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누가 선택을 강요하는가? : 여성, 엄마, 예술가 사이에서 균형 찾기 - What Forces Women Artists to Give Up: Balancing Being a Woman, Mother, and Artist
고동연.고윤정 지음 / 시공아트 / 2022년 4월
평점 :
이 책 『누가 선택을 강요하는가?』는 대한민국 현대 미술계의 여성 작가들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짚어내고 있다. 예술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엄마와 예술가의 세 가지 '나'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나라 미술계 여성 작가의 분투기로 요약 가능하다. 척박한 우리나라 미술계에서 여성이기 때문에, 엄마이기 때문에 당하는 불이익과 편견, 곱지 않은 시선 등 많은 것들과 싸워야 했다. 이에 1, 2, 3세대 화가 11명이 각 세대를 대표해 인터뷰에 응하고 그들의 인생 역정, 화가로서의 길, 또 엄마 화가의 거친 삶을 털어놓는다. 이 책이 현대미술 100년의 우리 대한민국 미술계에 확실한 변곡점을 가져올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그동안의 분투 과정을 가감없이 이 책에 녹여냄으로써 전환점을 이룰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비엔날레에 가면 떠올려 봐요. 이 중에 여성 작가는 몇이고, 몇 명이나 아이를 낳았는지. 육아와 창작을 함께한다는 건 목에 칼이 들어오는 듯한 힘든 경험이니까요.” 육아와 예술 활동을 병행하는 어느 여성 작가의 말은 이렇게 바꿀 수 있다. ‘육아하면서 회사를 다닌다는 건’, ‘육아하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이 책은 여성이면서 엄마이고, 동시에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열한 명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독자들은 여성의 경력 단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결혼’과 ‘엄마’의 역할이 어떻게 작가들의 활동과 연관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 실린 생생하고 솔직한 경험담,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 그리고 세대를 아우르는 연대는 우리 인간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반증하는 위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는 여성이면서 엄마이고, 그리고 현직 예술가로 활동 중인 열한 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성, 엄마, 예술가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이들은 드물다. 일을 위해 결혼을 늦추거나(비혼이거나) 아이를 갖지 않거나 혹은 아이나 가정 때문에 활동을 중단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비단 예술가만이 아니다. 현재도 대다수의 여성들이 육아로 휴직이나 퇴직을 하는 게 씁쓸한 현실이다. 그래서 ‘결혼’과 ‘엄마’의 역할이 여성의 일에 미치는 영향을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드는 이 책의 파급력은 크다. 열한 명의 작가들은 ‘한국 여성 미술’의 상징과 같은 70-80대 작가들부터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우고 여성 미술의 태동을 목격했으며 민중 미술에도 가담했던 50대 작가들, 마지막으로 현재 한참 육아와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40대 작가들까지 다양하다. 저마다 예술을 하게 된 계기, 지향하는 바, 표현 방법은 다르지만 공통점도 많다. 솔직한 경험담과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펼쳐 나간 예술 세계는 독자들로 하여금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만들기 충분하다. 또한 어머니, 선배, 친구와 뜨거운 포옹을 나눈 듯한 힘을 준다.
"작가들의 오랜 시간 인고의 세월이 최근의 사회적 변화와 이 책을 통해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인터뷰 과정은 70~80대 선생님들에게는 지나간 이야기를 다듬는 기회가 되었고, 50~60대 작가분들에게는 최근 미투를 통하여 일어난 변화를 반기면서도 '세상'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하여 기대 반, 우려 반을 표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젊은 40대 작가들에게 N번방 사건이나 미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희롱, 성폭력 사건은 진행형이다."(p.6)
열한 명의 인터뷰 참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엄마이자 한국 예술계에서 오래 활동해 온 두 명의 저자는 지금 미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들을 가감 없이 다루었다. 왜 부부 작가의 작품이 남자(남편)의 이름으로 발표되는가부터 대한민국 사회를 뿌리부터 뒤흔들었던 미투 논란과 그 이후까지 빠짐없이 훑었다. 먼저 부부 작가를 이야기했다. 부부 작가가 서로가 배우자인 사실을 밝히지 않는 이유, 일과 가정 내 역할 분담, 파트너이면서 동시에 경쟁자가 되어야 하는 고충 등을 살펴본다.
