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별클럽연대기 -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
고원정 지음 / 파람북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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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저의 오랜 침묵을 궁금해하지만, 무슨 엄청나고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작가로서의 일상이 조금씩 조금씩 흔들렸고, 우물쭈물하다 보니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한창나이인 1990년대를 너무 분주하게 살았던 게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지요. 신문·잡지 연재소설을 2~3편씩 동시에 쓰기도 했고, TV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이런저런 잡문들, 많은 이들과의 크고 작은 만남, 거의 매일 이어지던 술자리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내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결국 터무니없는 치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오롯이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고이지 않는 샘물을 퍼내기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좋은 작품을 쓰겠습니까?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보니 숙성된 글을 쓸 수 없었고, 기계적으로 마담을 맞추기에 급급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약속조차 잘 지키지 못했고, 끝내는 미숙하고 졸렬한 속성의 문장마저도 펜 끝에서 잘 나오지 않게 되었지요. 출판관계자나 독자들에게나 부끄러운 기억이 많습니다.”

『빙벽』, 『최후의 계엄령』 등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겪어오면서 군부 독재에 항거하는 생각은 앞섰지만 차마 앞장 서 저항운동을 이끌지 못한 다수의 직관자들을 대신하는 글로써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작가 고원정의 신작 『샛별클럽연대기』을 발간하면서 말한 자기 성찰의 변(辯)이다.

 


 

저자 고원정은 자신의 오랜 공백에 대한 반성으로 들고온 저작도 만만찮다. 한 권의 장편소설과 한 권의 시집. 특히 소설 『샛별클럽 연대기』는 15년 만에 발표하는 장편소설이지만, 한 작가로서 순수한 열정과 포부를 담은 작품으로는 『한국인』 이후 22년 만이라고 한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거인의 잠」으로 당선, 문단에 나온 이후 그는 정치와 역사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왔다. 특히 80년대 금기의 영역인 군 의문사를 추적하는 대하소설 『빙벽』이 대형 베스트셀러로 떠오르면서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올라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을 풍미했다. 이 작품의 인기에 힘입어 역사 다큐멘터리 등을 진행하는 방송인으로서도 크게 활약했던 그였다. 이 소설 『샛별클럽 연대기』는 그 모든 기억을 반납하고 오랜 문학적 탐색 끝에 내놓은 회심의 복귀작이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시절에 성장기를 보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장치들을 소설 전반에 배치하고 있다. 군가를 동요처럼 부르고 자라던 아이들의 동심이 오염되어 가는 과정 자체가 한국 사회의 불우한 성장기이다.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아이들은 이른 나이에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되거나, 편승하거나 저항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독자 역시 70년대 말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이 때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편이다. 소설의 한 부분, 한 부분이 "어? 이거 내 얘기인데..." 할 정도로 그때의 상황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데 따른 남다른 능력은 저자가 그 시절을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리다.

 


 

소설은 그동안 그가 천착해온 권력의 횡포와 구성원의 운명이라는 강렬한 주제의식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소설에도 ‘유신’부터 ‘촛불’에 이르는 정치적 사건들이 배경에 깔리지만, 그 사건들 속을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의 시작은 1963년부터이다. 수많은 대통령이 바뀌고,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냈다. 역시 한국 현대사의 아킬레스건이 되는 대통령 탄핵 직후까지 지구상의 가장 다이나믹하지만 모두가 놀랄 만한 변화를 이뤄낸 한민족의 의식 저변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있음을 이 소설은 보여준다. 박정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한국 현대사 60년의 격변을 한 권의 소설에 담아내기에는 벅차지만 소설은 사건을 개인에 한정하는 축소되고 왜곡된 의식을 좇아감으로써 시대의 아픔과 굴곡진 역사의 희생이 된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당시 사건은 개별적이지만 상처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라 저자의 이같은 시도는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모두 희생양일지도 모를 시대 속에서 너무 일찍 조숙해져버린 아이들의 슬픔이 먹먹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이 때문에 등장인물의 행적에 한국 현대사의 얼룩이 그대로 묻어나며, 그 가운데 누구는 꼭 내 주변의 아무개를 떠올리게 할 만큼 예리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진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50년을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에 품었던 한 남자의 순정에 관한 이야기다. 정치소설도 성장소설도 연애소설도 아니지만, 시대의 비애와 인간에 대한 연민, 순정한 사랑에 대해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조용한 우리들의 인생 1963-2019」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야기는 1963년 지방 소읍의 한 초등학교(국민학교) 교실에서 시작한다. 학예회를 통해 ‘샛별클럽’의 일원이 되었던 초등학교 2학년 열 명의 친구들. 동화처럼 순수했던 아이들의 유년은 예기치 않았던 사건으로 인해 불미스럽게 흘러간다. 한 동네에서 벌어졌던 친일과 월북, 반공과 저항의 사건들의 영향권에서 아이들은 제각기 어떤 운명을 예감하게 된다.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로 남을 수는 없게 된다.

