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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여신 인안나 - INANNA, THE FIRST GODDESS
김산해 지음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평점 :
독자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를 지금껏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저자는 호메로스로 고대 그리스 시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청소년 시절 그렇게 배웠고,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도 그렇게 알고 읽었다. 그런데 얼마 전 영화 〈이터널스〉가 개봉된다고 해서 관련 기사를 읽다가 우연히 '길가메시'란 영웅담의 주인공을 알게 됐다. 여러 경로를 확인해 인류 최초의 신화이고, 서사시는 '길가메시'임을 확인했다.
『길가메시』는 폭군에 불과했던 한 인간이 고대에 지혜자요 신(神)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겪었던 모험과 실패,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자 영웅 신화임을 알게 된 것이다. '길가메시'가 적힌 점토판이 1900년대 초라고 하는데 왜 우리의 등학교 교과서나 여타 책에서는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를 고집하고 있었을까. 정확한 이유를 독자는 알지 못하지만 그리스·로마 중심의 문명을 서구 각국에서 인정하지 않아서일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로마 문명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서양인들이 지금의 이라크 지역인 수메르 문명을 인정하기 싫어서인 것으로 추정 가능하리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길가메시 서사시' 원문의 초기 번역서를 접한 후 환희와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정말 굉장해요!”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 4,000 년 동안 잠자고 있었던 고대의 마법이 풀렸기 때문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의 분량이 엄청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의 주인인 수메르인들은 약 4,000여 년 전,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던 신년 축제는 그 후로도 1,50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책에 따르면 수메르의 계승자는 셈족이었다. 그들은 ‘인안나’와 ‘두무지’를 ‘이쉬타르’와 ‘탐무즈’라는 셈어 신명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수호신으로 만들어 제전에 올렸다. 성스러운 제의는 계속되었다. 인안나와 두무지의 신성은 합쳐졌다. 거기에다 지혜의 신왕 엔키와 태양의 신 우투의 신성까지 더해져서 연방으로 혼용되었다. 신들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이집트의 오시리스가 되었고, 페르시아의 미트라가 되었고, 그리스의 디오니소스가 되었고, 소아시아의 아티스가 되었고, 시리아의 아도니스가 되었고, 로마의 바쿠스가 되었다.(p.8-9)
여기서 독자는 이 책 『최초의 여신 인안나』의 주인공 '인안나'에 주목한다. '인안나'는 ‘이쉬타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하늘과 땅의 여왕이라고 한다. 그는 사랑·전쟁·지혜·풍요·다산·아름다움 등으로 상징화된 모든 여신의 본바탕에 자리한 수메르의 여신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모든 신의 원형이다.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국내 유일 수메르 전문가 김산해가 점토서판을 직접 해독하고 엮어 쓴 것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위과 권능을 포기하고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 인안나의 사랑과 죽음, 부활의 스펙터클한 이야기를 펼쳐낸다.
저자 김산해는 30여 년 동안 수메르의 신화·역사·문명 연구에 온힘을 기울여온 수메르 문명 학자이며 국내에서 최고의 수메르 문자 해독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수메르어·악카드어 같은 고대어를 해독하며 인류의 ‘최초’를 찾아 나섰다. 저자는 책의 앞 부분에 「책을 펴내며」에서 인안나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4,000여 년 전 수메르와 함께 인간의 기억에서 잊힌 여신이 있었다. 그러나 여신과 여신의 신성은 이름과 모습을 바꿔가며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 그리스 문명권, 아라비아를 넘어 인더스강 유역까지 퍼져나갔다. 그는 악카드의 이쉬타르, 가나안의 아스타르테, 히브리의 아스다롯,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아테나, 헤라 등 사랑·전쟁·지혜·풍요·다산·아름다움·금성(金星) 등으로 상징화된 모든 여신의 원형은 바로 수메르의 인안나였다."
