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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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Maya)란 고대 멕시코 및 과테말라를 중심으로 번성한 인디오 문명 및 이를 이룩한 민족을 이르는 말이다. 두산백과에 따르면 마야문화가 번성한 지방은 3개 지역으로 구분되나, 그 중심을 이룬 것은 과테말라 북부의 페텐지방으로부터, 서쪽은 멕시코의 타바스코, 동쪽은 벨리즈지방에 이르는 중앙지역이다. 여기에 유까딴반도의 북부지방 및 과테말라고지, 차파스지방으로부터 태평양 연안에 이르는 남부지방 등 2개 지역이 포함된다. 언어연대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어족의 조상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작은 부족으로서, 이들이 남진해서 BC 3000년대 중반에 서부 과테말라 고지에 정착한 것이라 한다. 그 후 1000년 사이에 이 부족이 두 어족으로 갈라져 하나는 북서로 진출하여 멕시코만 연안의 아즈텍어족을 형성하였고, 다른 하나는 북쪽으로 나아가 페텐저지에서 유까딴지방에 이르러 유까테크어족이 되었다. 다시 BC 1000년대 전반에 마야 어족의 모체로부터 촐 및 촌탈 등 두 어족이 갈라져 나와서 중앙지방의 저지에 들어가 북부의 유까테크어족과 접촉하였다.

이 책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Relacion de las cosas de Yucatan)』은 '마야문명' 하면 항상 따라붙는 가장 유명한 사료라고 한다.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고 난 직후인 16세기, 가톨릭교회의 신부인 디에고 데 란다(Fray Diego de Landa)는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그리고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부터 주변의 지리, 마야인들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성과 사랑, 인신공양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것을 이 책에 담았다.

 

마야 치첸이트사의 유적 <출처 : 이미지월드>

 

이 책은 유럽 열강이 초기 식민지를 개척하던 시대에 남겨진 마야문명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종합 사료이며 마야인들의 삶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서로, 한마디로 말하면 마야문명 종합 백과사전이다. 굳이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이 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합쳐 놓은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편역자 송영복은 설명한다. 이미 유럽 열강의 침략과 식민지화로 사라진 고대 마야 원주민들의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가치를 찾는 교양의 의미에서, 마야문명에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면 필수적인 사료라는 점에서 이 책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마야인들이 남긴 문자의 발음기호 일부가 수록되었는데, 나머지 마야문자를 해독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p.9)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사료와 기록들이 남아 있다. 반면에 마야를 연구하기 위한 식민지 초기의 종합적인 1차 사료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마야의 문자와 그림판 마드리드사본 <출처 : latimericanstudies.org>

 

우리 나라 일반 독자들은 마야문명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운다. 사라진 외국문명이기에 굳이 자세하게 배울 필요는 없겠지만 우수한 문명에 대한 대접이 조금은 소홀한 느낌을 독자는 갖는다. 물론 이 얘기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다. 예를 들면 고대 로마제국이나 앞선 그리스문명은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지만 교과서의 분량으로 치자면 마야문명은 단 몇 줄에 그친다. 그것은 아마 지금 서구문명이 세계문명을 이끄는 추세에 따라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 고전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 E.톰프슨에 따르면 촐어족이 마야 고전문화를 창조한 것이라 한다.

초기 마야에 관한 고고학적 자료는 극히 드물어 과테말라 태평양연안의 오코스(BC 1500) 및 콰도로스(BC 1000) 문화나 과테말라 고지카미날퓨 유적의 알레파로기(期) 및 라스 차루카스기(BC 5,6세기경)에서도 이들 문화 후에 형성되는 고전 마야적인 특징은 볼 수 없다. 그러나 초기 마야의 기원에는 멕시코의 올멕 및 이자파문화의 영향이 컸다는 학설이 거의 굳어졌다. 가장 오래 된 마야적 문화는 페텐지방 서부의 시에문화와 북부의 마몬문화인데, 마몬문화의 연대는 BC 5세기로 추정되어 카미날퓨의 라스 차루카스기(期)와 비슷하다. 시에문화는 고전 마야유적인 알탈드 사크리피시오스와 세이발의 하층에서, 또한 마몬문화는 와샤크툰과 티칼의 하층에서 볼 수 있다. 이 문화에 이어 카미날퓨의 밀라프로레스기(期)와 중부 저지 마야지대의 차카넬문화에 이르러 마야문화의 기본양식이 확립되었으며, 밀라프로레스기에는 그 뒤에 발달되는 신성문자의 원형이 나타났다.