저자는 반공을 국시(國是)로 삼았던 시절에 성장기를 보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장치들을 소설 전반에 배치하고 있다. 군가를 동요처럼 부르고 자라던 아이들의 동심이 오염되어 가는 과정 자체가 한국 사회의 불우한 성장기이다. 저자도, 독자도 그 시대 한가운데를 걸어왔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새벽 기차역에 엄마 손 잡고 나가 파월장병(베트남 파병군) 환송식에서 불렀던 노래의 멜로디와 가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이른 나이에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되거나, 편승하거나 저항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소설은 그동안 그가 천착해온 권력의 횡포와 구성원의 운명이라는 강렬한 주제의식에서 등장인물의 내면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 소설에도 ‘유신’부터 ‘촛불’에 이르는 정치적 사건들이 배경에 깔리지만, 그 사건들 속을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건은 개별적이나 상처는 보편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 어쩌면 모두 희생양일지도 모를 시대 속에서 너무 일찍 조숙해져버린 아이들의 슬픔이 독자에게는 남의 일 같지 않다. 사실 아닐 수밖에 없다. 베트남 파병군 환송식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세뇌식으로 받아온 '반공 교육'도 새삼 머릿속에 맴돈다. 당시를 살았던 누구라도 개인적으로 좁혀보면 누구나 같은 감정일 것이다. 다만 어릴 때는 자신이 판단한 것이 아니라 주입식 교육에 의해 가치관이 형성됐으니까. 이로 인해 소설 속 등장인물은 당시의 우리들이며, 그들의 행적에 한국 현대사의 얼룩이 그대로 묻어난다.

 

각각 이름이 송희, 창순이, 양숙이라는 ‘아가씨’들도 있었다. 학교 앞인 이 회기동에 방을 얻어놓고 청량리 술집에 나가는 호스티스들이었다. 그중 제일 반반한 얼굴인 양숙이가 성재호를 숨겨주고 있었다. 방 두 칸짜리인 바깥채를 혼자 쓰고 있어서, 한 칸을 선뜻 내주었다고 했다. 대룡이 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요섭이와 박충규가 조심스럽게 나누는 얘기도 들었다. “형, 정말 괜찮은 걸까? 성재호하고 양숙이?”(p.222)

 


 

당시 저자의 대학 후배로서, 동시대를 살아온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 박덕규의 평설도 저자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십 년이니 이십 년이니 과거를 돌아볼 게 아니라, 이 자리에선 우리 다 앞일만 얘기하기로 하자.” 이 소설의 한 작중인물처럼 이렇게 말하는 ‘이 자리’의 사람이 참으로 많다. 앞일만 해도 치러야 할 게 많을 뿐 아니라, 그래야 재화도 쌓고 안정도 얻는 그날이 곧 올 것 같으니까. 나도, 어디서나 대강 그렇게 말하고 생각하며 살아온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나는 날이 갈수록 깨닫고 있다.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더니 그때 얻은 상처가 점점 커져 왔다는 걸. 그때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나’를 만나지 못할 거라는 걸. 국가안보, 경제개발의 미명으로, 또는 그 피해 전력의 명분화(名分化)로 ‘자기 이익’만 챙겨온 ‘잘난 인간’들과 그들로부터 파괴당한 ‘조용한 인생’들 사이에 ‘나와 우리’가 있지 않았나! 이 소설은 곧, 그 파괴함과 파괴됨의 세월을 돌아보는 소설이자, 그 돌아봄으로 ‘진정한 나’를 회복하려는 한 인물의 ‘지고한 순정의 스토리’다. 근대화와 민주화 시대를 잇는 거대한 풍속도로 1980년대 후반 큰 화제를 모은 『빙벽』을 연상시키는 소설이자, 그로부터 더 나아간 21세기의 시선에서 20세기 후반을 아프게 성찰하는 내성(內省)의 소설이다."

 


 

이게 장송곡이던가? 느리고 어둡고 장중한 음악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간간이 울음을 참는 듯한 아나운서의 목소리. “박정희 대통령은 가셨습니다….” 이어서 박정희의 이력이 소개된다. 끝나면 음악의 볼륨이 높아지고…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 하숙집 세면장 옆방의 한의대생이 한껏 크게 라디오를 틀어놓았고, 아홉 개의 방문이 모두 열려있었다. 날은 이미 밝아있었지만 어쩐지 한밤중인 것만 같았다.(p.273)

 

살아오면서 나는 두 사람을 죽였다. 문인오를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다. 한요섭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나는 살아있었다. 이토록 편안하고 달콤하기까지 한 죄책감속에서…. 뻔뻔스럽게 울지는 말자고 머리를 흔들며 발아래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예전 섶다리가 있던 자리에 놓인 남강2교 자전거길을 검은 옷의 여자가 건너가고 있었다. 유인실이었다. 나처럼 일행과 떨어져 남은 모양이었다. 바람에 떠밀리듯 휘청휘청 걷다가 멈춰 섰다. 쪼그려 앉았다. 멀어서 알 수 없지만 흐느껴 우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항상 한 발 뒤늦게 운다. 일 년만, 한 달만, 며칠만 더 일찍 요섭이를 위해 울어주었다면…. 그래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저 한 사람은, 요섭이를 찾아오겠구나…. 나는 그럴 수 없다.(p.350)

 

저자 : 고원정

 

제주 출생으로 제주제일고와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중앙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고 주요 저서로는 창작집 『거인의 잠』, 『비둘기는 집으로 돌아온다』, 장편소설 『최후의 계엄령』, 대하소설 『빙벽』 등이 있다. 신작으로 시집 『조용한 나의 인생』과 장편소설 『샛별클럽연대기』를 함께 내놓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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