19세기 중엽, 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가 케케묵은 먼지로 뒤덮여 있던 베일을 벗어 던지는 순간, 인안나를 포함한 3,600이나 되는 수메르 신이 긴 잠에서 깨어났다. 모든 여신의 원형인 인안나처럼 그들 모두가 창조와 삶, 죽음, 부활, 재생 등을 상징하는 신들의 본바탕에 자리한 신들이었다. 이 책은 천제 안과 인간의 창조주이자 구세주 엔키, 인간에게 홍수를 내린 엔릴, 창조의 모신 닌후르쌍, 태양의 신 우투, 저승의 여왕 에레쉬키갈, 그리고 양치기 두무지와 하늘과 땅의 여신 인안나 등 수메르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신화의 ‘출발점’을 찾는다. 그동안 우리가 그리스와 히브리 신화로만 알고 있던 태초의 신과 인류의 원형을 밝힘으로써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선사한다.
책에 따르면 하늘의 여신 이난나는 하늘과 땅을 버리고 지하세계로 내려가겠다고 결심한다. 모든 신화에서 명계 여행의 이유나 동기가 분명하게 제시되는 것은 아니다. 수메르 신화에서 이난나가 배다른 언니 에레슈키갈이 지배하는 명계로 내려가는 동기 역시 해석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난다. 남편 두무지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하자 아내인 이난나가 직접 그를 찾아 나섰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그녀는 지하 세계의 문지기에게 형부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노라 둘러대기도 한다. 거의 비슷하지만 가장 지배적인 해석은 이룰 수 없는 꿈 최고신의 영광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끊임없는 권력욕 때문에 죽은 자들의 영역까지도 지배하려고, 혹은 하늘에서 땅의 주인이 되고자, 혹은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죽음, 재생, 인생 등 총괄적 의미를 알기 위해서 명계로 갔다는 해석이다.
그녀는 지하세계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알고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돌아나올 수 없는 죽음과 어둠의 땅이었다. 그녀는 몸종 닌슈부르에게 자기가 내려간 뒤 사흘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신전에서 통곡하고 북을 치며 눈을 잡아 찢고 귀를 할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엔릴과 난나와 엔키 신에게 탄원하라고 당부했다. 저승을 향하는 이난나의 자태는 눈부셨다. 명색이 ‘하늘의 여왕’이었다. 그녀는 머리에 ‘사막의 왕관’을 쓰고 이마에 가발을 걸쳤으며, 목에는 청금석 목걸이를 걸었다. 가슴에는 달걀 모양의 구슬 한 쌍을 달고, 여왕의 권위에 합당하게 ‘팔라’ 옷을 입었으며, 눈에는 유혹의 화장을 하고, 가슴에는 유혹의 장식을 달고, 손목에는 금팔찌를 끼고, 청금석 줄자와 자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이 책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거룩하고 위대한 여신 인안나의 사랑과 죽음, 부활의 서사시다. 하늘과 땅의 여왕 인안나는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현실의 권세와 욕망을 버리고 여신 에레쉬키갈이 지배하는 저승을 향했다. 여신은 그곳에서 죽었고, 사흘 만에 부활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운명결정권을 가지는 가장 위대한 신이 되었다.(p113~120) 이 이야기의 바탕이 되는 것은 〈인안나의 저승 여행〉이라는 점토판으로 남아있는 400여 행의 짧은 서사시다. 이 책의 저자 김산해는 더욱 풍성한 이야기 전개를 위해 〈인안나의 저승 여행〉뿐 아니라, 〈인안나와 엔키〉, 〈엔릴과 닌릴〉, 〈두무지의 꿈〉, 〈두무지와 엔킴두〉를 비롯해 인안나와 두무지의 사랑과 결혼에 관한 여러 단편의 점토판 문서들, 엔키와 엔릴, 그리고 길가메쉬에 연관된 많은 점토판 문서를 직접 해독하여 4,000여 년 전의 점토판에 살아 숨 쉬는 이야기들을 엮어냈다. 한국인 저자가 쓴 책으로 국내에 유일하게 선보이는 인안나 신화이며, 〈인안나의 저승 여행〉의 유일한 한국어 해독본이다. 이 책은 그 어떤 신들보다 더 신령스럽고, 용감하고, 강력한 ‘최초의 여신’ 인안나를 입체적이고 완벽하게 복원해냈으며, 그 어떤 신화보다 스펙터클한 여신의 서사시를 펼쳐낸다.
