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괜찮은 파랑 - 여전히 깊고 푸른 우리들을 위하여
진초록 지음 / 뜻밖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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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였다. 아마 대부분 그런 질문을 받으면서 각자 자신의 꿈을 키웠을 게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어렸을 적 꿈은 그림책에서 봤던 비행기 조종사(파일럿)이었다. 비록 나중에 바뀌었지만···. 그리고 많이 받은 질문은 "넌 무슨 색을 좋아해?"였다. 독자는 늘 '노랑'이었다. 병아리색이라고도 했다. 병아리를 사다가 기른 적도 있다. 며칠 살지 못하고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병아리를 키우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색은 여전히 노란색이었다.

이 책 『그대로 괜찮은 파랑』의 저자 진초록은 필명처럼 파란색을 좋아하나 보다. 사실 파란색과 푸른색은 조금 다르다. 파란색은 바다나 하늘색을 말하는 것이고, 푸른색은 나무잎처럼 푸르름, 녹색을 이른다. 녹색은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덧칠해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가끔은 혼동해서 쓰기도 한다. 외국에서도 그런지, 독자는 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모르겠지만 배운 영어나 외국어로는 다른 단어이다. 저자는 연한 담청 혹은 얼어붙은 겨울 강의 얼음 빛깔을 닮은 하늘 색깔을 가장 좋아한다고 밝힌다. 이유는 문학적 은유이겠지만 셀렘과 기다림의 시작처럼 느껴져서이란다.

 


 

저자는 이 책에서 보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색, 한 가지 색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연한 담청의 하늘은 오래 바라볼 수 있고, 오래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한다. 또 지인이 선물로 준 보라색 장미꽃차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본다. 파리에서 온 그 꽃차의 원산지는 이란이다. 저자는 시공간을 넘어 낯선 땅의 보라색 장미 정원을 맨발로 걷는 상상 속에서 헤맨다.

소녀 시절,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발레를 포기한 동생은, 우연히 보러 간 발레 공연장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연분홍 토슈즈를 보며 작가는 꿈 하나를 잃어버린 동생을 생각한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지 못했더라도 그것이 오늘의 너를 만들었노라고, 언젠가는 웃으며 그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 먼 도시에 취업이 되어 부모님 곁을 떠나는 날, 엄마는 아끼는 라벤더색 샤워 가운을 선뜻 작가에게 내준다. 그 무엇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허기를 감당할 때마다 작가는 엄마의 샤워 가운을 입는다.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따뜻하고 편안한 사람, 그런 사람의 색을 붙들고 작가는 험난한 세상을 살아간다.

 


 

저자도 그렇지만 우리도 살면서 좋아하는 색깔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좋은 인연으로 대체로 그 색을 좋아하게 된다. 그래서 좋아하는 색은 바뀔 수 있을 것이다. 하긴 고유의 색을 가진 세상 모든 것들이 인간이 의미를 부여해서 구별하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고유의 색깔을 가진 모든 것들이 태양의 빛을 받아 자신의 색을 내는 것이니까. 그러나 누구나 유독 싫어하는 색도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게 보통이다. 싫어하는 이유 또한 그 색을 대하는 인간에 의해 창조된다. 대체적으로는 우리의 감정 중 공포, 불안, 위협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의 색이다. 죽음의 메타포 검정, 음울한 콘크리트 도시의 상징 회색 등이 그렇다. 개인적 경험에 의한 것일 테지만 세상 사람의 눈에는 그런 색으로 인지되는 이유가 누군가 그 색에 부정적 감정을 투영시킨 것에 공감을 가졌기 때문일 터다. 그게 다른 곳에서 반복되며 색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투영된다.

 

초록은 여러모로 생의 감각을 닮은 색이다. 구급차의 초록, 비상탈출구의 초록색 안내등, 세상 모든 결실의 시작인 새싹 한 포기부터 인간의 죽어가는 마음을 살리고 우울을 다독이는 드넓고 푸른 초원까지 전부 그렇다. 이 세상에 색을 하나만 남기고 모두 잃어야 한다면, 그런데 내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아마도 선택은 초록이겠다.(p.276)

 


 

저자의 색에 대한 관심은 다양하다.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보았던 짙은 주황빛 노을을 잊지 못한다. 그리움이 짙어 다시 그 언덕에 서는 날, 저자는 "그간 네게 많은 빚을 졌다고, 그래서 다행히 기운차게 살았다"고 말해주려 한다. 또 작가는 고양이를 기른다. 둥글고 하얀 고양이의 발이 마룻바닥에 닿을 때 나는 소리를 특히 좋아한다. 언제부터인가 거실부터 부엌, 부엌부터 현관까지 고양이와 걸으며 작가는 자신이 고양이의 우주에 초대받았다고 깨닫는다. 그 시간은 새벽 기도 같기도 일요일 아침 미사 같기도 하다.

