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 여자 넷이 한집에 삽니다 - 프로 덕질러들의 슬기로운 동거 생활
후지타니 지아키 지음, 이경은 옮김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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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덕후 여자 넷이 한집에 삽니다』를 읽기 위해선 '덕후'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얼마 전부터 부쩍 많이 사용되는 단어이다. '덕질'이란 파생어도 생겨난 상태이다. 독자도 이 단어가 미디어에서 자주, 거리낌없이 사용되는 것을 처음 봤을 때는 무척 당황했다. 외래어는 그대로 사용하면 안 되고 불가피할 경우 순화(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물론 일본어 자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명·지명 등 고유명사는 현지음 그대로 사용한다. 또 우리말로 쓰이는(대체되는) 마땅한 말이 없을 경우에 한해 외래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특례 사항(국어대사전 편찬 원칙)이 있다고알고 있다.

덕후는 일본어에서 온 단어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일본어 오타쿠(御宅)를 한국식으로 발음한 ‘오덕후’의 줄임말로,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일본어인 오타쿠(御宅)를 한국식 발음으로 바꿔 부르는 말인 '오덕후'의 줄임말로 뜻은 오타쿠와 동일하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에서 등장한 신조어로 본래 '집'이나 '댁(당신의 높임말)'이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이 의미가 확장되면서 초기에는 집 안에만 틀어박혀서 취미 생활을 하는,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어떤 분야에 몰두해 전문가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 말이 왜 우리말로 대체되지 않고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을까 사뭇 불만스럽다.

 


 

이 책은 일본의 저자 후지타니 지아키가 썼기 때문에 번역상 다른 말이 없어서 그대로 사용되었거나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 단어 그대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덕후란 말은 1970년대부터 일본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1990년대 중반 은둔형 외톨이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문제로 떠오른 용어인 히키코모리와 비슷한 뜻이다. 히키코모리는 '틀어박히다'는 뜻의 일본어 '히키코모루'의 명사형으로, 사회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일본말을 모르는 독자가 보기에는 두 단어의 뜻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무튼 이 책은 표제어에서 보이듯이 자신만의 취미나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네 명의 여성이 한집살이를 하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덕후 생활'을 쓴 것이다.

이 책은 '덕후가 되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덕질에 감동해 소리 지르다 언제까지 이럴 거냐며 엄마한테 등짝 맞았을 때, 수만 원의 티켓값이 차곡차곡 모여 체감 ‘수억’의 카드값으로 돌아왔을 때, 최애로 도배한 나와 달리 친구들의 메신저 프로필 사진이 하나둘 아이들로 채워질 때…… N년차 덕후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현실 자각’의 시간이 있다. 오래도록 설레고 즐겁고 싶은데, 비어가는 통장에 덜컥 겁이 나고 혼자가 될 미래가 불안하다. 덕후라면 한 번쯤 고민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 이대로 덕후로 살고 죽을 수 있을까?’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데도 힘들어 보인다.

 


 

저자 후지타니 지아키는 이 책의 서문 「들어가며」에서 "덕후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서브 컬처'에 한 발, 아니 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못박는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신작 제작 소식에 고기를 굽는 사람도 덕후, 소셜 게임에 빠진 사람도 덕후, 3차원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도 덕후, 최근에는 록 밴드 팬도 소비 형태에 따라 덕후로 정의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 또한 비주얼계 밴드 팬을 그럭저럭 사반세기 넘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25년 넘게 덕질하며 살아온 한 비혼 1인 가구 세대주인 저자가 어느 날 문득 찾아온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을 해소하고 ‘지속 가능한 덕질’을 위해 덕후 세 친구와 함께 꾸린 덕질 친화 셰어 하우스 입성기이다. 저자가 셰어 하우스를 꾸리게 된 계기부터 멤버 모집, 우당탕탕 집 구하기, 입주, 좌충우돌 동거 생활까지 ‘덕질 메이트’ 네 여자가 실제로 동거를 결심하고 실행한 경험을 담았다. 서문에서 저자는 덕후 생활을 한 이유도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덕후는 좋아하는 것에 관련된 것은 전부 모으려는 욕구가 강하다. 좋아하는 게 많아질수록 물건도 늘어난다. 최애는 끝도 없이 늘기 마련인데, 도쿄 땅덩어리는 한정돼 있고, 집세는 비싸고, 수입은 그리 간단히 늘지 않는다. 안 그래도 공연 원정으로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은데 덕후 굿즈 창고로 둔갑한 집에 터무니없이 비싼 집세를 내는 것이 어리석다는 생각마저 든다고 털어놓는다.