두 번째는 여성 작가의 ‘몸’이다. 몸은 실질적이고 상징적인 의미가 있고, 오랜 세월 많은 여성 작가들이 몸을 다루어 왔다. 책에서는 작가의 신체 기관으로써의 몸과 예술적 탐구 대상으로써의 몸을 함께 들여다본다. 세 번째는 여성 작가의 연대다. 과거와 달리 SNS 등 온라인 소통 창구가 다양한 요즘에는 자신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많아졌다. 저자들은 이것이 꼭 장점으로 작용하는가에 대한 고찰도 논의에 포함시킨다. 마지막으로 미술계 성차별이다. 미투 열풍이 지나갔다고 하지만 고질적으로 존재하던 문제들은 그대로다. 진솔하고 심층적인 인터뷰를 통해 참여 작가들은 현실에 좌절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유를 밝혔다.
저자들은 참여 작가들의 오래된 기억을 역추적하는 일,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을 현재 시점에 맞추어서 유의미한 일로 해석하고 다시금 이야기로 풀어내는 인터뷰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한다. 여성, 엄마, 예술가라는 세 가지 정체성을 모두 지키고 균형을 찾아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엄마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 자칫 작가의 엄마로서의 경험이 강조되어 작품이 왜곡되어서 해석될 수도 있다.
여성으로 태어나 직업과 모성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고, 필연적으로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역사를 살아온 그녀들은 곧 우리 자신이다. 따라서 자신을 그대로 보여 주는 한편으로 각각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 나가는 이들의 생존 전략에 귀를 기울일 만하다. 여기 실린 작가들뿐 아니라 모든 여성, 인간이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키고 균형을 찾는 데도 이 책은 필요하다. 이 책은 모두 3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들의 뜻으로 세대별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1장 「언니들은 아직도 달린다」에서는 윤석남, 박영숙, 홍이현숙이 참여했다. 이들은 한국 현대미술 여성 작가 1세대들이다. 회화는 물론 예술사진, 설치 및 퍼포먼스가 이 땅에서 쉽게 정착됐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지난 세기까지는 우리 사회에 유교의 물이 그대로 살아 있을 때이니 오죽했겠는가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도 감출 수 없다.
2장 「여성의 연대가 시작되다」에서는 정정엽(회화), 황수정·김수진·김성미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또 진달래(디자인), 김시하(설치) 등이 힘을 보탠다. 이들은 비로소 '연대의 세대'다. 50대 후반의 정정엽과 50대에 막 들어선 ‘공간:일리’, 그리고 ‘사공토크’의 대표 작가, 부부 작가 듀오 진달래의 일원인 작가 진달래, 설치 작가 김시하를 인터뷰했다. 이들은 본격적으로 대학에서 여성학을 배우고 여성 미술의 태동을 목격한 세대다. 동시에 1990년대 말 대안 공간 중심의 한국 미술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덕을 보았다기보다는 소외되기도 했다. 국내 미술계에서 유학생 위주의 특정 대안 공간이 내세우는 여성 작가들이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고, 잘나가는 국제적인 스타일과 그렇지 않은 스타일의 구분이 더 극명하게 나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실히’ 대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대학원 졸업 이후 ‘최전방’ 미술계에서 자리 잡기는 어려워졌다. 따라서 이들은 지난 20여 년간 급변하는 한국 미술계의 상황에서 개인적인 경력 단절과 전통적인 미술 교육의 공백을 몸소 체감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40대 후반을 지나서도 작업을 지속하는 여성 작가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들에게 한국 미술계의 변화가 작가에게 어떻게 투영되었고 이들은 생존을 위해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들 중 대표격인 정정엽에 대해 공동저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018년 고암(이응노) 미술상과 2020년 '올해의 양성 평등 문화인상'에 선정된 정정엽은 한국 여성 미술의 발전 과정을 논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작가다. 1980년대 민중 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팥과 콩'을 주제로 한 회화와 2000년대 설치 작업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여성미술연구회, 터, 입김 등 국내의 주요 여성 미술 공동체나 모임의 주요 멤버이기도 하다."(p.167)
