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현상청 사건일지 안전가옥 오리지널 18
이산화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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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 담당이에요?”

서류 더미를 한 아름 들고 사무실에 빼꼼 고개를 들이민 여자를 보자마자 나는 물었다. 항상 보던 사람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아무래도 담당자가 바뀐 모양이었다. 승진했는지, 아니면 일을 그만뒀는지. 정장을 입고 있다기보단 차라리 붙잡혀 있단 표현이 적합할 듯한 여자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선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네, 처, 처음 뵙겠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기이현상청 행정3팀 영희예입니다.”

"반가워요, 앞으로 얼굴 자주 보겠네. 기획재정부 특수예산과의 미정연이라고 해요."(p.9)

 

평범하다. 여느 사무실처럼 정부의 한 사무실 풍경이다. 업무차 만나려 찾아온 손님, 그리고 맞이하는 공무원. 조금 특이하다면 '기이현상청'이란 이름과 등장인물의 이름이다. 그들의 이름은 왠지 낯설다. 우리가 가진 성씨가 있긴 하겠지만... 오히려 거꾸로 읽는다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이 책의 제목이나 등장인물의 이름들, 그리고 관청의 명칭 등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요즘 소설 문학의 대세를 이루는 SF 소설이라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평범할 정도로 안온한 느낌을 준다.

 


 

이 책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결국 공무일지다. 그것도 철저히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실정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노을을 아름답게 할지는 모르나 치명적인 환경문제인 미세먼지, 공과 관에 스며든 사이비 신앙, 권력자 우상화, 신도시 개발을 둘러싼 이권 대립, 공조직의 목적전도, 국가 인프라의 수도권 집중화, 합의에 이르지 않는 시위, 내정된 지원사업 수혜 등 상당히 복잡한 동시대 문제들이 한데 논의된다. 공조직에는 시스템이 있고, 시스템은 시스템이 되었으므로 굳어져 간다. 그럼에도 여기 일하는 공무원들의 개인성과 도덕의식 덕분에 이 조직은 아직은 어떻게 해볼 만한 이끼들을 달고 굴러간다.

“원래는 다 말해 드리면 안 되는 건데, 이렇게 촉이 좋은 사람은 어차피 살다 보면 다 알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말씀을 드릴게요. 혹시 귀신 믿어요? 요괴, 이매망량, 이스시, 버닙, 에너지 생명체, 뭐 그런 종류.”

기이가 판치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공조직 ‘기이현상청’이 존재한다. 이곳을 둘러싼 상당히 초현실적인 존재들과 상당히 현실적인 문제들에 관한 가감 없는 기록이 바로 이산화 작가의 연작소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다. 기지 넘치는 SF 작가가 초현실의 존재를 빌려 이야기하는 동시대 현실들은 꽤 무게가 나가지만, 이를 처리하는 방식은 예리하고 가뿐하다. 그러나 조금은 앞뒤 안 맞은 부분이 발견돼 약간의 걱정을 안은 채 책을 읽는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에는 당연하게도 기이가 등장한다. 기이는 귀신, 정령, 흡혈괴물, 괴현상 등 영토, 문화,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 영적 존재들이다. 기이는 그 기원과 특성에 따라 이름 붙었고, 종종 불렸으며, 불릴 때마다 믿어질 때마다 실질적인 힘을 행사해왔다. 기이를 다루되, 일지 형식으로 다룬다는 점이 이 소설의 미덕이다. 기이에게도 기이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하루가 있고, 이 하루는 반복되며, 생활이 되고 환경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그날그날은 기록된다. 기이해서, 기이라서, 대단하고 특수해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이들의 일상과 생활이므로 성실하게 관찰되고 정리된다.

비인간 존재에 관한 집요한 기록만큼 인간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텍스트도 없을 것이다.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하나의 시스템을 채우는 다채로운 역할들을 서술해 나간다. 「노을빛」에는 특수예산과에서 예산을 편성하고 지난 지출을 점검하는 기재부 직원이 있고, 「주문하신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에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기 항아리에 살며 아이스크림 신제품을 개발하는 두 정령을 이해하기 위해 파견 나온 기이현상청 직원 및 생성적 적대 신경망 원리를 배우고 적용하는 개발자가 출연한다.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에는 광명 연구개발특구에서 시제품을 만들고 이를 유출한 직원과 그 해프닝을 해결하는 수사관이, 「마그눔 오푸스」에는 지역 신흥 종교의 교주와 신도, 이를 해결하러 온 하청 업체 직원과 그 부사수가 등장한다. 이들은 정령과 귀신을, 그러니까 사건을 기록하는 존재들이지만, 『기이현상청 사건일지』 역시 기록이라는 점에서 작품의 주인공은 현상청을 이루는 낱낱의 존재들로 옮겨간다.