 


 

이 책에는 4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저자는 친절하게 4명의 주인공을 모두 별도 페이지를 마련해 소개한다.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아이돌, 밴드, 배우, 연극, 뮤지컬…… 좋아하는 것도 제각각인 네 여자가 ‘덕후로 살고 덕후로 죽기 위해’ 한집에 뭉쳤다는 것이다. 최애는 알아도 본명은 몰랐던 이들이지만, SNS라는 훌륭한 인성 지표를 통해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동거를 결심하고, 오랜 기간 다져온 검색 능력을 이용해 ‘가족이나 (결혼 예정) 연인이 아니라면 셰어 하우스 불가’라는 편견 가득한 조건을 뛰어넘어 덕후 네 명을 위한 이상적인 집을 찾아낸다.

이렇게 시작된 ‘덕후 하우스’에서 네 명의 덕후들은 덕질이라는 일상을 함께 즐기고, 문제 상황에는 덕후의 방식으로 대응하고, 전 지구적 팬데믹이 불러온 경제적, 정신적, 신체적(?) 위기를 덕질로 대동단결해 극복한다. 상대의 ‘지뢰’를 절대 밟지 않는 덕후의 예의로 갈등을 피하고, ‘최애’ 하우스에 대한 사랑으로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먼저 집안일에 나서는가 하면, 문제가 생기면 ‘드립 대결’로 불안감을 저 멀리 보내버리고, 코로나19로 재택을 하는 동안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덕질 콘텐츠로 온라인 상영회를 열며 전 지구적 재난을 버텨낸다. 서로에 대한 선을 지키면서도 재밌는 건 적극 ‘영업’하며 즐거움은 공유하고 생활을 나눈다. 4인 가족용 주택을 나눠 쓰니 다리를 쭉 뻗을 수 있는 욕조와 넓은 거실이 생긴 것은 덤이다.

 


 

도시에 불 켜진 세 집 가운데 한 집에는 외로운 노후, 불안한 경제적 지위에 대한 걱정을 뒤로 미루고 넷플릭스와 트위터를 여는 한 사람이 서식한다. 서울 사는 3가구 중 1가구가 1인 가구라는 시대다(‘2020년 서울시 복지실태조사’). 청년층의 경우 혼자 사는 삶에 대한 만족감이 높았지만, 통계는 1인 가구가 겪는 3대 어려움 역시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바로 ‘위급할 때 대처의 어려움, 외로움, 경제적 불안’이다. 이런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여러 공유 주거 형태가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모르는 이와 함께 산다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결혼도 생각하지 않고, 종종 선을 넘는 가족도 나의 훌륭한 동거인이 되어줄 수 없다면, ‘지향’이 같은 이들을 모아보면 어떨까?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덕후’들의 동거를 시작했다. 덕질이 생활이고 생활이 덕질인 네 여자는 덕질의 씨실과 날실을 엮으면서 매일의 서사를 함께 써나간다. 덕후들의 동거에서, 서로는 무언가에 푹 빠진 친구의 얼굴을 보며 기쁨을 얻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아는 이들끼리 때로 덕질의 고난을 위로하고 취향을 공유하면서 더 많은 즐거움을 함께 찾아 나선다. 이 책도 한집에 사는 세 사람의 덕후의 동의를 얻고 집필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4월 1일 저녁, 어느 밴드의 해체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접하게 됐다. 만우절에 이건 아니지. 거실 식탁에 엎드려 있는데 동거인들이 속속 집으로 돌아왔다. …… 가쿠타 : 초밥 사 왔는데요. (쿵!) 호시노 : 나는 맥주를. (쿵!) …… 동거인들은 모두 같은 세대라서, 그 밴드의 인기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다. …… 그날 밤은 초밥을 먹으며 각자의 추억을 얘기했다. 그야말로 초상집이다. 그래도 슬픔을 나눌 사람이 집에 있는 건 나쁘지 않네.”(p.119~120)