 

유까딴 반도 <출처 : 세계 문자사전>와 칼라크롤에서 발견된 마야의 도자기(600~800년) <출처 : (CC BY-SA)Sailco>

 

세계의 패권은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과 이후로 달라진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콜롬부스는 이탈리아의 탐험가로서 에스파냐 여왕 이사벨의 후원을 받아 인도를 찾아 항해를 떠나 쿠바, 아이티, 트리니다드 등을 발견했다. 그의 서인도 항로 발견으로 아메리카대륙은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에스파냐가 주축이 된 신대륙 식민지 경영도 시작되었다. 크리스토퍼 콜럼부스라는 이름은 영어식 표기이며 실제 그의 이름이 이렇게 불렸을 가능성은 없다. 이탈리아명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이탈리아 제노바 출생이고 1477년에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의 행적은 명백하지 않다. 상당한 학식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항해에 종사하였다고 전해진다. 1479년 결혼하였는데, 그의 장인이 선장이었기 때문에 해도제작에 종사하였다. 이 무렵에 그는 수학자 P.토스카넬리에게서 지도를 구해 연구한 결과 서쪽으로 항해하여도 인도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대항해 시대의 막을 올리고 식민지 개발에 적극 나선다. 특히 에스파냐는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개척에 나서 남북아메리카 전역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각종 자원을 수탈해 엄청난 부를 쌓아올린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피해는 엄청났으나 서구 열강들이 너도나도 식민지 개발을 위한 해양 탐험 시대에 뛰어든다. 이때 아메리카 대륙의 두 문명 아즈텍(마야)문명과 잉까문명도 멸망한다. 원주민들의 목숨을 예사로 빼앗는 등 막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저항했으나 부를 향한 서구 열강의 집념은 꺾지 못했다. 이 책도 사실은 그들의 문화를 기록으로 남기려는 의미보다는 수탈을 위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풍습, 건축, 문자, 음식, 의복, 환경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지배국 왕에게 보내는 보고서 형식의 글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송영복 편역자는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 앞서 언급한 대로 희소성을 우선 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Mexica, Azteca)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많은 사료와 기록이 남았다는 것. 반면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식민지 초기 종합적인 1차 사료는 여기에 소개한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뿐이라는 사실은 앞서 밝힌 대로다. 또 다른 중요한 의의로는 기록의 정확성과 종합성을 들 수 있다. 디에고 데 란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초의 정복 전쟁이 끝나고 식민지화가 막 시작되던 시기에 마야 사람들과 이들의 정치·경제·사회·문화·자연 등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학술적인 의의는 실로 무한하다. 저자인 란다는 젊은 나이에 유까딴반도로 건너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그들의 생활을 하나하나 세밀하고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다. 물론 기록 내용에 개인적인 감정, 주관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이 상당 부분 포함된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이러한 점이 마야 인디오들에 대한 그의 애증으로 나타나면서 단순한 보고서나 역사적인 기록과는 차이가 있는 문학적인 가치도 더해 준다.

