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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도시 속 인형들 1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19
이경희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5월
평점 :
2080년 대한민국 평택. 『모래도시 속 인형들』은 메가시티 평택, 일명 '샌드박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이버펑크' 범죄수사물이다. 온갖 기술 개발과 실험이 이루어지며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과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가운데 평택지검 첨단범죄수사부 검사 진강우와 '민간조사사' 주혜리가 나선다. 속도감 있게 휘몰아치는 전개,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결말, 다 읽고 나면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게 와닿는 묵직한 주제의식까지, 이경희 작가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저자는 앞서 『테세우스의 배』를 통해 선보인 미래의 도시에서 윤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끔찍한 기술들을 가둬 둔 실험용 모래상자로 평택을 택한다.
미친 과학자들의 안전한 놀이터이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첨단기술이 자유롭게 거래되는 낙원이자 지옥인 도시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정도 후의 미래. 주한미군 절반이 빠져나간 캠프 험프리스에 ‘기술규제 면제특구’가 설정된 뒤 평택은 법과 윤리의 제약 없이 모든 기술 개발과 실험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도시가 된다. 일명 ‘샌드박스’로 재탄생한다. 그 덕분에 기업들이 앞다투어 투자에 나서면서 평택은 대한민국 부의 절반을 빨아들인 끝에 급기야 서울을 압도하는 메가시티로 성장한다. 게다가 혁신행정특례법이 제정된 후 중앙의 간섭을 아예 받지 않는 자치정부까지 들어서며 평택은 무소불위의 세상으로 굳게 자리 잡는다.
계획적으로 지어진 초고층 초거대 건축물 메가빌딩을 중심으로 각종 생활과 교통이 빈틈없이 효율적으로 통제되는 최첨단 도시처럼 보이지만, 그 하부의 버려진 옛 건물들에서는, 온갖 불법 거래와 음모들이 존재한다. 중앙정부 산하 평택지검 첨단범죄수사부 검사 진강우는 평택 자치정부 자치경찰의 견제뿐 아니라 거대 기업의 사주를 받은 동료 검사의 방해까지 받으면서도 샌드박스에서 벌어지는 다종다양한 범죄를 뒤쫓는다. 국가 공인 탐정인 민간조사사 주혜리는 진강우의 손과 발이 되어 외주 수사관으로 맹활약한다. 이 소설은 각각의 작품들이 조금씩 연관이 있어 연결되는 듯하면서도 독립된 각각의 중·단편 소설 6편으로 이루어진다. 기존의 영미권이나 일본 등에서 선보인 사이버펑크* 작품들과 달리, 미래의 최첨단 메가시티 평택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범죄의 양상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 사이버펑크 : 어떤 영상 콘텐츠를 보고 나서 주변 이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면 보통 이런 질문들이 돌아옵니다. "그건 어떤 장르야?" 『모래도시 속 인형들』은 대세 장르 SF입니다만 조금 더 세부적으로 '사이버펑크' 장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낯설지만 익숙한 사이버펑크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온라인에서 매우 손쉽게 찾을 수 있으나, SF에 관한 한 친절하고도 명확한 안내서인 『SF, 이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니』에서 이경희 작가님께서 직접 정리해 놓으신 내용에서 발췌해 보고자 합니다. 사이버펑크는 가까운 미래의 암울한 첨단 기술이 잔뜩 등장하는 '어떤 것'이다. (······) <하략>)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100명의 유전자를 절묘하게 조합해 만들어 낸 존재 ‘카이 크레디트’를 100명 복제하여 출연시킨 서바이벌 프로그램 〈페어런트 101〉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카이가 카이를 죽이는 살인사건이 벌어진다.(〈χ Cred/t〉) 10만 명이 넘는 저소득층 노인이 모여 사는 공공임대 메가빌딩 ‘휴먼 셰어하우스 메가빌리지’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원인으로 보이는 연쇄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저 디지털 세계의 좀비들〉) 글로벌 해커 그룹 ‘파멸로부터의 9호 계획’이 코르도바 메가빌딩을 장악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버그를 설치하고, 수직과 수평으로 움직이는 엘리베이터가 몽땅 폭주하는 가운데 진강우와 주혜리는 어떤 엘리베이터를 살려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파멸로부터의 9호 계획〉) 홀로마스크를 쓰고 범죄자들을 처단하는 슈퍼히어로 스위치가 갑자기 나타나고, 그 활약상을 찍은 촬영물들을 유통하는 기업형 스타트업 채널이 개설되어 발 빠르게 수익을 챙긴다.
슈퍼히어로의 정체에 의문을 품은 진강우와 주혜리는 그 내막을 파헤치기로 결심한다.(〈슈퍼히어로 프로듀서〉) 하나의 인격으로 두 개의 신체를 가질 수 있는 ‘트윈플렉스’ 시술을 통해 태어난 휴머노이드 원현정이 지속적으로 폭언과 학대를 당해 왔다며 원래의 신체인 원현수를 고발하는 사건이 벌어진다.(〈트윈플렉스〉) 이렇듯 재벌, 아이돌, 부동산, 가난한 노인, 음모론, 교육, 인권 문제 등 동시대적 사회적 이슈를 폭넓게 건드린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여섯 개의 중·단편 소설이 각기 다른 사건이지만 한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고, 이를 다루는 수사도 한 기관에서 맡는다는 점에서 연작소설의 성격을 띤다.
