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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뮤지컬 《순신》, 영화 《한산》 《명량》 《노량》의 감동을 『난중일기』와 함께
이순신 지음, 장윤철 옮김 / 스타북스 / 2022년 7월
평점 :
어렸을 때부터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는 교과서, 책, 선생님으로부터 재미있게 듣고, 읽고, 봤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우리 5,000년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다. 그의 우국충정은 후손 대대로 이어받을 민족의 영웅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한 적 없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지만 나라를 지키고 겨레를 사량하는 데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나서는 롤 모델이기도 하다. 애국심을 따로 주입시킬 필요가 없이 그에 대한 이야기는 늘 존경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자연스럽게 애국심이 일어날 정도지 않은가. 그는 전쟁에서 완벽한 전술과 휘하 군에 대한 엄격한 통제로 군의 사기를 높일 줄 아는 장군이었다.
그가 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에 남모르게 마음을 쓴 것도 열악한 군 장비와 당시 수군의 패배의식을 씻어낼 수 있었던 원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우면 이긴다'는 수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인 전술전략의 귀재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빈틈없는 전략은 책보다는 영화로서 잘 나타나기도 했다. 영화 〈명량〉에서도 표현했다시피 수 군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꿨다. 헤아릴 수 없이 새까맣게 몰려드는 적선을 향해 한 치의 물러섬이 없이 맞싸워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전략과 수군의 사기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2척의 배로 적선의 3분의 1 가량인 330여척을 침몰 파손시키는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의 전과로 전세를 완전히 뒤집고 왜군이 물러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죽음을 각오한 솔선수범의 전투 정신이 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것이다. 군사는 장군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 스스로도 놀랄 사기가 오르는 것이라는 것을 충무공은 알고 있었다.
이 책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임진왜란이 발발하는 조선 선조 25년(1592년) 음력 1월 1일(양력 2월 13일)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이틀 전인 선조 31년(1598년) 음력 9월 17일(양력 10월 16일)까지의 2,539일간의 군중에서의 생활과 전란의 정세에 대한 내용을 적은 일기이다. 무려 7년을 끌던 전쟁터에서 일기를 적는다는 것은 세계 어디에도 없었던 일이라고 한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라고 다소 팔이 안으로 굽는 해석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충무공의 '난중일기'는 분명 임진왜란이 끝난 후 자료로서 귀중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었던 탓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막연한 생각이지만 그의 사적인 감정과 혼합돼 나오는 날씨와 전투 상황은 변화하는 자연 환경과 조류 등에 어떤 전략이 승리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리기에는 더 없이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전투가 여유가 있어 소일로 적은 일기가 아니고 해전에서 필수적인 매일의 날씨와 임전태세, 실제 전투 결과, 사용한 전략 등을 일기에 남긴 것이 이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임진년 6월」 일기에서 이런 말이 남아 있다.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바로 당진 선창(唐津船倉, 통영군 산양면)에 이르니 왜적의 배 20여 척이 나열하여 정박하고 있었다. 둘러싸고 싸웠는데 큰 배 한 척은 크기가 우리나라 판옥선만 하고, 배 위에 꾸민 누각은 높이가 두 길은 됨직했다. 누각 위에는 왜장(倭將)이 우뚝 버티고 앉아서 끄떡도 하지 않았다. 화살과 크고 작은 승자총통(勝字銃筒)을 비 오듯이 어지럽게 마구 쏘아 댔다.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지자 여러 왜적들은 일시에 놀라 흩어졌다. 여러 장병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사격해 대니 화살을 맞아 쓰러지는 자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남김없이 다 섬멸해 버렸다. 이윽고 왜적의 큰 배 20여 척이 부산으로부터 바다에 대열을 지어 들어오다가 우리 군사들 바라보고는 도망쳐서 개도(介島, 통영군 산양면 추도楸島)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임전태세와 전쟁 준비도 엄격함을 알 수 있다. 「임진년 2월」 일기를 인용해본다. 24일, 가랑비가 온 산에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비를 무릅쓰고 출발하여 마복산 및 사량에 이르러 배를 타고 급히 노를 저어 사도에 이르니 흥양현감이 이미 와 있었다. 전투선을 점고했더니 날이 저물므로 거기서 잤다. 다음날 25일 흐림. 여러 가지 전투 장비에 탈난 곳이 많이 있어서 군관과 아전들에게 벌을 주고 사도 첨사(김완)를 잡아들이고, 교수(수령의 하위벼슬)를 내어 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중에서 최하였지만 순찰사가 표창하는 장계를 올려 죄를 단속하지 못했으니 가소롭다. 역풍이 크게 불어 배가 떠날 수 없어 거기서 잤다. 수군의 전투 준비 태세가 엉망이란 점을 적시하고 있다.