3장 「동등하다는 환상 : 말과 행동의 이중성」에서는 1970년대 후반 출생으로 현재 한참 육아와 작업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정직성, 김도희, 조영주, 국동완 작가를 인터뷰했다. 이 여성, 엄마 작가들은 국내 미술계에서 1990년대 후반 대안 공간이 생겨나고, 예술적 매체나 장르가 급격하게 확장되며, 국내 대학에서 여성학 교육이 시작되던 시점에 미술대학을 다니거나 작가의 길에 접어든 세대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계에 계속되는 젠더적 차별을 경험했고 여성, 엄마 작가로서 가정사를 노출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은 않은 세대이기도 하다. 동시에 여성 작가가 성공하기 위해서 결혼이나 육아가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성공한’ 동료 여성 싱글 작가의 예를 보면서 뼈저리게 경험한 세대다. 따라서 우리 시대 여성 미술의 의미, 여성성을 다루는 방식, 육아의 의미를 새롭게, 그러나 보다 현실적으로 정의해 가고 있다. 세대가 바뀌면 세상이 달라질 법도 한데 정직성, 김도희, 조영주, 국동완 작가들은 여전히 미술계 내부, 가족, 사회에서 여성 엄마 작가를 향한 차별적인 시선을 안고 산다고 한다. 지잔 5년간 미술계 내에서도 유명 미술관의 기획자, 비평가, 작가의 성폭력이나 성희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지만 흐지부지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로서 30~40대 육아의 부담을 갖지 않은 동료 여성 작가드에 비하여 시간이나 에너지에 있어서 저돌적으로 맞서기도 힘들다. 이에 다가오지 않은 '동등한' 시대에 대한 염원은 절실하지만 젠더적인 관점에서 '동등한 미술계'라는 미완의 과제는 아직도 30~40대 여성, 엄마 작가를 짓누르고 있다. 정직성 작가에 대한 설명을 잠깐 살펴본다. "2000년대 중·후반 성공한 회화 작가로 통하기도 했던 정직성이 미술 시장에 뛰어든 것은 흥미롭게도 계급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기인한다. 2000년대 초 도시 개발과 자본주의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룬 작가 공동체 '플라잉시티'의 멤버였고, 자본주의 비판이라는 미술계의 거대 담론과 여성 동료이자 엄마, 며느리 작가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미시적인 차별 상황에서 드러나는 모순적인 상황을 몸소 경험했다."(p320)
이 책을 만들게 된 데는 또 다른 배경이 있어요. 아예 성공하기 위해서 결혼을 미루는 여자 작가들이나 개인적인 삶을 공공의 장소에서 밝히는 것을 꺼렸던 이전 세대와 달리 요새 젊은 작가들은 페이스북을 통해 육아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하기도 하잖아요. 더 다양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여성 엄마 작가의 이야기가 공유되더라고요. 육아나 남편과의 관계에 있어 세대마다 다른 이야기들이 구체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지요.(p.12) - 「들어가는 말」 중에서
저자 : 고동연(DONG-YEON KOH)
국내외 아트 레지던시의 멘토, 운영위원, 비평가로 활동 중이며, 2014년부터 국내 미술인의 인터뷰 책을 출간해 왔다. 2017년과 2018년 고양 야외조각축제의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응답하라 작가들: 우리 시대 미술가들은 어떻게 사는가?』(2015), 『STAYING ALIVE: 우리 시대 큐레이터들의 생존기』(신현진 공저, 2016), 『소프트파워에서 굿즈까지: 1990년대 이후 동아시아 현대미술과 예술대중화 전략』(2018), 『THE KOREAN WAR AND THE POSTMEMORY GENERATION(한국 전쟁과 후기억 세대: 동시대 미술과 영화)』(ROUTLEDGE, 2021) 등을 썼다.
저자 : 고윤정(YOONJEONG KOH)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퍼포먼스 아트를 중심으로 한 《프롬나드런》(2019), 세종문화회관의 《행복이 나를 찾는다》(2020), 《하나의 당김, 네 개의 눈》(2021) 등을 기획했다. 2018년 『퍼포먼스 아티스트 레코딩』으로 한국의 퍼포먼스 아트, 공동체 기반의 예술을 실천하는 젊은 작가들에 대한 작은 비평서를 썼다. 끊임없이 생동하는 동시대 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예술가, 큐레이터, 비평가, 전시 공간 등 독립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미술계 일원이 자생하는 생태계에 주목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