메가시티 평택, 샌드박스라는 배경은 이경희 작가의 다른 소설에서 이미 등장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앞서 잠시 언급한 2020 SF 어워드 장편소설 부문 대상을 받은 『테세우스의 배』가 바로 샌드박스를 무대로 펼쳐진 이야기였다. 또한 이 책의 첫 번째 작품으로 수록된 〈χ Cred/t〉는 2019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 당선작으로 안전가옥 앤솔로지 『대스타』를 통해 공개되었던 단편소설이다라고 출판사 측은 밝힌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었던 진강우와 주혜리가 소설 『모래도시 속 인형들』을 든든하게 끌고 나간다. 저자는 『테세우스의 배』, 『그날, 그곳에서』 등을 통해 장르적 재미와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야기꾼으로 이미 평가받은 작가다. 무엇보다 콘텐츠 업계에서 가장 주목하는 소설가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이 소설은 그가 만들어 낸 ‘2080년의 메가시티 평택’이라는 탄탄한 세계관과 설정을 중심으로 펼쳐질 ‘샌드박스 시리즈’의 첫 번째 이야기다. 속도감 있게 휘몰아치는 전개, 도저히 예상할 수 없는 결말, 다 읽고 나면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게 느껴지는 묵직한 메시지까지, 이경희 작가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다.
“음습하고 어두운 거리, 전자 기기와 자본에 지배당하는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상, 기계에 잠식당한 인간성”(『SF, 이 좋은 걸 이제야 알았다니』에서 인용) 등이 이야기의 주조를 이룬다는 면에서 『모래도시 속 인형들』, 나아가 샌드박스 시리즈는 SF 중에서도 사이버펑크 장르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사이버펑크의 문법을 따르고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저자가 독자적으로 구축한 한국적인 배경과 상황을 중심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녹여 냈다는 점에서 더욱 이채롭고 특별하다.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분명히 아직 오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미래에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마치 오늘 아침 뉴스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가상의 세계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현실감. 그러나 그 암울한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실없는 농담을 던지고 일단 부딪치고 보는 진강우와 주혜리에게서 묘한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이 작품의 또 다른 매력이다. “국가가 어찌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버린 샌드박스, “지금 여기서 멈추지 못한다면” “힘을 갖지 못한 모든 이들이 열등종으로 취급받게 될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다. 비대하게 커진 자치도시이자 메가시티 평택의 앞날(2080년 기준)은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어 디스토피아를 짐작케 한다.
스펙터클한 대서사로 이어질 샌드박스 시리즈의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그런 미래를 기어코 바꿔 놓을 수 있을까. SF 소설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 못한 독자로서는 소설의 생소한 용어들을 외우느라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데도 손에서 책을 쉽게 놓지 못했다. 미래도시의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이고 암울한 상황을 예고하는 듯한 2080년 평택에 대한 미련 때문일 것이다. 미군이 주둔했다 철수한 도시, 대중국 전진기지가 될지 모를 이 도시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크다. 평택을 어떤 도시로 그리고 싶은지 알 길 없는 독자로서는 디스토피아로 전개될 걱정이 앞서지만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야기를 계속 쫓아갈 심산이다. 흥미롭고 기상천외한 현상이 신비롭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SF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현실감 있는 소설의 전개에 푹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소설 뒷 부분에 쓴 「작가의 말」을 참고하면 새 독자들의 많은 이해와 이 책 탐독을 서두를 것이라고 독자는 믿는다. 가까운 미래의 우리의 삶의 변화와 미래는 결국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저자의 말을 대신 하고 싶다. 저자의 이런 뜻은 이 소설이 단순히 흥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현실 감각을 더함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제시도 곁들여 있다고 독자는 기대한다.
"인기 아이돌 Roo_D.A는 상위 0.1퍼센트에 속하는 조금 얄미운 부유층이지만, 동시에 어떤 종류의 끔찍한 폭력 앞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약자다. 우리의 주인공 주혜리는 Roo_D.A를 보호할 수 있는 강한 존재인 동시에 영웅적 희생을 헐값에 빼앗기는 약자이기도 하다. 선과 악이 뚜렷하리라는 믿음과 달리, 우리 모두는 언제나 누군가의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슬프지만 세상은 복잡하다."(p.326)
저자 : 이경희
SF 소설가. 죽음과 외로움, 서열과 권력에 대해 주로 이야기한다. 환상문학웹진 [거울] 필진.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가 황금가지 제4회 타임리프 공모전에 당선되어 데뷔하였고,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으로 황금가지 제6회 작가프로젝트 공모전, 「χ Cred/t」로 안전가옥 스토리 공모전을 수상했다. SF와 판타지 양쪽에서 활동 중이며, 대표작으로는 『테세우스의 배』, 「다층구조로 감싸인 입체적 거래의 위험성에 대하여」, 「마음 여린 땅꾼과 산에 깔린 이무기 설화」, 논픽션 『SF,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등이 있다. 첫 번째 장편소설 『테세우스의 배』가 2020 SF 어워드 장편 부문 대상에 선정되었다. 동양 판타지와 시간여행이 뒤섞인 단편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 설화」가 2019년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 당선되었고, 단편소설 「살아있는 조상님들의 밤」은 온라인 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2019 올해의 SF’에 선정되었다. 그는 SF와 판타지의 팬보이로 10대를 보내며 오랜 세월을 방황한 끝에 작가를 꿈꾸게 되었고, 1980~1990년대 걸작 애니메이션과 만화들, 〈스타트렉〉 에피소드들, 톨킨과 이영도, 르 귄과 젤라즈니, 알프레드 베스터와 코드웨이너 스미스, 듀나, 배명훈, 곽재식, 김보영, 이서영 등 위대한 장르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자신만의 샛길을 발견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한·중·일 아시아 설화 SF 프로젝트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앤솔러지 『맥아더 보살님의 특별한 하루』에 참여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