저자에 따르면 인안나는 수많은 메소포타미아 신 중에서 가장 복잡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이면서 지혜와 전쟁의 여신이며, 질투와 분노로 불같이 화를 내면서도 누구보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대비한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름다움과 여성성을 무기로 원하는 것을 쟁취하거나, 남신들의 가부장적 권위에서 벗어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야심 차고 독립적인 여신 인안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인간은 여신의 세계를 부정해왔고, 여신의 존재감을 무시해왔다. 신화는 위대하고 용감한 남신들의 이야기로 가득 찼으며, 신화에서 여신들의 존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러나 인안나의 부활은 여신의 위대함을 증명하며, 신화 속 여신의 존재를 가려온 장막을 걷어내고 여신들의 진정한 권위를 되찾는다.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2007년 출간한 『수메르, 최초의 사랑을 외치다』의 개정판으로, 15년 만에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독자들 앞에 섰다. 이 책의 출간으로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와 『최초의 역사 수메르』에 이은 ‘수메르 3부작’이 완성되었다. 2021년 작고한 후 출간되는 책이기도 하여, 인류 역사의 ‘최초’를 찾아온 저자의 마지막 여정이기도 하다. 저자 김산해는 이 책의 〈책을 펴내며〉에서 “나는 뒤늦게야 한국에서는 수메르의 인지도가 매우 낮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에 한참이나 어두웠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인안나는 거의 모르지만 길가메쉬는 꽤 많이 알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먼저 펴내기로 마음먹었다”라며 이 책의 출간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를 펴낸 후에도 그는 인안나를 포기하지 못했고, 10여 년의 고된 집필 과정을 거쳐 결국 ‘최초의 여신 인안나’를 되살려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의 저자 인터뷰 내용을 본문 주석과 도판 설명으로 재배치해 수메르 신화와 역사, 문화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또 부록 〈설형문자로 읽는 인안나의 저승 여행기〉에 수메르어 해독 과정과 저자의 해설을 담아, 독자가 직접 설형문자를 해독하며 수메르 신화를 읽는 색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독자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여러 권 여러 번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등장하는 신이 워낙 많은 데다 이름마저 낯설어 외우는 것도 포기하고 그때그때 사전을 찾아가며 이해하는 데 중점을 두고 읽었다. 그러나 머리에 남은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명이나 신들의 이름이 너무 어렵고 낯선 탓이리라. 이 책 『최초의 여신 인안나』는 더 오래 전의 이야기고 문자 체계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읽다보니 이제 걸음마를 배우고 있는 상태인 듯한 느낌이다. 앞으로 수메르 문명 연구자가 더 많이 나와야 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세상은 유일신의 지배지가 되고 말았다. 여신들은 힘을 잃고 명맥을 유지하기도 힘겨웠다. 그들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고, 여성의 삶은 빛을 잃었으며, 똑똑한 여성은 마녀로 몰려 화형당했다 .…… 한 남신만이 존재하는 적막한 유일신전은 더는 있을 수 없다. 아울러 그 신에 대한 두려움도, 성전(聖戰)도, 인간의 아름답고 자유로운 영혼에 대한 압박도, 마녀사냥도, 여신에 대한 경멸이나 무시도, 여성에 대한 추접스러운 차별도 정말이지 더는 있을 수 없다. 결단코 그런 야만은 더는 있을 수 없다.(p.9, 11)
저자 : 김산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신화와 인류학을 공부했다. 30여 년 동안 수메르의 신화·역사·문명 연구에 전념했고, 수메르어·악카드어 같은 고대어를 해독하며 인류의 ‘최초’를 찾아 나섰다. 지은 책으로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신화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 『청소년을 위한 길가메쉬 서사시』, 『수메르, 최초의 사랑을 외치다』 등이 있다.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는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수메르어와 악카드어로 쓰인 점토판 원문을 모두 해독하여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저서 『최초의 역사 수메르』 또한 모든 것의 ‘최초’가 된 수메르와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수메르만을 생각하면서 집필한 역작이라 할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