일반 사료의 난해함과 딱딱함에 비해 이 책은 기행문과 감상문의 성격을 두루 가지고 있어서 읽는 이들에게 흥미와 관심을 준다. 건조하게 사실을 차분히 서술하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감성의 높낮이가 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감상문과 기행문, 조사보고서의 형식을 두루 갖추고 있어 이 책은 16세기에 쓰인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작품 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평가한다. 이에 덧붙여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도 16세기 에스빠냐어와 마야어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송영복 편역자는 시간과 달력 부분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오늘날 마야 문자 이해의 실마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성과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말한다. 몇 부분에서는 이곳의 동식물을 서술하였고, 마지막에서는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 땅을 정복한 것이 원주민들에게 더없이 좋고 은혜로운 일임을 강조하며 결론짓는다는 점에서 지배자, 정복자의 논리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저자 란다는 유까딴에서 직접 보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원주민 지도자인 나치 꼬꼼이나 가스빠르 안또니오 치 같은 현지인들과 문답을 통해서 자료를 정리하며 집필을 완성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점은 그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우엇보다도 저자인 란다의 경험과 느낌이 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이곳에서 오랜 기간 머무는 동안 그가 관찰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동식물과 자연환경에 대한 기록은 그 세밀함이 매우 놀라울 정도다. 란다는 생애 가운데 30년 가까운 시간을 마야 원주민과 함께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해 마야 유까떼꼬어도 구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인디오들의 언어로 교리를 기록하였다고 스스로 편지에서 밝힌 바 있다는 사실이 있다.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566년부터 수년이 걸린 것으로 보이며,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에스빠냐 정부에 본인의 입장을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정복 초기 이권에 얽힌 다양한 이해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저술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란다도 분쟁의 한가운데 서게 되며, 원주민들 탄압으로 문제가 제기되자 해명을 위하여 그가 직접 에스빠냐로 건너가게 되었다고 한다. 책에 원주민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행실이 좋지 않고 에스빠냐 사람들이 그들을 문명화한 것에 크게 가치를 두지 못하기 때문에 만일 강경하게 조치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다시 원래 생활 방식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책의 집필 이유가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는 셈이다.

 


 

잔인하고도 더러운 유까딴 사람들의 인신공양과 고행_볼에 구멍을 내기도 하였고, 아랫입술에 내기도 하였으며; 몸 일부에 상처를 내기도 하였다; 혀의 양옆으로 비스듬하게 구멍을 내서 지푸라기를 통과시키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하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랐다; 또한 부끄러운 부위인 남성 성기의 포피에 상처를 내서 귀에서처럼 증표를 남겨 두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할례의식을 한다고 인디아스의 역사가가 착각하였다. 그 밖에도 인디오들은 더럽고도 처참한 공양을 하였다. 피공양을 할 남자들은 신전에 모여 차례대로 서서 각자 성기의 측면으로 비스듬한 구멍을 냈다. 가능한 많은 실을 (구멍으로) 통과시켰고, 그리하여 모든 남자의 성기는 실에 꿰어진 상태가 되었다; 모든 사람의 성기에서 낸 피로 악마를 문질렀는데, 가장 많이 한 사람이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자식들 또한 어려서부터 이러한 일에 익숙해졌다.(p.217)

 

저자 : 디에고 데 란다

 

16세기 마야 지역에서 활동한 가톨릭 신부이다. 초기 식민지 시대인 1549년 에스빠냐에서 멕시코로 건너가 그곳 원주민 포교와 저술 활동에 힘 쏟았다. 이때 마야 지역은 이미 에스빠냐 몬떼호 장군에게 1520년대 이후 정복되고 있었고, 40년대 이후로는 많은 지역이 에스빠냐의 복속 아래 놓였다. 따라서 저자인 란다 신부가 이곳에 도착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성당이 생기고 수도사들의 포교가 시작되고 있었다. 란다 역시 1552년 유까딴 지역의 과르디안(주임신부)으로의 부임을 시작으로 마야 원주민들과 인연을 맺었다. 원주민 포교를 위하여 신부들은 그들의 언어와 관습에 특히 많은 관심을 보였다. 란다도 그러한 필요 때문에 그들의 생활과 언어를 공부했다. 란다는 원주민들과 가까이 지내며 교류한 반면, 그들의 인신공양과 우상숭배 풍습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다.

1572년에는 유까딴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란다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으로 마야문명에 관한 자세하고 광범위한 글을 남겼으나,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수많은 원주민을 화형에 처했으며 마야문자로 기록된 문서를 모조리 불태운 장본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란다는 마야의 문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고발당하고 에스빠냐로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으나 관련자들을 설득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다.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은 이러한 과정에서 란다의 경험과 호기심, 실제적 필요로 탄생했다. 1573년에는 당시 유까딴 지역 가톨릭의 최고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메리다의 오비스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579년 멕시코의 유까딴 지방 메리다에서 사망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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