 


 

당시에 내가 비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사람이 아닌 존재까지 합쳐야 겨우 여섯 명이 되었다. 그중에서 넷은 전 애인이었으며, 둘은 애인 사이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제로라는 이유로 내 신뢰를 받는 친구들이었고, 직장 동료는 한 명도 없었다. 비희와 사귀는 동안 나는 연애 사실이 직장에 알려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대화를 얼버무렸고, 휴대전화 화면을 감추었으며, 심리 상담을 앞두고선 예행연습까지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기이현상청 소속의 공무원이 사람으로 변신하는 이족보행 파충류와 사귄단 건 그런 일이었다.(p.51)

처음 만났을 당시에 비희의 표면적인 신분은 모 대형식품 제조 업체 직원이었다. 직책은 경기도 광명시 연구개발특구에 위치한 제3광명신제품연구소의 시니어 매니저. 주요 업무는 전 국대형마트와 편의점 매대에놓일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 관리. 하지만 연구소 소재지가 하필 광명 연구개발특구라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제3광명신제품연구소의 진짜 주인은 식품 제조 업체가 아닌 광명회, 즉 일루미나티였다. 파충류 인간들의 범국가적 카르텔로 악명 높은 일루미나티가 직접 운영하는 시설인 만큼, 기이현상청에서는 연구소를 포함한 특구 전체를 1급 지정기이 단체로 분류해 매년 두 차례씩 담당 공무원을 통해 정기 실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리고 당시의 담당 공무원이 바로 나였다. - 「잃어버린 삼각김밥을 찾아서」 중에서

 


 

조선의 가장 큰 성군 세종대왕을 길 잃은 정령으로 묘사하는 「왕과 그들의 나라」는 이 소설집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띈다. 저자는 경복궁 내에서 상습적으로 무허가 제례를 벌인 지정기이 단체가 승인 취소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단편이지만, 경복궁 전체가 세종의 정신세계에 집어삼켜진다는 작중 전개는 순전한 저자의 상상이라고 밝힌다.(p.286) 저자에 따르면 세경이 사용하는 상고 부적술에 대한 묘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편 광명 연구개발특구에서는 살상용 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며, '노자의 콧노래'는 어디까지나 휴대용 전자레인지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제품의 코드네임이다. '상처이빨 랏지' 역시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알려 드린다.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반증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반증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학의 본령이라 말한 바 있다. 비판할 수 있는 왕, 권력을 잃을 수 있는 왕일 때, 비로소 지도자일 수 있다고 이 소설은 과감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절대’와 ‘결코’의 굳고 고이는 세계에서 ‘설마’와 ‘혹시’의 굴러가는 세계로 『기이현상청 사건일지』는 독자를 안내한다. 그곳은 비관도 낙관도 아닌, 기이와 환상이 거하는 공간이다.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세종대왕님이 백성을 왜 해쳐요?”

한순간의 여유를 틈타 녹즙을 빨아 먹던 세경이 그 말에 나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비록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그 눈빛은 명백히 ‘무슨 당연한 소리냐’란 말을 하고 있었다.

“아, 진짜! 옛날에 한국사 공부했다면서, 왜 뭐만 물어보면 반응이 그래요? 제 말은, 다른 혼이야 우리가 많이 다뤄 봤어도 이번엔 세종대왕님이잖아요. 한글 만드신 성군. 그런 분이 왜 저렇게 안개를 치고, 백성을 가둬서 때리고 그러느냔 얘기예요. 설마 맞춤법 안 지켰다고 이러시나?”(p.186)

 


 

송영은 논산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기이현상청 공무원의 말을 떠올렸다. 귀신이 보이는 체질도 아니고, 하다못해 잘 씌는 체질도 아닌데, 딱 목소리 하나에만 영적인 울림이 있다고. 귀신과 요괴와 정령들이, 각종 기이하고 불길한 존재들이 송영의 목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에 인생에서 그토록 나쁜 일을 많이 겪어야 했던 것이라고. 구령을 한 번 외칠 때마다 훈련소에 득시글대는 온갖 것들의 눈길을 일시에 받았을 테니 기절을 안 하고 배겼겠느냐고. 그 목소리 자체는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어쩌다가 큰 소리라도 잘못 내면 바로 몸이 차갑게 굳어 버리는 것도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송영이 이번에 기절하지 않고 버틴 것은, 단지 비명을 들어 줄 다른 누군가가 이 어둠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p.113) - 「마그눔 오푸스」 중에서

 

저자 : 이산화

 

화학을 전공하였고 SF를 쓴다. 사이버펑크 장편소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와 단편집 『증명된 사실』을 출간하였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앤솔로지에 작품을 수록하였다. 단편 「증명된 사실」은 2018 SF어워드 중·단편소설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편의점에서 신제품 아이스크림을 발견하면 일단 집어 든 다음 먹으면서 후회하는 습관이 있다. 양쯔강돌고래가 어딘가에 아직 살아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편 「아마존 몰리」가 온라인 연재 플랫폼 브릿G의 2017년 2분기 출판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이후 제2회 브릿G 작가 프로젝트에 당선된 「증명된 사실」을 『단편들, 한국 공포 문학의 밤』에 실었다. 2018년에 출간한 사이버펑크 장편소설 『오류가 발생했습니다』는 온라인 서점의 SF 분야에서 3위까지 오르기도 했다. 조금 신맛이 나는 과일 디저트를 좋아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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