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은 여자가 되나니 - 아킬레우스의 노예가 된 왕비
팻 바커 지음, 고유라 옮김 / 비에이블 / 2022년 6월
평점 :
절판



 

그리스 신화는 독자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시기를 막론하고 '필독서'였다. 마치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책을 멀리하는 사람이고, 공부를 못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다가왔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세계문학전집'을 사다주어도 그리스·로마 신화는 1, 2권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것부터 먼저 읽어라는 식이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로마 신화의 내용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자세히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내용도 알고 있는 게 많다. 독자도 그렇다.

다만 정식으로 완역본을 읽거나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이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내용을 알기도 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골격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이 책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는 그리스신화의 하나인 트로이아(영어 발음으로 배워서 '트로이') 전쟁 때의 이야기다.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나고 트로이아 패전국의 일부 세력이 도망쳐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있다. 아무튼 그때의 패전은 곧 노예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 책도 트로이아 전쟁의 패전국 왕비 브리세이스가 등장한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전쟁 물자를 조달하고자 또 하나의 도시국가를 함락시키고 브리세이스 왕비를 자기 노예로 삼는다. 브리세이스로서는 승전국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호메로스가 쓴 『일리어스』에서는 영웅으로 묘사된다)을 '용서할 수 없는 원수', '무자비한 도살자', '어두운 영혼을 가진 가여운 자'인 아킬레우스의 운명에 말려들게 된다.

 


 