작가에게 장면 속의 색을 읽어내는 일, 언어 속의 색을 읽어내는 일은 너무나 충만하고 아름다워 발을 동동 구르게 되는 행복한 취미다. 작가는 자신의 즐거움만큼이나 독자들의 즐거운 순간을 궁금해한다. 들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들으러 가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함께 나누기에 가장 아름다운 무엇일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생각한다.

 


 

책에 따르면 열 살 무렵 막연하게 죽음이라는 추상의 개념을 인식하게 된 저자는 밤마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울었다. 그러다 어느 날, 늘 제자리에서 자신을 비추어주는 환한 달을 보며 더는 무섭지 않게 되었다. 달빛 아래에서 작가는 달과 신호를 주고받는 기분으로 이젠 괜찮다고, 덜 힘들고 무섭지 않다고 느낀다. 작가는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게 되었을 때 용기를 배웠다. 무서워서 제대로 흐름과 균형을 타지 못한 게 패인이라는 걸 몸으로 느끼는 순간 그것을 돌파할 줄도 알게 되었다.

빛나는 형광색 사물을 보면 바퀴에 형광색 구슬을 줄줄이 매단 어린 날의 자전거가 떠오른다. 그 색처럼 빛나는 무언가가 되어야 할 것 같고 더 씩씩해져야 할 것 같다. 한번은 떨어지지 않는 열을 안고 병원에서 받은 약 봉투를 챙겨 더운 나라로 여행을 갔다. 도망치듯 잔인한 도시를 떠나자 열은 씻은 듯 내렸다. 그곳에서 한밤중에 쪽배를 타고 청량한 금빛을 내뿜는 반딧불이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아주 작은 빛을 보았다. 다시 돌아온 도시에서 일상의 고통은 그대로였지만 작가는 세상 어딘가에서 반딧불이가 반짝이고 고요와 적막이 흐르는, 그런 질서가 있다는 것만으로 숨 쉴 틈을 얻는다.

 


 

이렇듯 색은 저마다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르고, 주위 환경도 다르고, 고유 풍습이나 문화도 다르다. 당연히 좋아하는 색깔도 다양하고 세상의 모든 색깔은 세상의 모든 물건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선다. 어떤 색이 좋고, 어떤 색을 싫어하는 것은 온전히 그 색깔을 보는 사람의 경험이나 인연에 따른다. 독자는 어렸을 적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면서 덧칠을 좋아했다. 색을 혼합해 어떤 색이 나오는지 알기 위해서였지만, 나만의 색깔, 한 번도 보지 못한 색깔이 나오는 게 신기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혼합색이 많이 사용되는 경우 선생님의 칭찬은 없었다. 그림은 꽤 잘 그린다고 칭찬을 받았는데 혼합색을 많이 사용하면 이상하게(?) 칭찬이 거의 없었다. 선생님은 이유를 설명해 주시지 않아 그냥 독자 스스로 잘못 그렸나 하고 다시 그 색을 안 쓰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수십 년이 지나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기억을 문득 "혹시 색깔이 특이해서 선생님이 공감을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꼭 전하고 싶은 말을 쓴다.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 빛을 거두어 가더라도 그 빛이 정말 사라지는 건 아니라, 여전히 모든 것은 푸르고 빛나고 더 짙어진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눈을 들어 사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리라는 것을 믿고 우리 영영 푸른 하늘처럼, 붉은 노을처럼, 한여름의 초목처럼 살아가자고요."(p.298)

 


 

저자 : 진초록

 

로스쿨에 다니며 글을 쓴다. 대학에서는 저널리즘을 공부했다. 잡지를 펴낸 적이 있고 방송국에서 비정규직으로 짧게 일했다. 서울 생활이 답답해 못 견딜 때쯤 훌쩍 바닷가로 이주했다. 고양이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진초록에게 공주가 아니라 여왕이 되기를 꿈꾸라고 가르쳤다. 그런 아버지의 그늘 아래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며 자랐지만 성인이 되어 홀로 세상에 나왔을 때 비로소 알았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라는 굴레가 얼마나 잔인하고 버거운지를. 『우리는 살아남는 중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여성혐오가 얼마나 여전히 생생히 살아 숨 쉬는지, 가부장제가 또 얼마나 완고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기록했다. 함께 험지를 헤쳐 나가는 모든 여성을 위해 썼다.

방송물은 한 모금. 여행자처럼 헤매었고 먼바다와 무등의 도시를 건너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 모든 모험을 함께한 고양이와 살아가고 있다. 어느 날, 내 삶의 팔레트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영영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었다. 내 생을 스치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기억과 추억에 대해서. 그것들에 물든 온갖 색체들에 대해서. 그로부터 얻어진 마음들에 대해서. 『그대로 괜찮은 파랑』은 어느 푸르고 쨍한 밤, 사람은 색에서 위로를 얻고 색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힘을 가졌다는 걸 느꼈던 그 밤 이후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하나씩 되짚어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써나간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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