임진년 2월이면 아직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이니 아마 다른 군현에서는 대부분 적당히, 대강 하는 시늉만 냈던 모양이다. 충무공의 눈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순찰사는 표창하는 장계를 올렸다 하니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표창을 하다니 가소롭다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충무공이 일기에 더 이상 적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다시 단속했을 터다. 이런 점을 일기에 남긴 이유이다. 제대로 시정돼야 유사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의 전투 준비는 아무리 전쟁 때가 아니라고 하지만 너무 소홀함을 지적하고 일기에 남긴 것이다. 반드시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냥 지나가면 훗날 전투에 임했을 때 결과가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기에 남겼을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순신은 어쩌면 임진왜란을 예상하고 있었을까? 일기로 봐서는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래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일기를 보면 잘 드러난다. 임진왜란은 4월에 발발했다. 4월 14일까지는 적의 침입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이 평상시 공무에 집중한 것 같다. 드디어 15일 임진왜란 발발일이다. 15일 맑음. 나라의 제삿날(성종비 공해왕후 한씨의 제삿날)이르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도의 문서를 작성하여 즉시 역졸을 시켜 달려 보냈다. 해질 무렵에 경상우수사(원균)가 전하는 전령에 왜선 19여척이 나와서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한 것이라고 했고, 같은 시각에 또 경상좌수사(박홍)의 공문이 왔는데 왜선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이르렀다고 했으므로 즉각 장계를 올리고 아울러 순찰사·병사·우수사(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도 공문을 보냈다. 경상 감사의 공문도 왔는데 같은 내용이었다.
16일 밤 10시경에 경상우수사가 공문을 보내왔는데, 부산진이 이미 함락되었다고 했다. 분하고 비통함을 이길 수 없었다. 즉시 장계를 올리고 또 3도(전라도의 순찰사·병사·우수사를 통칭하는 말)에도 공문을 보냈다. 17일 흐리고 비가 오다가 늦게 개었다. 경상우병사(김성일)가 공문을 보냈는데, 왜적이 부산을 함락시키고 계속 머무르면서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할쏘기 5순을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당번을 드는 수군과 세 교대로 당번을 드는 수군이 연달아 방비처에 이르렀다. 18일 아침에 흐림. 이른 아침에 동헌에 나가 공무를 보았다. 순찰사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이 이미 파직되어 갔으니 임시 장수를 정하여 보내라고 했으므로 나태용을 즉일로 정하여 보냈다. 오후 2시경에 경상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동래도 역시 함락되었고, 양산·울산 두 군수(조영규와 이언함)도 조방장으로 입성하였다가 모두 패배한 것이라 했다. 그 분하고 원통함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경상좌병사(이각)와 경상좌수사(박홍)가 군사를 통솔하고 동래 뒤쪽까지 이르렀다가 즉시 퇴군했다 하니 더욱 원통했다. 저녁에 순천의 군사 거느린 병방 아전이 석보창에 머물러 있으면서 군사들을 거느리고 오지 않으므로 잡아 가두었다.
부산 인근에서 왜군에 연전연패하는 장계만 받을 뿐 조정의 명령 없이 군사를 직접 움직일 권한이 없는 충무공으로서는 애가 타고 원통했을 것이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공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충무공의 군인 정신이 엿보인다. 드디어 달이 바뀌고 5월 1일 수군들이 모두 앞바다에 모였다. 이날은 흐리고 비는 오지 않고 남중이 크게 불었다. 진해루에서 방담 첨사·흥양현감·녹도만호를 불러들였다. 모두 격분하여 자기 몸을 잊어버리니 의사(義士)들이라 하겠다. 2일 맑음. 삼도순변사(이일)의 공문과 경상우수사의 공문이 왓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남해 현령·미조항 첨사와 상주포 권관·곡포 권관·평산포 만호 등이 한 번 왜적의 소식을 듣고는 이미 도망쳐 버렸고, 군기 등의 물건도 다 흩어져서 남은 것은 없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웠다. 낮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내려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다 기꺼이 나갈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낙안 군수(신호)는 피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한탄이 나왔다. 그러나, 군법이 있는데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그대로 될 것인가. 저녁에 방답의 연락선 3척이 앞바다로 돌아와 정박했다. 비녀사의 전령 3통이 내려왔다. 창평 현령이 도임했다는 공식 서한을 바쳤다. 저녁에 군호를 용호라 하고 복병은 산수라 했다. 요즘말로 보초들의 암구호를 정하고 야간 불침번을 서는 것이다.
준비와 전투 태세 점검을 거듭하던 충무공에게 준비 명령이 떨어진 것은 5월 3일인 것 같다. 그러나 전투 명령은 아니었다. 충무공은 가랑비 내리는 아침 내내 대기하다 녹도 만호가 보자고 청하므로 앞에 불어들여 물어 보았더니 우수사는 오지 않고 적은 점점 서울로 가까이 다가가니 통분함을 이길 수 없거니와 만약 기회를 잃으면 후회막급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곧장 중위장(이순신)을 불러 내일 새벽에 출발할 것을 약속하고는 즉시 장계를 써서 내보냈다. 이날 여도의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도망간 것을 잡아 와서 목을 베어 효시했다.