사실 독자는 그리스 신화를 읽게 되면서 많은 의문점을 가졌었다. 왜 신을 인격화해서 굉장한 폭군으로 등장시켰을까?와 왜 이런 이야기를 널리 알리려고 문자로 적어 정리했을까?였다. 신화를 연구하는 학자도 아니고, 자세히 읽어본 적이 없는 독자로서는 이 궁금증을 오래 갖고 있었다. 지금도 실제 이유는 정확히 모르고 있음을 고백한다. 다만 이것 저것 조금씩 읽어본 기억과 독자 나름의 판단으로는 나라와 지배계층이 의도적으로 기획해서 문자로 정리하고 책으로 남겼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문자가 없었을 당시에는 구전(口傳)됐겠지만 문자를 알게 되면서부터는 책으로 남긴 이유가 왕과 지배층의 명분을 확립하고 다른 나라에게도 확실한 명분을 내세우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트로이아 전쟁은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펠레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를 두고 헤라와 아프로디테(로마신화의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다투다가 트로이아 왕자 파레스가 심판을 내려 아프로디테가 주인이 되었다. 그 대가로 파레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의 사랑을 얻게 해 주었다. 아내를 빼앗긴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과 함께 트로이아 원정길에 나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승전국 그리스로서는 당연히 전쟁의 명분과 승전의 향연을 즐길 명분이 생기게 되는 일이다. 그리스 신화는 결국 왕과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다스릴 명분으로 사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도 트로이아 전쟁을 바탕으로 집필한 소설 작품이다. 트로이아의 왕자 파레스가 그리스 스파르타에서 헬레네 왕비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무단으로 데리고 온 후 그리스 연합군과 트로이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고 나온다. 트로이아 성 앞에서 아홉 해 동안 진을 치고 있던 그리스군의 병영에는, 트로이아의 도시국가 리르네소스의 왕비였지만 이제는 아킬레우스의 노예로 전락한 주인공 브리세이스가 있다. 그리스가 주변 국가들을 토벌하고 약탈한 뒤 그녀를 전리품으로 취한 것이다. 도시국가들 사이에 그리스 영웅들의 이름은 익히 알려져 있었기에 그녀도 그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브리세이스는 병영에서 아킬레우스, 파트로클로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 네스토르, 아이아스와 같은 영웅들을 관찰하면서 그들의 숨겨져 있던 범속함과 어두운 측면을 알게 된다. 브리세이스의 시선을 통해 신화적 지위에서 끌어 내려진 그들은 어머니의 품이 그리워 퇴행행동을 하거나 자존심을 짓밟혀 분노하며,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고도 뉘우치지 않는다. 이렇게 변주된 신화 속 인물들의 입체적 면모는 서사를 수놓는 관계들에 더욱 풍부한 심리적 미스터리를 드리운다. 이 낯선 긴장감은 이미 아킬레우스 신화를 알고 있는 독자들에게도 새로운 서사적 체험을 선사할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평소 생각하던 그리스 신화의 낯선 모습이 오히려 더 반갑다. 당시의 왕과 전쟁, 남자들의 단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트로이아 전쟁에 관한 한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조명한다. 전장에서 더러워진 옷을 세탁하고, 베틀로 천을 짜고, 전사자를 염습하면서 병영의 세간을 떠받치던 수천 명의 여자 노예들이 이제 소설 속에서 제 목소리로, 오랜 침묵을 깨고 말하기 시작한다. 주인공 브리세이스는 그들 중 한 명이자, 역사의 또 다른 증인이다. 이 책이 〈가디언〉으로부터 ‘21세기 최고의 책’이라는 타이틀을 따낸 것이 단순히 유명한 신화를 변주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주인공 브리세이스는 자기와 같은 처지로 병영에 끌려오게 된 여자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자신의 아버지, 남편, 아들을 학살한 자들 옆에서 여성들은 어떤 삶의 양식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역사에서 지워지고 배제되고 만 이름들. 저자 팻 바커는 숨 막히게 세밀한 시대 묘사와 빛나는 문장으로 인물 하나하나를 되살려내는 동시에, 그들을 품고 있던 복잡한 그리스 병영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재현한다. 소설 속 화자로 등장하는 브리세이스의 증언은 그간 수많은 전쟁 한복판에서 수치를 감수하고 살아남은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를 오랜 침묵으로부터 되돌려주면서, 오직 명예와 권력만을 향해 나아가는 남성들의 목소리와 대비시킨다. 나아가 주인공은 비록 결코 명예롭다고 할 수 없는 자리로 내몰릴지라도, 시간은 살아가는 일을 버티는 자에게 언젠가는 삶의 찬란함을 되돌려준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하며 약자들의 존엄이 어떻게 지켜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팻 바커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신화 속 인물들을 미묘하고 복잡한 캐릭터로 재구축하여 뒤틀고, 브리세이스라는 새로운 여성 화자를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발견으로 가득 찬 또 하나의 서사시를 완성해냈다. 분명히 거기 있었음에도 우리가 그동안 외면했던 다른 반쪽의 역사가 여기에 도착했다. 브리세이스는 말한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노래가 필요하다”고. 부커상을 수상하고 영미문학의 거장이라 불리는 팻 바커의 이 소설은 신화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빠지는 함정을 절묘하게 피하며 또 하나의 모던클래식을 완성했다는 외신의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모두가 안다고 자부하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새로운 시각이 눈을 붙들고, 아름답고 역동적인 문장으로 이 책의 완성도를 높였다. 〈워싱턴타임스〉가 “모든 게 생생하다. 강력한 서사는 단지 틀에 불과할 뿐, 이 소설을 매혹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 모든 디테일이다.”라고 평했다는 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작품은 무려 26개국에서 출간되어 독자들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이 소설 뒷 부분에는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의 「해제」가 있어 독자들의 이해와 감상을 돕는다. 독자 역시 이 해제를 통해 이 생경하지만 친숙한 영웅들에 대한 재해석과 그리스 신화에 대해 재조명하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이 해제에서 김헌 교수는 호메로스의 『일리어스』와 이 작품을 비교하는 부분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 "호메로스는 『일리어스』에서 트로이아 전쟁 전체를 역사를 기술하듯 시간 순서에 따라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나열하는 대신, 전쟁의 10년째 되는 해 며칠 동안에 초점을 맞춰 "아킬레우스의 진노"에 관해 이야기를 집중시켰고, 탁월한 솜씨로 전쟁의 다채로운 전모를 적절하게 끼워 넣어 전체의 완결성을 높였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을 통해 결론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호메로스가 영웅 아킬레우스가 추구하는 불멸의 명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진노의 사건과는 관련이 없는, 수많은 인물과 사건, 배경들을 생략해 버렸다. 이야기의 유기적인 흐름을 흐리거나 완결성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사에서 배제되었다고 해서 그것들이 애초에 무가치한 것들은 아니며 사건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그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는 김현 교수의 주장이다. 이어 김 교수는 팻 바커는 『일리어스』 서사의 가장자리에 머물던 브리세이스를 그 중심으로 끌어오면서 또 다른 사건의 한가운데로, 즉 "도살자" 아킬레우스가 평화롭고 아름다운 브리세이스의 도시 리르네소스 성벽을 유린하는 장면 속으로 직진한다. 그리고 『일리어스』에 가득한 영웅들 주변부에만 내몰렸던 다른 여인들을 함께 불러들여,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전쟁의 참상과 인권유린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그리고 묻는다. 영웅이란 무엇인가? 짐승보다도 더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지 앟는 인간은 과연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가? 그 어떤 순간에도 인간이 지켜야 하고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즉 『일리어스』를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의 시점으로 시선을 가져갈 경우 정말 다른 신화가 되고 소설이 됨을 비교하는 것은 매우 참신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일리어스』는 지배자와 승전의 시점으로 기술한 반면 『침묵은 여자가 되나니』는 패전과 전쟁터 뒤편에 숨겨져 있던 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고 지적한다. 전쟁의 패배로 순식간에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전리품이나 노예로 전락해서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견뎌내야 했던 여인들, 브리세이스와 이피스, 크리세이스와 우자, 테크메사, 헤카메데, 릿사의 감정과 말과 행동, 그리고 침묵은 우리에게 익숙한 영웅서사라는 동전의 뒷면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독자는 김 교수의 평가에 크게 공감한다. 이 소설의 가치는 이 같은 시선으로 더욱 높아갈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처음에는 아킬레우스가 나를 그곳에 두는 이유를 몰랐지만, 그가 하루에 남자들 예순 명을 죽인 보상으로 나를 받았다는 기억이 났다. 그러니 그는 당연히 나를 손님들 앞에 내놓고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트로피를 벽장 구석에 숨겨두는 사람은 없으니까."(p.55)

