에 변화를 모색하는 두위광의 외고집은 오히려 요즘 세상에서 찾기 힘들다. 두위광이 더욱 빛나는 인물도 대접받을 수 있는 이유다. 그의 고집스러움은 꺾이지만 변화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여전히 자신의 요리 철학이나 자부심은 변화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독자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중국 식당의 일을 소설로 써서 영화처럼 코믹의 소재로 쓰였을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고 편견에 불과했다.

이 책은 요리 장인이 자신의 요리 철학을 굽히지 않고 변화에 맞서다 결국은 고집과 변화를 함께하는 것으로 결말을 끌어가지만, 독자들에게는 여운이 남는 생각 많아지는 소설이다. 특히 원칙과 옳은 길을 무시한 채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변화와는 다른 결과를 빚어낼 것이란 생각이 소설 끝날 때까지 가시지 않는다. 그것이 이 소설의 목적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작가의 말」을 통해 저자는 이 요리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이유에 대해 쓰고 있다. "그가 어떻게 중국식 냉면을 제일 처음 만들어냈고 또 빼앗겼으며, 명동 최고의 화상 주사의 청요리집에서 동네 중국집으로 쪼그라들었는지··· 하는 과거의 이야기들. 하지만 저는 그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의 뜨거운 요리 열정과 그 일을 지키려는 집념, 변해야 한다는 각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이들과의 세대를 뛰어넘는 우정 같은 이야기 말이죠. 뜻이 길을 만든다는 의지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정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인생은 우연이 지배하는 불합리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 노력과 변화가 언제나 보상을 받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출렁다리를 건너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 누군가를 붙들 지혜와 용기를 낸다면 실패와 좌절을 견디고 의지를 발휘하는 게 좀 더 쉽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저자는 '산다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소소한 낙(樂)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삶은 이울지 않는다'는 어느 선인의 말을 되새기며 사람들과 어울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살자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고 밝힌다.

 

저자 : 김자령

 

단막극 <고씨 가족 갱생기>로 드라마작가협회 신인상의 최우수상, 장편 영화 <홀>로 부산국제영화제 Film Workshop의 1등상을 수상했고, 몇 편의 장·단편 영화 각본을 썼다. 2022년 첫 장편소설 『건담 싸부』를 출간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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