 


 

저자 후지타니 지아키는 동거 생활을 게임에 빗대 이렇게 말한다. “(셰어 하우스 생활은) 게임으로 치면 목숨이 세 개 남은 상태다. 목숨 세 개가 잘못되더라도 게임 오버가 아니라는 사실은 꽤 든든하다.”(p.118) 닥쳐오는 위기에 조금쯤 휘청이더라도 절대 쓰러지지는 않는다. 거실에는 응원봉, 서재에는 만화책, 그리고 옆방에는 나와 함께 생활을 꾸리고 위기를 헤쳐 나갈 덕후가 있기 때문이다. ‘재밌으면 가보자고’를 외치는 덕후 여자 네 명의 왁자지껄 유쾌한 동거 생활을 보고 있자면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기대가 피어오른다. 비혼이라면, 혼자 살고 있고 혼자 될 노후를 고민해본 이라면 평점 좋은 애니메이션 신작처럼,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판타지 소설처럼 즐거운 상상의 실마리를 열어줄 ‘비혼 덕후 동거 장려 에세이’ 『덕후 여자 넷이 한집에 삽니다』를 읽어볼 것을 권유한다.

 

동거인들에게 ‘덕후 셰어 하우스 유지 포인트’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마루야마 : 아무래도 덕후와 함께 살면 느닷없이 발광하거나 물건이 쌓이는 걸 이해해주니 편해요.

가쿠타 : 덕후는 서로의 ‘지뢰’를 밟지 않으려고 하잖아요? 그게 실생활에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하는 것 같아요. ……

마루야마 :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역시 어딘가 존경할 만한 부분이 있거나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사람과 함께 사는 건 좋은 것 같아요.(p.188~189)

 


 

“이래저래 각자 온라인 회식을 즐기거나, 뜬금없이 트위터에서 화제가 된 ‘소蘇’를 만들며 집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태국 BL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중에서도 걸작으로 유명한 「보이프렌즈」를 SNS에서 강력하게 추천받아, 하우스 멤버나 덕질 메이트들과 우와~ 꺄악~ 소리를 내며(어느새 소리치고 있었다) 온라인 상영회를 한 것도 재밌었다. 우울해지기 쉬운 재택 기간에 열대 나라의 알콩달콩한 로맨틱 코미디는 위안을 주기에 충분했다. …… 덕후 콘텐츠와 SNS, 그리고 하우스 멤버들 덕분에 버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코로나19는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p.173~174)

 

저자 : 후지타니 지아키(藤谷千明)

1981년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 공업고교를 졸업 후 자위대에 입대했다. 그 후 서점 직원, 편집디자이너 등 여러 직업을 거쳐 프리랜서 작가가 됐다. 취미를 살려 주로 서브컬처 분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공저로 『모든 길은 비주얼계로 통한다(すべての道はV系へ通)』 『물방울 자전 아방가르드 연대기(水玉自? ア?バンギャルドㆍクロニクル)』가 있다.

 

역자 : 이경은

일본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드라마 제작회사에서 일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영화 스태프로 일했다. ‘냥덕후’로,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 두 주인님을 모시고 있다. 길고양이가 학대로 고통 받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며 길 친구들을 돌보고 있다. 현재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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