"아킬레우스가 도시를 불태우고 가져온 약탈품이 사방 가득한 곳간에서, 그 말이 내 주위를 감돌았다.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도 셀 수 없이 많은 여자들이 피할 수 없었던 걸 했지. 남편과 오라비를 죽인 자에게 다리를 벌렸으니.”(p.360)

 

저자 : 팻 바커

 

1943년 5월 8일 영국 쏘너비에서 태어났다. 1982년 《유니언 스트리트》로 활동을 시작하여 현재까지 기억과 트라우마, 생존과 회복을 중심 소재로 15권의 작품을 집필하였다. 1995년 부커상 수상작인 《고스트 로드》로 절정을 이룬 팻 바커의 ‘갱생 3부작’은 그녀를 ‘영국 역사소설의 거장’ 반열에 올려놓았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의 시대적 진실성과 서사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는 팻 바커의 역사소설을 순문학의 영역으로 격상시켰다.

 

역자 : 고유라

 

중학생일 때 ‘딜버트’를 만난 이후로 스콧 애덤스의 팬이 되었고 그 인연으로 《열정은 쓰레기다》를 번역했다. 이화여자대학교 문헌정보학과를 졸업하고 미국과 프랑스에 체류하며 외국어를 익혔다. 《진짜 여자가 되는 법》, 《책 읽는 소녀》, 《쓸모없는 짓의 행복》, 《아마도 올해의 가장 명랑한 페미니즘 이야기》, 《승리의 기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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