왜군의 침략에 일사분란하게 대응해도 어려운 지경이었을 텐데 부산 지역과 진주 등이 뚫리면서 왜군은 곧장 서울로 치고 들어가는 모양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시피 충주에서 신립 장군의 패배로 말 그대로 일사천리로 서울이 함락되는 것이다. 이렇게 준비만 하던 이순신은 5월 29일에야 우수사(잔라우수사 이학기)가 오지 않아 홀로 여러 장수들을 인솔하고 새벽에 출발하여 바로 노량(남해군 설천면)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와 있었다. 함께 상의하다 왜적이 있는 곳을 물으니 적의 무리는 지금 사천 선창에 있다고 하므로 바로 그 장소로 가 보니 왜인들이 벌써 상륙하여 산 위에는 진을 치고 산 밑에는 배룰 쭉 나열해 놓았는데 항전 태세가 아주 굳건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촉하여 일시에 돌격하니 화살이 비 오듯 하고, 각종 총통을 사나운 우레같이 어지럽게 쏘아 대니 적의 무리는 두려워서 물러나다가 화살에 맞는 자들이 몇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으로 뚫고 나갔으나 중상에는 이르지 않았다. 활 쏘는 격군으로 탄환을 맞은 사람도 많았다. 13척의 적선을 불태우고 물러나 주둔했다.
전투는 계속 이어지지만 충무공은 임진왜란 발발 한달 반이 지나도록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이순신이 훌륭한 제독이라는 사실을 왜군이 몰랐을 테니 이순신을 남기고 서울로 직접 올라간 것이 아니라 목표가 당초 서울 함락이었을 테니 뒤에 투입되는 왜군들에게 맡기고 서둘러 올라가지 않았나 싶다. 조정도 경황이 없었겠지만 연전연패의 전투 장계에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음이 드러나는 단초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직접 이순신에게 전투 참여 지취권을 주지는 않았으니 명령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을 테니 얼마나 가슴 아프고 원통했을까 싶다.
『난중일기』는 이처럼 7년간의 전쟁 동안 출정한 날, 이순신 본인이 항명죄로 한양으로 압송되어 있던 시기에는 일기를 쓰지 못한 경우가 있었으나, 날짜마다 간지 및 날씨를 빠뜨리지 않고 틈나는 대로 적었다. 내용은 시취(時趣)에 넘치는 일상생활, 동료·친척과의 왕래 교섭, 사가(私家)의 일, 수군(水軍)의 통제에 관한 비책(秘策), 충성과 강개의 기사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식구와 관련된 내용은 물론, 상관과 장수 및 부하들 간의 갈등문제를 비롯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임진왜란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료이다. 충무공은 동시에 우리 민족에게는 한없는 자긍심과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해군 제독이다.
저자 : 이순신 (李舜臣, 본관 : 덕수(德水), 자 : 여해(汝諧), 시호 : 충무(忠武))
이순신(1545-1598)은 1643년(인조21년) 3월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진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그의 본관이 덕수德水이며 서울 건천동(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 넉넉하지 못한 양반가에서 태어나 22세 때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576년 32세에 무과 시험에 합격하여,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충청병사 군관, 발포 수군만호, 함경도 건원보 권관 등 주로 함경도 등지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1589년 한때 정읍 현감이 되어 지방관 생활을 했으며 임진왜란 직전에 당시 재상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어 48세때 임진왜란에서의 활약으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중요한 해전을 치루며 왜선 320척을 격파했다. 49세 때 그는 한산도로 진을 옮겨 삼도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53세 때 원균 일파의 모함과 상소로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출옥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자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남은 12척의 배와 120명의 군사로 130여척의 왜선과 맞서 싸웠고(명량대첩), 54세 때 명의 수군과 연합해 왜선 500여척과 싸우다 노량해전에서 11월 19일 새벽에 전사하였다. 6년 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됨에 이어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5년 뒤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충무(忠武)'란 시호가 내려져 역사에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영원히 기억되게 되었다.
역자 : 장윤철
부산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북경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문학을 전공하였다. 저서를 기반으로 중국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을 중국에 소개하는 한·중 문화 교류가 꿈이며 또한 전쟁과 혼돈의 중심을 산 지도자 조조의 삶과 재능에 관심을 갖고 그를 연구하여 복잡한 현대를 사는 삶의 지혜를 얻고자 했다. 전작으로 왕경국 박사와 편저한 『유식의 즐거움』, 『조조 같은 놈』, 『조조 같은 놈 매뉴얼』, 『내 안에 적을 깨워라』가 있으며, 역서로 『징비록』, 편역서로 『삼국지의 영웅 조조』,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 『조조의 용병술』이 있다. 편저로는 『단순하고 재미있는 심리학의 재발견』, 『조조의 진면목』 외 다수가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